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 편이에요.'라는 설득 무기
식당이 나대 합실 등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에 TV가 있다면, 과연 그 TV는 어떤 채널을 보여주고 있을까? 예전엔 미처 생각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종편 채널에 고정된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것도 상대적으로 좀 더 편파적이고, 배타적이며, 좀 더 일 방향 성향의 보도를 하는 채널이나 프로그램이 더 인기가 높아 보인다. 그렇다고 그런 채널에 TV를 고정한 주인의 성향이 한쪽으로만 편향된 정치관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닌 듯하다. 어렵게 용기를 내서 ‘이 채널을 좋아하시나요?’ 물으면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대답을 들을 때가 많았다. 굳이 선호하지도 않은데 왜 자극적이고 편향된 톤의 말들을 듣는 걸까? 그냥 듣자니 평범한 듯 이것도 저것도 아닌 태도보다는 뭐가 됐든 한쪽에서 서서 반대편에 있는 쪽을 일방적으로 매도할 듯이 보이는 공격적인 태도가 더 재미있어서일까?
직장으로 시선을 돌려서 생각해 보자. 이 말도 좋고, 저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는 중도의 대명사 황희 정승 같은 선배가 있다. 그만큼 후배로부터 신뢰도도 높다. 그 반면에, 본인만의 확실한 주관이라고 말은 하지만, 아부나 줄 타기를 통해서 대 놓고 라인을 형성하는 선배가 있다. 라인 타기를 즐기는 선배는 본인의 라인이 아니면 확실하게, 하지만 티는 내지 않게 타 라인을 응징하는 것이 사회생활의 기본 콘셉트이다. 그렇다면 중도 형의 선배와 배타 형의 선배 중 누가 더 후배로부터 선호도가 높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중도 형의, 그리고 어떤 의견이든 받아들이는 선배가 더 선호도가 높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 만세상은, 사람의 판단은 상식과 합리성을 벗어나서 본능에 의존할 때가 더 많다. 이성은 황희 정승 편이어도 본능은 그 반대다. 사람은 세상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이분법’의 판단을 갖는다. 나에게 이로운지 아닌지, 나와 친한지 그렇지 않은지, 나와 의견이 잘 맞는지 안 맞는 사람인지…… 나와 맞으면 좋은 사람, 그렇지 않으면 좋지 않은 사람. 어중간한 사람은 더 좋지 않은 사람.
여기에 또 하나, 영국 런던대학 세미르 제키 신경과학 교수는 성인 남녀에게 미워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보여주고 각각의 뇌를 촬영했더니 놀랍게도 두 경우 모두 뇌의 같은 부분이 활성화된 것을 밝혀냈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어서, 아주 작은 변화로도 사랑이 증오나 미움으로 순식간에 바뀌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애증’의 시작은 같다. 이 끝에서 저 끝으로 극단적으로, 순식간에 감정이 바뀌고 정반대의 판단을 내린다. 거기에다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어중간하게 있는 걸 싫어한다. 겉으로 싫다 좋다 명확하게 표현은 하진 않지만, 어딘가 한 편에 있는 걸 추구한다. 그리고 순간적인 비 이성적 판단 회로에 의해서 내 편이면 긍정적 감정이, 그렇지 않으면 반대의 감정이 솟구친다. 그런데 그 흐름은 순식간에 정 반대로 바뀌기도 한다. 이 모든 감정이 뇌 같은 곳에서 시작되고 완성된다. 지금 주위에 있는 누군가를 본다면, 나는 그에 관한 모든 이성적, 합리적 평가와 판단은 뒤로 한 채, 그 사람이 나와 감정적으로 맞는지 아닌지를 본능적으로 먼저 판단한다. 그리고 그 본능이 클수록, 호감도 가강할수록 좋은 평가를 한다. 하지 만정작 나는 나의 결정과 판단에 대해 철저하게 이성적이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다가 어떤 사건으로 인해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면, 전에 보였던 호감도만큼 격렬하게 그를 미워한다. ‘애증’은 동시에 공존하고, 모두 뇌 같은 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혜린 의장 편 소설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i]에서는 대형 인기 가수를 확보하고 있어, 예전과는 달리 위상이 더없이 높아진 기획사 사장, 그리고 이 기획사 사장을 예전과는 달리 마음대로 좌지우지 못해 약이 바짝 오른 연예 신문 부장과의 기싸움이 팽팽하다. 연일 부장은 가수를 비난하는 자극적인 기사를 마구 써대면서 기획사를 압박하지만, 기획사 사장은 미동조차 없다. 그러다 부하 기자, 주인공의 주선으로 어쩌다 화해의 목적으로 저녁 자리를 마련했지만, 서로 고개만 뻣뻣하게 세울 뿐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분위기는 폭발 일보 직전으로 가고 있다. 그러다 어쩌다가 고향 얘기가 나온다.
“김해?” 부장의 동공이 두 배쯤 커졌다.
“야! 나는 부산이다!”
“아, 그렇습니까!” 대표는 갑자기 받아쓰기 만점 받아온 초등학생 같은 표정을 지었다. 부장은 내 귀청이 찢어지도록 껄껄 웃었다.
“부장님, 이거 인연이네요. 혹시 초등학교는 어디 나왔습니까? 저 초등학교는 부산에서 나왔습니다.”
대표는 어느새 부산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내 개화 초등학교 아이가!” 부장 은박수를 한 번 탁 치더니,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이 새끼! 니 어디 있다가 지금 나타났니! 야! 걱정 마라! 니 가수 내가 다 키워 주는구먼!”
“이거 영광입니다. 형님만 믿겠습니다!” 두 사람은 벌떡 일어나더니 서로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는 황당한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여야 했다. 우리나라 가남 북통 일이 안 된 이유는 자명하다. 국민과 인민이 동기동창일 수가 없으니 말이다.
같은 고향에, 같은 학교 출신을 확인하는 순간 그렇게 밉고, 꺾고 싶었던 상대는 세상 더 없는 동지가 된다. 강렬하게 미웠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바뀐 긍정의 감정도 강렬할 수밖에 없다. 뇌의 같은 부분에서 신호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나와는 늘 적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같은 편이 됐다. 서로 싸우는 것보다는 친해지는 것이 훨씬 서로에게 이롭다. 그렇다면 이유가 뭐가 됐든 상관이 없다. 상대편에두자니 늘 껄끄럽고 불편했는데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훌륭한 구실이 만들어졌으니 이것으로 무조건 같은 편이 되는 거다! 이제 당신과 나는 언제가 한 배를 탄 동지! 출세를 향한 직장인의 비열한 처세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런 행동은 일부 편향된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기와 비슷한 취향과 색깔의 사람을 원한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위의 대화가 나와는 동떨어진 사람들의 대화라고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나는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욱, 집요하게, 대 놓고 저럴 수 있다.
‘그 사람은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해.’ 보다는 ‘ 그 사람은 확실히 뚜렷한 데가 있어.’ 란 말이나 ‘그 사람은 뭐가 됐든 분명해.’ 가 확실히 느낌이 강하고 후자의 사람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우리 모두가 나도 모르게 언제나 ‘내 편’이냐 ‘네 편’이냐를 구분 짓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든, 어떤 상황이든, 남자든 여자든, 가족이든 이웃이든,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친구가 됐든 동기가 됐든, 무엇에 대해 은밀하고 조용하게 ‘나의 입장은 이것입니다.’를 밝히는 것이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에 이롭다. 그보다 더 좋은 건 무조건 ‘나는 당신 편이에요.’를 확실하게 반복해서 심어주는 것이 더더욱 나에게 이롭다.
[i] ‘사랑과 미움은 한 끗 차이’ 뇌 과학이 증명. 코미디 닷컴. 2008.10.29 정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