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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 Aug 07. 2021

SF가 증명하는 역사

단편 소설집 <밤의 얼굴들>

저에게 SF는 미래를 보는 창입니다. 수만 가지 경우의 수 중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상상하도록 도와주고, 그래서 지금 어떤 고민을 해야 할지 일러주기 때문이에요. 반대로 SF가 과거를 보는 창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는데요. 황모과 작가의 소설은 바로 그런 작품입니다. 그는 만화가가 되고 싶어 건너간 일본에서 갖게 된 경계자의 정체성으로 대한민국과 일본의 과거, 미래를 넘나드는 소설을 씁니다.



이 소설집의 첫 번째 단편 <연고, 늦게라도 만납시다>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서 전사한 신원 불명 유골을 식별할 수 있는 미래를 배경으로 합니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데이터베이스 덕분에 늦게나마 유골을 유족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DNA 분석기를 들고 고조할아버지의 유골을 찾으러 도쿄로 온 유미는 한 무덤가에서 자신의 과거를 잊은 채 무덤가 관리 사무실에 사는 한국인 유령을 만납니다. 이 유령은 어쩌다 이곳에 머무는 걸까요? 유미는 고조할아버지의 유골을 찾아 돌아갈 수 있을까요?


일제 강점기를 통과한 뒤,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는 더욱 묘해졌습니다. 단편 <투명 러너>에서는 큰 부국이 되었다가 쇠락하고 있는 일본과 전세를 역전시켜 강한 나라로 성장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대비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워홀 비자로 일본에 온 지훈은 고등학생 때부터 삽십대 후반인 지금까지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는 ‘니상(형님)’과 함께 일합니다. 일본이 한창 문화적으로 우세했을 때를 기억하는 둘은 애니메이션 이야기로 수다를 시작하지만, 동시대의 영화나 스포츠 얘기를 할수록 지훈은 잘 나가는 모국을 등에 업어 의기양양해지고 반대로 ’니상’은 은근히 주눅듭니다. 우리는 한 나라의 사람이니 모국을 대표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 나라의 위상대로 서로를 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투명 러너>의 마지막 문단은 황모과 작가가 그동안 고민했던 흔적이 느껴집니다.


“차마 다 해석되지 않는 것, 이가 빠진 것처럼 불명확한 것, 말로 다 전달되지 않는 것, 말로 표현하니 오히려 오해가 생기는 것, 누군가 조장한 의도적인 데마고기(demagogy), 잘못된 교육이 만든 단단한 장벽, 100년이 흘러도 해결되지 못한 역사적 상처. 해결이 간단하지 않은 문제들이 우리 사이에 쌓여 있다. 그런 한계를 장대높이뛰기 선수처럼 폴짝 뛰어넘는 존재가 나와 니상 사이에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해결은 요원하지만 사람과 맥락을 동시에 이해하려고 할 때 가슴으로 이해되는 정서들이 통역되어 성큼 다가온다.” — <투명 러너> 중


<밤의 얼굴들> 속 모든 단편이 일본과 한국의 관계를 그리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의 기억은 유령>, <탱크맨>은 사회가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을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세상을 거시적으로 볼 줄 모르던 어린 시절엔 역사의 흐름이나 산업의 변화 같은 게 제 삶의 구석구석에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잘 알아채지 못할 만큼 천천히 혹은 조심스럽게 변화할 거라고 짐작했어요. 하지만 살다 보니 그런 흐름은 우리와 동떨어져 보여도 알고 보면 깊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제는 압니다. 우리가 버는 돈은 우리의 진짜 가치보단 우리가 속한 국가나 산업의 흥망성쇠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개인의 성공은 노력보단 흐름을 잘 탄 운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의 기억은 유령> 중

    

이 단편집에 실린 소설들은 독특한 감각을 지닙니다. 조금 푸석할 만큼 건조하고 어딘가 그을렸는지 씁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책장이 잘 넘어가는 데다 자꾸만 다음 단편이 궁금해집니다. 자칫 진지하고 우울해질 수 있는 소재를 SF적 상상력으로 풀어낸 덕분이 아닐까요. 덕분에 SF 소설의 외연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는 SF 단편 소설집, <밤의 얼굴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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