전쟁물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현실을 증폭시킨 전투신(scene)이 중심인 것과, 전쟁 자체를 사유하게 하는 드라마이다. 유형별로 전해지는 감흥 또는 감동의 초점도 다르다. 생과 사를 위해 총을 겨누는 전장(戰場)의 ‘참혹성’이 있는가 하면, 전쟁의 이면에 존재하는 ‘휴머니즘’이 있다. 이러한 참혹성과 휴머니즘은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를 묻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은 이 같은 물음에 짙게 다가가게 한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홀로코스트가 자행된 폴란드 아우슈비츠가 공간적 배경이다. 무거운 소재임에도 영화는 전반적으로 톤 앤 무드가 잔잔하다. 그래도 시퀀스에 따라 묵직한 사유를 던지며, 전쟁의 명분, 즉 당위성을 고민하게 한다.
이미지 출처: movie.daum.net
영화는 어린 브루노(에이사 버터필드)가 독일군 친위대 사령관인 아빠(데이빗 듈리스)를 따라 독일 베를린에서 폴란드로 이사하는 것에서 발단한다. 도시에서 시골 마을로 이사한 브루노는 친구도, 즐길 거리도 없는 새로운 환경에 지루해 한다. 방 창문 너머로 보이는 농장(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한 궁금증이 일상에서의 재미라면 재미다. 게다가 농장의 농부(유대인)를 아빠는 ‘사람도 아닌 자’로, 개인교사는 ‘괴물’로 치부하는 것도 의문이다. 어느 날 브루노는 상처 난 다리를 치료해 주는 유대인 마틴(도몬코스 니메스)과 대화하던 중 그가 의사였다는 사실을 알고,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자’들에 대한 선입견을 지우기 시작한다. 영화의 전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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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존재와 그들이 농장에 있는 이유에 대한 개인교사의 생경한 사상교육에 브루노는 오히려 의구심을 갖기도 한다. 농장에 대한 브루노의 관심이 커지자 아빠는 브루노 방의 창문을 폐쇄한다. 외부와의 차단을 위한 것으로써 홀로코스트에 대한 나치의 은폐로 해석된다. 호기심 강한 브루노는 엄마(베라 파미가)의 눈을 피해 농장을 찾게 되고, 그곳에서 또래의 슈무엘(잭 스캔론)을 만난다. 위기의 시작이다. 브루노와 슈무엘은 농밀한 사이가 되지만, 철조망으로 인해 이들은 어우러질 수가 없다. 철조망은 유대인을 제어하는 기능이기도 하지만, 브루노와 슈무엘을 경계 짓는 막중한 역할로서 작용한다. 결코 어울릴 수 없는 현실의 벽을 말하고 있다. 이는 이들이 친구사이인지를 추궁하는 독일 친위대 장교인 칼(헨리 킹스밀)에게, 브루노가 슈무엘과 친구임을 부정하게 되는 상황에서 확인된다. 서로 친구가 될 수 없는 상황, 전쟁의 불목적성과 불정당성을 어린이의 시각에서 담고 있다. 그러나 브루노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브루노는 다시 슈무엘을 찾아가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 친구가 되기를 요청한다. 이 무렵 엄마는 굴뚝의 연기에 의심을 품게 되고, 그 진상을 알고 난 후 아빠와 이념적으로 대립한다. 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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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이러한 절정을 통해 전쟁과 인간, 인종에 대한 눅진한 감정을 발산하게 한다. 특히, 엄마의 인본주의에 기인한, 인간의 존엄성 회복에 대한 중추신경의 반응이 그렇다. 브루노가 슈무엘을 다시 찾아가는 행위도 이것과 마찬가지이다. 전쟁의 목적 너머에 있는 인간 본연의 존재가 고귀하다는 것을 영화는 일깨운다. <사울의 아들>에서 사울(게자 뢰리히)이 학살에 희생당한 아들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랍비를 찾는 과정과도 닿아있다. 전쟁 중에라도 인간의 존엄성은 오롯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울의 아들>에서는 사울에 밀착한 핸드핼드 기법이 이러한 메시지를 극대화시킨다. 아우슈비츠의 실상과 민낯을 직관적으로 연출하며, 반대급부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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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의 결말은 비극적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따뜻한 휴머니즘도 짙게 깔려 있다. 구분은 차이를 낳고, 차이는 낙인으로 이어지는 세상사의 원리를 어린 브루노가 깨트린다. 감정선이 요동치는 포인트이다. 때문에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 그 명분에 대한 정합성은 어떤 것일지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인류가 진화하고, 문명이 발전하면서 ‘전쟁’은 어떠한 형태로든 발생했다. 총성 없는 바이러스 전쟁을 치르고 있는 2022년, 휴머니즘이 필요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