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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문식 Nov 02. 2020

명상 속으로

지난 삶을 담는 그림자가 생겼다

                            

고려시대 이규보는 20대에 이런 시를 썼다.

세상 사람 모두가 나를 잊어버려/ 천지에 이 한 몸은 고독하다./ 세상만이 나를 잊었겠구나?/ 형제마저 나를 잊었다./ 오늘은 아내가 나를 잊었으니/ 내일이면 내가 나를 잊을 차례다./ 그 뒤로는 하늘과 땅 사이에/ 가까운 이도 먼 이도 완전히 없어지리./

참신하다. 잊혀 가는 사람의 고독감을 표현하고 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망각하는 것이 세상사다. 나는 아둔하여 이규보가 20대에 깨달은 이런 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삶 속에서 허둥거리다가 마음이 여문다. 지나는 길을 따라 이름 모를 꽃을 본다. 내 숨소리가 내 귓가로 다시 돌아온다. 기다리던 소리는 들리지 않고 바람 소리만 더 크게 들린다. 부는 바람 소리조차 서운하여 옷깃을 여민다. 담벼락을 넘어오는 덩굴장미가 아둔함을 대신한다. 덩굴손을 타고 오르면 무엇이 보일까 몸부림친다. 나뭇잎 하나가 떨어진다. 발아래 떨어진 나뭇잎을 주워 본다. 핏줄이 말랐다. 저세상으로 떠나가는 인간의 모습을 본다. 그리움을 남기고 다른 나뭇잎이 대신 떨어진다.

시간의 흐름을 본다. 정지된 듯 고요한 세상에서 내일을 기다린다. 서쪽 하늘의 햇살이 주는 의미를 교만으로 밀어냈던 지난 세월이 부끄럽다. 나의 아둔함이 어디까지인지 모른다. 지우려는 마음을 너무 일찍 알아 기쁜 것 같기도 하고, 너무 늦게 알아 슬픈 것 같기도 하다. 지난 세월에 잊어버려야 하는 일조차 잊지 못한다. 그리워할수록 세월은 멈출 줄 모른다. 그리운 사람도 만나보고 싶고, 아름다운 곳도 가보고 싶은데 내 덫에 걸려 앉아 있다.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바뀌었다. 주변의 쓸데없는 것들을 버리는 청소가 필요하다. 가치가 없어진 물건들이 수두룩하게 쌓여 있다. 과거로부터 비롯된 경험과 선입견, 직장 생활의 사고방식, 생활 습관을 지운다. 책장부터 정리한다. 많은 책들, 앨범, 연구하던 자료 등을 버렸다. ‘백과사전’과 ‘창작과 비평’을 제일 먼저 버렸다. 내 가슴에 새로운 경험과 넓은 눈을 담을 수 있는 빈터가 많아졌다. 쓰레기통을 깨끗하게 비운 기분이다.

지난 세월은 잠시 스쳤을 뿐이다. 공평하게 주어진 하루 24시간이 오고 간다. 인생도 그렇게 오고 간다. 내 의지에 따라 시간은 천천히 가기도 하고 빨리 가기도 한다. 아파트 창 너머 지나가는 차 소리가 멀어지더니 귀까지 함께 따라간다. 세월은 내 인생의 꽃이 되기도 하고, 운명이 되기도 한다. 세월 속에 그리운 호수를 만들어 놓고, 그 호수에 얼굴을 비추니 내 그리움이 보인다. 할 일은 많은데 생각만 앞선다. 이런 마음이 사소한 일도 귀하게 만든다. 그 외로움을 바구니에 담아낸다. 마음속의 해는 미련이 남아 있다. 잃어버린 나를 찾는 시간이다. 돌이켜보면, 지난날은 모두 즐겁다. 어제도 행복했고, 그제는 더 행복했다.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충고나 옳은 말이 아니라 나를 향한 나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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