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석현 Jul 06. 2017

명분이 없다 아닙니까 명분이

보이는 걸 믿는 게 아니라 믿는 것만 보는 인간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꼽히는 씬 중 하나. 

최익현(최민식)이 최형배(하정우)와 나이트클럽 이권을 김판호(조진웅)로부터 빼앗기 위해 계획을 짜고 있다. 최익현은 김판호가 생각보다 거물이어서 조카인 최형배가 부담스러워할 것이 걱정이다. 역시 같은 지역 건달인 최형배가 선뜻 행동에 나서기를 꺼린다. 

최익현: 큰 걸로 두 장. 2년 전에 자기가 산 가격으로 넘긴다 카드라니까. 내랑 금마랑 많이 친하거든~

최형배: 판호 금마가 우리 식구였습니다. 저랑 나이도 갑이고.. 근데 마.. 우찌 됐든 간에…… 이제 다른 식구긴 해도 한 솥밥 묵다가 분가한 놈이 봐주는 긴데.. 내가 나설 명분이 없다 아입니까......

최익현: 글나? 금마 들이그래 센 아들이 가? 니 몬 이기나?

최형배: 대부님. 그게 아니라 이명분이 없다 아닙니까 명분이...... 이 건달 세계에도 룰이란 게 있는데...... 주먹으로는 내가 백 번 이기지!

최익현: 형배야, 니캉 내캉 가족 아이가? 그것보다 더 큰 명분이 이 세상에 또 있나?

 결국도 사람은 어설픈 명분을 만들어 기어이 나이트클럽을 빼앗는다. 그리고 결국엔 두 사람

은 명분이 아닌 돈 때문에 배신을 하고.. 유독 재미있고 인상 깊은 장면이 많은 이 영화에서 굳이 

이 대사를 꼽는 이유는 바로 ‘명분’이라는 낱말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거창하게 명분까지는 아

니더라도, 나의 불합리한 행동을 정당화시킬 납득할만한 이유만 있다면 사람은 얼마든지 불합리

와 불이익을 기꺼이 감수할 자세가 돼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얼마든지. 이른바 사람들이 겪는 여

러 심리 현상 중 ‘인지부조화 이론’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 이상의 반대되는 믿음, 생각, 가치를 동시에 지닐 때 또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과 반대되는 새로운 정보를 접했을 때 개인이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나 불편한 경험 등을 말한다. [i] 좀어렵긴 하지만, 어찌 됐든 자신의 바람이나 믿음에 대해 대치되는 정보, 신념,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무지하게 불편하다. 이런 상황이 되면 사람은 이런 불일치를 극복하려 하기보다는 불일치를 줄이거나 증가시키는 행동을 한다. 대부분은 회피나 체념, 합리화의 방법을 택한다. 그리고서 불일치를 극복했다고 스스로 믿는다.

위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형배는 어릴 적 같이 행동했던 김판호와의 우정 때문에 쉽게 배신을 

하기 어렵다. 하지만 자신의 조직과 새로운 이익을 위해서는 배신을 해야만 하는 ‘인지부조화’를 겪는다. 이런 인지부조화에서 일어나는 내적 갈등을 이겨내기 위해 최익현과 최형배가 선택한 방법은 ‘명분’ 즉 ‘합리화’라는 카드를 꺼내고 결국 성공한다.

‘인지부조화 이론’을 제시한 레온 페스팅거(LeonFestinger) 교수의 노동자 실험이라는 것이 있

는데, 이 실험의 결과가 아주 흥미롭다. 

레온 페스팅거는 학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눈 뒤, A, B그룹에게. 못 쓰는 필름을 상자에 담아서 

버리는 일을 시켰다. 그저 담고 버리면 된다. 1시간 동안 이 일을 하면서 학생들은 재미도 없고 보람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 다음, A그룹 학생들에게는 20달러의 보수를 주고,, B그룹의 학생들에게는 턱 없이 낮은 1달러의 돈을 주었다. 그러고 나서, 똑같은 일을 하려고 대기하는 학생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일이 재미있다.’는 말을 해주도록 부탁했다. 

자, 그럼 A, B 그룹 학생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20달러를 받은 학생들보다는 고작 1달러를 받은 

학생들의 불만이 폭발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이 1달러짜리 일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다니. ‘무조건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리라.’ 다짐했을 가능성이 높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1 달러 받는 것도

속상한데 ‘재미있다’고 거짓말까지 해야 한다면, 그 속이 편할 리가 없다.

 레온 페스팅거 교수는 두 그룹 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설문 조사를 했다. ‘그 작업이 어땠나요?’ 

20달러를 받은 A그룹은 “별로였어요.”라는 대답이, B 그룹은 “재미있었어요.”라고 대답한 학생들

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왔다. 결과적으로 단순작업에 다가 돈도 적게 받아서 마음도 불쾌한데 재미

있다는 엉뚱한 대답을 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했을까? 결과에 대하여 페스팅

거 교수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20달러를 받은 사람들은 20달러를 받았기에 나는 거짓말을 한 

것이라는 자기 합리화가 가능해서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정확하게 드러냈지만, 1달러를 받은 사람

들은 '고작 1달러 때문에 거짓말을 한 자신을 인정할 수 없어서' 자신의 속마음을 스스로 속였다

는 것이다. 20달러짜리 거짓말은 괜찮다. 하지만 1달러짜리 거짓말은 못하겠다. 차라리 ‘재미 있었

다.’고 치자. 그럼 덜 불편하잖아. 

이혜린의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에서도 인간의 어색한 합리화는 여과 없이 드러난다. 치열

한 경쟁을 뚫고 입사한 연예부 기자. 영화 담당 기자를 꿈꿨지만 관심도 없는 연예부로 배정됐다. 

그래도 입사한 게 어디냐. 그런데 정식 기자가 아닌 월급 50만 원의 인턴 기자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다짐 한다. 

‘이 신문사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은 충분히 직감할 수 있다. 빨리 발 빼는 게 좋겠다. 오늘 조금

만 더 구경하고, 내일 당장 그만두는 게 좋겠다.’ 그러다 주인공 라희는 연예부에서 기자들에게 인

사 하는 장근석과 마주친다. 

‘나를 본다. 나와 눈이 마주친다. 내게 고개를 숙이며 눈웃음친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뭐, 조금은 더 다녀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나에 대한 회사의 대우에 대해서 몇 가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지만 그냥 지나가기로 한다…... 어차피 돈을 모으는 게 아니라 경험 쌓는 게 목

적인데, 월급쯤이야 아무려면 어떠냐는 생각도 들었다.’ 

 갈등과 원망과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하지만, 그것들을 잠재우는 합리화도 더 강력한 파도처럼 

밀려와서 모든 상황을 한 방에 잠재운다. 

그러나, 연예부 기자라는 것이 도저히 생리에 맞을 리가 없다. 매일 같은 10시 야근에, 끼니는 제

대로 못 채우고, 선배와 간부들의 등쌀, 매니저와의 배신, 갈등. 그리고 타사 기자들과 기사를 뺏

고, 가로채고, 빼앗기는 과도한 경쟁.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 하는 푸념이 책 곳곳에 보인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원비에 대학 등록금, 어학연수 비용까지 치면 내 교육에만 억대의 돈이 들어

다. 그런데 난 고작 첫 월급으로 50만 원을 벌었다. 나만큼 손해 보는 상품이 또 있을까. 막다른 골목이다. 다른 회사에 지원하기엔 이미 늦었다. 아직 철이 안 들었는진 몰라도, 작고 평범한 회사는 영 당기지가 않는다.’ 

 이쯤 되면,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그 회사에 남아 있을 구실이 있어야 한다. 다른 이도

아니고 나를 위로해 줄 나만의 합리화. 공교롭게도 바로 위 문장 다음에 이어진다. 

‘어쩌면 기자 일의 다이내믹함에 조금 반했는지도 모른다. 이 신문사를 다니면, 영화 쪽에서 수

많은 인맥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내 앞날에 도움이 될 사람들이다. 연예매체 영화

담당기자가 차선책이다. 조금 돌아간다 해도 난 아직 젊으니까, 괜찮을 거다.’

결국 라희는 책 말미에 연예부 기자의 길을 청산한다.  ‘범죄와의 전쟁’에서의 명분이나, 이 책에서 라희가 생각하는 명분이나 뭐 별 다른 것이 있을까?  다 똑같은 어설픈 합리화일 뿐이다. 이런 인간의 심리를 레온 페스팅거 교수는 야멸차게 지적한다. ‘이것은 인간이 합리성 및 이성과 동떨어진 것을 활용하여 자기 합리화를 하는 기제로 사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건 몰라도 인지부조화가 수시로, 24시간 계속 일어나는 곳이 바로 TV홈쇼핑이다. 홈쇼핑이 재미있다는 게 바로 이 얘기다. 갈등을 막장 드라마 못지않게 아주 드라마틱하게 생산해 내기 때문에. 그래서 유능한 쇼호스트들이 이 인지 부조화에 이은 합리화를 자주 응용해서 시청자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다.  

“가전제품은요, 무조건 새 걸 사야 합니다. 왜? 보다 나은 신기술이 들어 있잖아요. 지금 쓰고 있는 매트 보면 좀 불안하지 않으세요? 잠을 푹 잘 수 있을까? 전기 선은 건강에 괜찮을까? 아이들이 저걸 깔고자는데 정말 안전할까? 이런 생각이 들면 그 날 잠자기는 다 틀린 거예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고 더 신선한 기술이 들어간 신제품 사시는 겁니다. 게다가 오늘 세일인데, 이 정도면 돈 쓰는 게 아니라 돈 벌어 가시는 거 아니겠어요?”

“피부가 푸석해지고 뭐가 자꾸 나고, 화장실 가기도 힘들고.. 몸은 무겁고.. 먹은 것도 없는데 살이 찌고..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성격도 날카로워지고 사나워집니다. 작은 일에 집착하게 되고요. 매일매일 그렇게 거꾸로 사시겠어요? 꺼져가는 내 몸을 살리는 일. 지금부터라도 하셔야죠. 살아난다의 날 생(生) 자 생식입니다.”


      

[i] 위키백과


매거진의 이전글 눈으로 말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