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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문아 Mar 22. 2022

"앉아서 전화받는 업무나 하고 있냐?"

아뇨, 그래서 안 받고 있습니다.  

"삐비비빅"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사무실, 내 자리 위에 놓인 전화가 울리면 왠지 긴장감이 맴돈다. 빠르게 전화기 화면에 뜬 발신번호를 스캔한다. '010........' 번호를 보니 개인 휴대폰 번호다. 휴대폰 번호면 대부분 회사 내부 직원은 아니고, 아마도 민원전화일텐데... 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다른 직원이 대신 당겨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벨소리가 두세 번 울리게 둔 후에 잠시 고민하다 수화기를 든다. 상사가 받았다가 괜히 불똥이 나에게 튀면 매우 곤란하므로.

 


"네, ○○ 부서 ○○○입니다."

   

"여보세요, 거기 ○○ 부서요? 거 내가 민원을 넣었는데..."


" 아 제가 전화를 대신 받았는데, 지금 팀장님이 자리를 비우셔서..."


"아, 거기서 전화 대신 받고 그런 업무나 하고 앉았어?"




아, 잘못받았다. 수화기를 쥔 손에 땀이 배어나기 시작한다.





나는 전화를 극도로 싫어한다. 요즘 MZ세대들은 카톡, 혹은 페이스북 메신저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에 익숙하다 보니 전화를 기피하는 성향이 많이들 생겼다고 하지만, 나는 휴대폰을 처음 가지게 된 대학생 시절 한참 전부터 전화가 싫었다. 가뜩이나 남들 앞에서 '말' 자체를 잘 못하는 성격에, 대화를 하며 남의 표정이나 기분을 살펴야 속이 편한 내가 상대방 표정을 전혀 볼 수 없는 채로 빠르게 대꾸해야만 하는 전화를 좋아할 리가 만무하다. 상대방이 전한 말의 의미를 곱씹고, 어떤 대답을 해줘야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내 의도를 부드럽게 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려면 적어도 10초는 주어야 할 것 같은데, 수화기 너머에서 10초의 침묵이 주어진다면 성질 급한 한국인은 백 프로 "여보세요? 듣고 있어?"라고 외칠 것이 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나도 전화를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평일 9시부터 6시까지, 사무실 내 자리 위에서 전화벨이 울리는 순간이다. 물론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도 사내 메신저가 잘 발달해있고, 최근에는 대부분의 업무를 메신저 혹은 메일로 처리하게 되어 전화를 할 일이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식은땀이 줄줄 나는 순간들이 닥쳐오고는 한다.


사무실 전화, 꼭 받아야 하나요?


1년마다 순환근무를 하는 회사 특성상, 그 해에 내가 맡게 되는 업무에 따라 걸려오는 전화량도 천차만별이다. 작년에 내가 있던 자리에는 9시 땡 하자마자 전화가 불티나게 걸려왔다. 단순 문의전화, 외부로부터 온 항의 전화, 내부 직원의 업무협의 전화 등등. 그때는 오히려 너무 쉴 새 없이 전화가 걸려오니, 거의 기계처럼 받아대기 시작했다. 그 전화는 오후 6시 직전까지 끊임없이 걸려왔고, 결국 팀장님께 '전화가 너무 많이 와서 업무처리를 못할 지경이다, 그러니 당분간 전화를 부재중으로 돌려놓겠다.'라고 선언(?)하고 일정기간 동안 전화를 돌려놓은 적도 있었다. 내 업무를 처리할 시간은 얻었지만, 괜히 다른 직원을 통해 들어오는 항의 전화에 괜스레 마음이 불편했던 나날들이었다.




"아니, 그 직원은 왜 전화를 안 받는대요? 계속 부재중이던데, 퇴직하셨어요?"


" 아, 너무 바쁘셔서 그러실 거예요. 제가 전달드리겠습니다."




내 이름이 들려오면 귀가 쫑긋 선다. 결국은 부재중으로 걸어놓았던 전화를 다시 푼다. 그럼 또 1초 만에 전화가 걸려오는 것이다.




올해 새로 온 내 자리는 내부 직원을 상대하는 업무라 전화가 거의 오지 않지만, 가끔 걸려오는 전화의 강도가 매우 세다. 혼을 쏙 빼놓을 정도이다.


 우리 회사는 민원전화가 많다. 거기다가 회사 직원 모두의 번호가 홈페이지에 노출되어 있는 특성상, 민원처리를 담당하는 직원이 아니더라도 불시에 잘못 걸려온 민원전화를 받는 것이 일상이다. 물론, 민원을 넣고 민원 전화를 거는 것도 시민의 권리이며 우리 회사가 처리해야 할 업무 범위 내에 있는 것이지만, 가뜩이나 '콜 포비아'인 나에게 갑자기 걸려오는 민원전화는 응대하기 가장 어려운 업무 중 하나이다. 거기다가 내가 지금 있는 부서는 그 민원들 중 처리가 지연되고 있거나 해결이 어려운, 가장 난이도가 높은 민원이 모이고 모이는 곳이기에, 이미 화가 잔뜩 난 채로 전화를 거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아가씨'라고 불리는 건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다. 대뜸 반말, '건방 좀 떨지 말아라.', '거기 사장 바꿔라.', '네가 그 회사 좀 다닌다고 잘난 척하느냐, ', '내가 대통령보다 위다.' 등등. 가끔은 그저 나에게 화풀이하시려고 전화를 한 건가- 싶을 정도로, 옆사람에게 소리가 다 들릴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친다. 전화를 잘못 거셨고, 제가 해결해드릴 수 있는 게 없으며, 담당 직원에게 전달해드리겠노라 계속 말해도 어쩐지 점점 더 화를 내신다. 내가 응당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있다고 여기나 보다. 그럼 조금 진정하실 때까지 조용히 있어본다. 그럼 10초도 안돼서 들려오는 소리.




" 여보세요? 왜 대답을 안 해?"


... 어쩌라는 건지.





입사 초반, '전화응대 업무'는 끊임없는 고민의 연속이었다.



신입일 때는 전화를 받은 뒤 첫인사를 어떻게 해야 어수룩해 보이지 않을지를 고민했고, 옆자리 직원이 자리를 비웠는데 전화가 오면 대신 받을 때는 어떻게 멘트를 시작해야 할지 등을 고민했었다. 또, 상사가 불시에 전화를 걸어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누군가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어떻게 응대해야 하는지 등을 고민하기도 했다.


회사에 입사한 지 6년이 지난 지금은, 그런 소소한 고민까지는 하지 않아도 여전히 긴장이 되곤 한다. 수화기 들기 3초 전에 괜히 심호흡을 하고, 손에 배어난 땀을 닦는 버릇은 고치지 못했다. 또, 내가 누군가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 상황이면 이왕 전화보다는 메일 혹은 메신저로 연락하는 것을 종종 선택하곤 한다.(상사가 빠르게 전화로 처리하라고 일부러 지시하기 전까지 답답해 죽어도 그냥 메일을 보내버린다.) 나에게는 전화로, 말로 누군가에게 설득력 있게 내 의사를 전달하기가 매우 어렵고, 또 내가 상대방에게 설득을 당하지 않기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무실에 있을 때 불필요한 전화를 최대한 피하는 노하우(?) 아닌 노하우도 나름 생겼다. 내가 터득한 귀여운 '전화 피하기 노하우'는 다음과 같다.



1. 메신저나 메일을 보낸 직후, 화장실 다녀오기 등 잠시 자리 비우기

 나는 메신저나 메일을 정성스럽게 써서 보냈는데, 꼭 이에 대한 회신을 전화로 처리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 말발이 좋은 사람들이라, 내가 그 사람들의 전략에 말리곤 한다.) 그럼 나는 메일을 보낸 직후, 잠시 자리를 비워버려 전화를 일부러 받지 않는다. 그러면 상대방이 메일로 회신하거나, 추후 내가 준비가 되었을 때 다시 전화를 걸 시간을 벌 수 있다.


2. '제가 바로 회의가 있어 자리를 비울 것 같으니, 메일로 회신 부탁드립니다.'

 대놓고 전화 걸지 말라고 부탁하는 방식이다. 오히려 예의를 차리고 보내는 것이기도 하니, 상대방은 '쟤 콜 포비아인가 봐.'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의심 없이 그냥 메일로 회신을 주고는 한다.


3. '제가 조금 더 알아보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팀장님과 상의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받았는데 바로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 혹은 바로 대꾸를 했다간 일이 더 꼬일 것 같을 때, 만능어처럼 쓰이는 대사이다. 일단은 즉각적인 대답을 회피하고,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알아보거나 생각한 뒤 또 장문의 메일을 상대방에게 보내곤 한다. 혹 상대방이 전화를 할 때 '지금 답변을 달라'라고 종용하면, '아, 제가 회의가 있어서...'라고 하고, '제가 바로 알아보고 답변드릴게요!' 하고 끊는다. 왠지 말투에 허둥지둥하는 느낌(당장 회의실로 가지 않으면 안 되며, 지금 상사가 내 옆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좋다. 특히, 최대한 죄송스럽다는 느낌과 함께 '정말 죄송한데...' 하고 덧붙이면 더 좋다.


4. '저는 잘 몰라서, 제가 담당자분께 전달드리겠습니다.'

 위에 예시처럼 갑자기 화가 잔뜩 난 채 '너 앉아서 전화받는 업무나 하고 있냐'라고 하시는 분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방법이다. 대부분 전화를 붙들고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제대로 듣지 않으시고, 어린 직원의 응대는 기본적으로 무시하는 분들께 쓰는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의 느낌으로 최대한 어수룩하고 어려 보이게 전화를 받으면, 민원을 넣은 사람도 '얘가 내 민원을 처리해줄 리가 없다.'라고 생각하는지 금방, '그럼 담당자에 잘 전달해라.'라고 하고 적당히 끊어주시는 편이다.

 







친구가 '너 지금 전화돼? 할 말 있는데 톡은 답답하다 ㅋ'라고 보내면 괜히 못 본 척 폰을 슬그머니 내려놓는 내향인들이여, 사무실에서는 전화를 피할 수 없어 매일 머리를 쥐어뜯고, 전화가 올 것 같으면 자리를 광속으로 비워버리는 내향인들이여.

오늘도 전화 벨소리 없는, 아니 없기는 어렵고, 10번 미만으로 걸려오는 하루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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