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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바벨 Oct 18. 2023

엄마 키우기

잠든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이겨내라, 제발 이겨내라.' 생각했다

엄마의 건강이 좋아졌다.

엄마는 본인을 살리므로 나에게 선물을 준 셈이 됐다. 태어나 받아 본 선물 중 가장 큰 선물이었다.


살뜰하게 나를 돌보아준 엄마에게 나는 쌀쌀맞은 아들이다. 좋게 말하면 쿨한 거지만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에서는 이걸 쌀쌀맞다고도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래도 뙤약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여름에는 쿨한 게 도움이 된다. 남들보다 일찍 나는 나의 삶이 있고 엄마는 엄마의 삶이 있는 거라 생각했다. 때문에 인간 된 도리와 사람으로서의 존중 이외에 부모 자식 간의 애착이라 느껴질 만한 것들을 조금 경계했다. 나는 그것들이 엄마를 슬프게 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없다.


엄마의 카톡 답변이 평소와 다르게 오타가 많아서 이상하다고 느낀 어느 날, 아니 그러고도 며칠이 지난 뒤에 집에 들렀을 때 엄마는 정말 이상해져 있었다. 내가 들어와도 인사를 하지 않고 초점을 잃은 눈으로 허공만 응시했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키위를 된장으로 착각하고, 휴지도 없이 코를 풀고, 자신이 이야기한 걸 기억하지 못했다. TV 소리를 꺼둔 채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고만 하고, 리모컨을 바로 앞에 가져다 놓아도 못 알아챘다. 화장실 문을 열고 볼일을 본 뒤에는 물도 내리지 않았다. 나는 엄마가 갑자기 치매에 걸린 거라고 생각했다.


급하게 택시를 불러 은평구에서 유명한 종합병원으로 엄마를 데리고 갔다. 택시 안에서도 병원에서도 엄마는 아무 말이 없었다.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 엄마가 식사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뭐 먹고 싶은 거 없냐고 물어보자 엄마는 그제야 "연어."라고 말을 했다. 집을 나선 이후로 처음 듣는 엄마의 목소리였다. 우리는 손을 꼭 잡은 채 식당으로 향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음식을 자주 흘렸지만 연어 회를 먹으며 "맛있어."라고 한 번 더 말한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작게나마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물론 평소라면 나도 좀 먹으라고 젓가락으로 연어를 집어 내 그릇에 놓아주었을 엄마였을 테지만 말이다. 엄마는 혼자만 맛있게 먹었다.


다행히 엄마의 뇌에는 이상이 없었다. 의사 선생님은 엄마가 치매는 아니고 섬망 증상이 의심된다고 말씀하셨다. 일단 입원하고 내일 내과 전문의 선생님이 출근하면 그때 같이 보자셨다. 염증 수치는 17, 혈당은 350이 나왔다. 나는 얼른 내일이 오길 바라며 엄마의 손을 잡았다가, 엄마의 실수에 대처했다가, 엄마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았다. 긴긴밤이었다.


다음 날에도 엄마의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신경과 전문의 선생님과 내과 전문의 선생님이 함께 엄마를 살펴보았지만 증상이 완화될 거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이대로 영영 내가 알던 엄마의 모습이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싶은 생각에 겁이 났다. 나는 조심스럽게 신경과 전문의 선생님을 찾아가 더 큰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면 어떨지 여쭤보았다. 선생님은 지금으로서는 원인을 단정할 수 없으니 그렇게 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그러고는 가톨릭대학교 은평성모병원이 그나마 빨리 진료를 받아볼 수 있을 거라고 조언해 주셨다.


나는 곧장 소견서와 검사 결과가 적힌 서류들을 챙겨 은평성모병원으로 엄마를 데리고 갔다. 빌어먹을 코로나 때문에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엄마는 어제저녁 이후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여차저차 접수를 끝내고 진료과의 로비로 들어가자 간호사 선생님이 내게 다가와 엄마가 어디가 아픈지 물어보셨다. 그저 안내를 위한 의례적인 물음이었을 뿐인데 나는 엄마가 어디가 아픈지 생각하다가,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시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울음이 터졌다. 눈물이 아니라 그야말로 울음이었다.


내가 아는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 조절을 잘하는 침착한 사람이라 자부했는데 도저히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믿음과 불안, 희망과 좌절 사이를 오가던 내 마음을 티 내지 않기 위해 작동 중이던 평정심이 고장난 것 같았다. 그런 내게 간호사 선생님은 여기 있는 의사 선생님들이 최고라며 여기서 못 고치면 대한민국 어디서도 못 고치는 병이라고, 어머니 괜찮아지실 거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안심이 됐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들어가게 된 진료실에서 의사 선생님이 엄마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엄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도,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엄마가 대답을 했다. "아들."

나쁜 대답이었다. 엄마는 자신의 이름을 먼저 말했어야 했다. 나는 엄마의 대답이 속상했다.


이후 몇 가지 검사를 추가로 받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의사 선생님은 현재 입원할 수 있는 자리가 없고 이런 증상에는 익숙한 공간이 도움이 될 수 있으니 집에서 엄마를 돌보길 권유하셨다. 그렇게 집으로 엄마를 데리고 오자 내게 일어난 이 일이 현실이라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잠든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이겨내라, 제발 이겨내라.' 생각했다. 그러고는 기도했다. 나는 무교이지만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이렇게 엄마를 데려가는 건 아니지 않냐고 신을 찾았다. 기도의 끝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속으로 '아멘, 할렐루야, 나무아미타불, 나마스테.' 내가 아는 기도에 쓰일 법한 모든 말들을 떠올렸다. 종교 대통합이었다.


나는 며칠을 엄마의 식단과 혈당을 관리하면서 마치 아이의 말문을 틔우려는 부모처럼 다가가 아무거나 물어봤다. 평소라면 꺼내지도 않았을 시답잖은 말을 건네고, 낯부끄러워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도 했다. 그렇게 3일 정도 지났을까. 엄마가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울기 시작했다. 자신이 왜 이런지 모르겠다며, 바보가 된 것 같다고 울었다. 나는 괜찮다며 엄마를 다독여줬다. 엄마는 5분 정도 더 울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자고 일어날 때마다 엄마는 조금씩 내가 원래 알고 있던 엄마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지 딱 일주일이 됐을 때 드디어 엄마는 평소와 다름없어 보이게 되었다. 엄마는 내가 겪은 조마조마했던 며칠간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그간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주었다. 내 이야기를 곰곰이 듣던 엄마는 그제야 뭔가 깨달았다는 듯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는 나와 어딘가로 걸어가는 꿈을 꿨다고 한다. 내가 손을 계속 잡고 걸어서 그냥 나를 따라다녔는데 어느 순간 문득 자신이 죽었고, 그래서 아들이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 주는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하얗고 큰 공간에 들어와 있는 게 꼭 천국으로 가는 길 같았단다. 그런데 그 공간에서 이상하다고 생각한 게 하나 있었다고 한다. '어, 난 불교인데 왜 성모마리아상이 내 앞에 있지.'라고 생각했단다.


나는 가톨릭대학교 은평성모병원 로비에 있던 성모마리아상을 떠올리며 웃음 지었다.


이윽고 엄마의 몸 상태를 자세히 알게 되었다.

과거에 몇 차례 엄마를 응급실에 실려가게 만든 범인의 척추 넘버는 1번, 5번이었다. 4번도 죄질이 좋지 않았다. 당뇨는 말할 것도 없었고 이명과 녹내장이 있었으며 폐에는 작은 구멍 같은 게 보여 주기적으로 관찰이 필요했다. 근육도 부족해 계단 오르는 걸 힘들어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해 보였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리하여 엄마가 최소한 일상이라도 제대로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1년 정도의 내 인생을 엄마를 위해 사용하기로 했다.


효자는, 모르겠다. 내가 효자 코스프레라도 하다가 훗날 보상 심리가 생기지 않을 거라는 장담도 할 수 없으니 나는 효자가 되기는 싫다. 오히려 후자에 가깝다.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엄마는 나에게 투자하였으니 최소한 원금이라도 보장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에 비하면 1년은 충분히 남는 장사다. 1년 뒤에도 원금이 남아있다면 일단 급한 불은 껐으니 매달 이자만 납부하고 원금은 나중에 한꺼번에 준다고 우기면 된다. 기분이다. 인플레이션을 고려해 당시 금액을 지금의 가치로 환산해 갚아주자.


엄마 역시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거라고 생각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의지를 다졌다. 나와 함께 매일 헬스장에 나가 운동을 했고 식단과 혈당 관리를 철저히 했다. 그렇게 100일 정도 지났을 때 엄마는 내가 참견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돌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엄마를 보면 기분이 좋아 종종 엄마의 삶에 지분이라도 가진 사람 마냥 깐족대며 지분거렸다.


그 일로부터 2년이 흐른 지금 엄마는 15kg 넘게 증량을 했다.

근육이 붙고 몸이 건강해지니 자신감도 생긴듯하다.

사용하는 언어도 나를 닮아가는 건지 조금 쿨해졌는데 가끔은 좀 귀여워 보이기도 한다.


엄마 덕분에 나도 건강해졌다.

체지방은 10%를 찍었고, 러닝머신 위에서 1시간을 달려도 거뜬하다.


헬스를 다니기 시작한 초반 무렵에 한 번은 엄마가 옆자리에서 러닝머신을 켜지 못하고 있던 또래 여성분한테 작동법을 설명해주다 넘어진 일이 있었다. 걷는 정도의 속도였는데 다리에 힘이 없으니 균형을 잡지 못하고 하찮게 넘어진 것이다.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을 왜 도와주려 애쓰는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엄마였다. 자신의 실속은 챙기지 못하고 주변 사람을 챙기는 모습이 참 엄마답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가가 엄마를 일으켜줬다.


나는 좀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엄마의 다정함이 생존에 별로 좋은 능력이 아니라고 자주 생각했었다. 그런 건 자본주의의 한국에서 살아감에 있어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거라 여길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그 수혜를 입고 자란 나는 이제 알고 있다.


삶에 큰일이 생길 때면 나는 내가 강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엄마가 물려준 강함이었다.


누구보다 강한 생명력으로 자신과 자신의 사람을 오래도록 지켜낸 이 사람의 남은 삶이 평안하길 나 또한 오래도록 바랄 것이다.


무사히 걸음마를 떼고 3살이 된 엄마는 오늘도 헬스장으로 향한다.


P.S. 고금리 시대다. 몸도 마음도 어느 때보다 건강한 엄마에게 금리인하요구권을 한번 신청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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