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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문아 Dec 11. 2022

내면이 타버리면 내향인은 어디서 힘을 얻지

번아웃 증후군

 흔히들 직장인은 3,6,9년차에 번아웃이 온다고 하더니, 내가  딱 그꼴이다. 딱 6년차에 거대한 파도같은 번아웃이 나를 집어삼켜버렸다. 1-5년차 때에 맞이하는 월요일이 '아, 회사 가기 싫어-' 정도였다면, 이번주에 맞이하는 월요일은 '아아아아아아아아- 회사가기 싫어 죽을 것 같아아아아아-' 정도로 심각해졌다. 인터넷에 올라와있는 '번아웃 증후군 자가진단'을  해보니 65점 이상이면 심각한 수준이라는데, 무려 77점이 나왔다. 이 정도면 거의 기름을 들이붙고 불을 붙인 바람에 잿더미만 남고 바스스 부서진 꼴이다. 이상하다, 난 한번도 활활 불탄 적은 없는데.



 번아웃의 원인을 따지자면, 그저 묵묵히 일한 탓이라고 하겠다. 개개인의 성과가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짬'이 두둑한게 배짱인 이 회사에서, 티도 나지 않는 잡일을 꾸역꾸역 처리해내느라 동분서주한 이번 한달의 타격이 가장 컸다. 그것에 더해, 연말이랍시고 회사에서 포상을 준다는데 그 놈의 '짬' 때문에 나는 그 순위에서 밀려 결국 다른 사람에게 포상이 돌아갔다. 상을 못받은 건 억울하지 않았지만, 내가 그저 이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나 하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것 같아 눈물이 왈칵 났던 한 달이었다.





어쩌면 사소한 일이었다. 난 평소에 그렇게까지 삶의 비중을 '회사'에 두지 않는 성향이기 때문에, 애초에 회사에 몸바쳐 일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남들처럼 어떤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추진시켜 승진을 하기 위해 불철주야 그것에 매진한 것도 아니고, 상사 옆에서 이쁨을 받고자 하염없이 두 손을 딸랑딸랑 흔들어댄 것도 아니다. 그저 잡일들을 묵묵히 처리했다. 오면 처리하고, 오면 또 처리하고.



그런데 그 은근한 성냥불같은 것이 내 내면에 자리를 잡자, 어느 순간 그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나는 극내향인이고, 나의 모든 에너지가 바깥이 아닌 나의 내면으로 향해있기 때문에, 내면에 붙은 불을 끌 수 있는 방법을 몰랐다. 나에게 유일하게 에너지를 줄 수 있는 내면이 다 타버려  쓸모없게 되니 나는 더 이상 에너지를 얻을 수 없는 고장난 구식 핸드폰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전원이 다시 켜질 줄을 몰랐다.



회사 동료와 맛있는 걸 먹으러 가도 그 때 뿐이었고, 주말에 좋은 곳에 놀러가도 그 때 뿐이었다. 까만 잿더미가 된 내 내면에서는 아무런 에너지도 피어오르지 않았고, 오히려 억지로 누군가에게 웃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느라 그나마 남아있던 예비 배터리까지 다 소진하고 있는 꼴이었다. 꾸역꾸역 운동까지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허탈감이 온 몸을 감싸왔고, 울 힘도 없이 기진맥진하여 그저 꿈나라에 빠져드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하루하루 일어나고, 출근하는 그 단순한 생활이 고통스러워지는 게 너무나 괴로웠다. 그래서 나는, '번아웃 증후군 극복하기'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내 내면이 힘을 잃었으니, 내 내면의 힘부터 다시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닥까지 곤두박질 친 자존감도 조금은 회복을 해야했다.



첫째로, 주말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쉬었다. 정말 일어나자마자 마음이 동해서 하고싶은 것만 했다. 운동은 가고 싶어서 운동만 다녀왔고, 몸을 정갈히 씻은 뒤에 맛있는 걸 차려먹고나서는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있다가 또 심심하면, 그 때 그 때 하고싶은걸 했다. 의무감이라던가, 타인의 의지가 개입된 것은 그 어떤 것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행히 내면의 배터리가 5% 정도는 충전되었다.



두번째로, 내 삶의 방향을 다시 조정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삶의 방향이 '회사'가 아니었고, '회사 속에서 잡일을 하느라 매일매일 바쁘고 퇴근하면 녹초가 되는 나'는 더더욱 아니었다. 내가 뭘 하고 싶었는지, 내 궁극적인 삶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그 목표를 위해 아주 작은 발걸음이나마 걸어가기 시작했다. 최근 인스타그램에서 눈에 계속 밟히던, '오디오 출판' 이라는 강의를 충동 결제했다. 내가 이미 오디오 작가가 된 것처럼 뿌듯한 성취감이 피어올랐다. 배터리가 15% 정도는 충전되었다.



세번째로, 조정한 삶의 방향을 친한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부끄럽고 형편없는 민낯이어도 일단 말로 뱉고 보았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싶노라, 작가가 될 것이다, 하고 말해보았다. 허황된 꿈도 꿔보았다. 내 필명으로 된 책을 출판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겠노라. 그리고 지인들의 이런 말들을 듣고 뿌듯함을 채웠다. '응! 정말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배터리가 25% 정도는 충전되었다.



네번째, 나의 1년뒤, 5년뒤 모습을 기대할 수 있는 꾸준함을 만들기 시작했다. 남은 배터리를 충전시키기 위해, 최근에는 그동안 생각만 해오던 장편소설을 써보기 시작했다. 장편소설 한 편이 A4 용지 100장 정도라고 하니까, 한 달에 10장 정도만 써도 1년이면 장편소설 한 편은 거뜬히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적어도 난 1년 뒤에는 장편소설 초고를 가진 작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종종 가던 운동에도 좀 더 박차를 가해 꾸준히 가기로 했다. 매일매일 사진을 찍어 내 운동 결과도 남기기로 했다. 1년 뒤, 5년 뒤에는 점점 더 운동을 잘하고, 멋진 몸을 가꾼 내가 된 걸 상상해보았다.




아직 내 배터리는 30% 정도이다. 위의 계획처럼 세상 모든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니까, 생각보다 배터리 충전에 시간이 걸리곤 한다. 운동 실력이 다시 퇴보하거나, 소설의 한 장면이 죽어도 써지지 않는다거나- 혹은 운동과 글을 쓸 시간 자체가 회사 때문에 나지 않는다거나 하는 장애물은 늘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더 애써보려고 한다. 내 내면이 적어도 다 타버리지 않게, 1%의 배터리라도 남아있을 수 있게 유지할 수 있는 건 바로 내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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