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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바벨 Oct 24. 2021

반지하 가족

나는 운이 좋았다.

기억이 존재하기 시작한 5살 즈음의 유년 시절부터 21살 군대 전역 후 집을 얻어 독립하기까지 내가 이사를 겪은 횟수는 총 9회이다. 고모네, 외삼촌네, 엄마가 일하던 식당 건물 옥탑방에서 신세 진 것까지 포함하면 모두 열두 번의 이사를 한 셈이다. 그리고 얹혀산 세 곳을 제외한 아홉 곳의 집 중 일곱 곳이 반지하였으며 월세였다. 이것으로 내 어릴 적 가족의 재정 상황은 충분히 설명되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의 부모님은 돈 문제로 다툼이 잦았다. 택시 기사였던 아버지는 퇴근 후 술을 마시지 않고 들어오는 날이 드물었고, 술을 마신 날은 엄마에게 돈을 주지 못했다. 돈을 주는 날은 엄마와 아버지의 사이가 좋은 날이었다. 나는 IMF 키즈였으므로, 그 시절 많은 부모들처럼 나의 부모님 또한 오래도록 신용불량자 신분으로 살아갔다. 사실 IMF 탓이라기보다는 'I, Mother, Father.' 세 사람의 문제로 보는 게 더 적절했을 것이다. IMF를 맞이하며 아버지는 가족 중 가장 먼저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이윽고 엄마의 명의로 신용카드를 만들어 쓰면서 엄마까지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때문에 우리 집 물건들에 소위 '빨간딱지'가 붙어 친구들을 초대하기 부끄럽게 여긴 나였지만, 세월과 함께 생각이 자라고 숱한 이사에 빨간딱지가 훼손되거나 떨어져 나가면서 스스럼없이 친구들을 데려올 수 있었다.


처음엔 우리도 2층 전셋집에서 살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엄마가 나를 뱃속에 품었을 때 횡단보도를 건너다 뺑소니 사고를 당했다. 병원에서는 나도 위험하고 엄마도 위험한 상황이라 두 사람 중 한 명은 못 살릴 것 같다고 말했지만 천만다행으로 두 사람 모두 살 수 있었다. 기적적이기까지 했던 상황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이후에 범인이 잡혀 거액의 합의금을 지급받았고 엄마는 아버지에게 그 돈으로 경기도 화정에 땅을 사두자고 했으나 아버지는 그 돈으로 경마를 했다. 내가 백말띠로 태어났기 때문인지 아버지는 경마를 좋아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말을 고르는 솜씨는 없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말실수와 더불어 여러 실수를 저질렀고 그렇게 우리 집은 전세에서 월세로, 2층에서 1층으로, 1층에서 지하로 내려만 갔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살았던 집은 완지하였다. 나머지 집들은 그래도 반지하라고는 불렸는데 그곳은 도저히 반지하로 불릴 수 없는 완전한 지하였다. 보통의 반지하 계단 수보다 세배 정도 더 되는 계단을 내려가야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버지는 항상 가족들에게 계단을 조심하라고 이야기했으면서 정작 본인이 술을 드시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이가 깨졌다. 그때 나는 차라리 그 정도만 다친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겨울이면 가족 모두 한 번씩은 계단에서 미끄러져 상처를 입었고, 여름이면 집 밖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에 구더기가 들끓었다. 그리고 그 구더기를 처리하는 것은 엄마의 몫이었다. 나는 그저 '으'하는 소리와 함께 엄마를 응원하며 서울에 재래식 화장실을 쓰는 집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했다.


그해 겨울에 아버지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내게 야구 방망이를 사다 주었는데, 엄마는 빚쟁이가 쳐들어올까 봐 산 거면서 내 선물이라 말하지 말라고 아버지를 나무랐다. 나는 축구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 방망이는 한 번도 들고나가지 않았다. 어차피 글로브도 없었다.


엄마와 아버지는 유독 그 집에 살 때 많이 싸웠다. 어른들이 싸우는 걸 애써 숨겨도 아이들은 항상 그들의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는 것 같다. 당최 그런 능력이 어떻게 계발되는 건지, 나는 대화를 듣지 않아도 집에서 느껴지는 공기의 밀도나 부모의 눈빛 같은 것들을 통해서 그들의 사이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싸움은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집에 있을 때에도 집 안 이곳저곳을 뒤적이며 자주 무언가를 찾았는데, 그러고 있는 아버지에게 "아빠 뭐 해?"라고 내가 물어보면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게 아무 일도 아니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중 몇 번은 나에게 네 엄마가 돈 보관해둔 곳을 아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나는 엄마의 비상금이 대충 어디쯤 보관되어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걸 찾아냈고, 그런 날엔 엄마와 아버지가 경찰이 충돌할 만큼 시끄럽게 싸웠다. 싸울 때면 논리적으로 따졌던 엄마에 비해 아버지는 소리를 지르거나 난폭한 행동을 했으므로 나는 언제나 아버지가 잘못한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도 우리 집에는 문제가 끊이지 않았지만 그와 별개로 나의 학창 시절은 평탄했다. 그 사이 부모님은 두어 번 정도 이혼을 시도했는데 어쩐 일인지 헤어지지 않고 계속 같이 살았다. 나는 중학생이 된 즈음부터 더 이상 부모님이 같이 살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이혼을 해도 각자 잘 살 수 있다면 권유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여 나는 이혼의 여부와 관계없이 그저 부모가 건강한 사고로 성실한 삶을 꾸려가는 모습을 자식에게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설사 주변에서 결손가정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그 탓에 버거운 학창 시절을 보내더라도 그런 부모를 보고 자란 아이는 최소한 자신의 부모가 주변에서 규정하는 것처럼 불행하거나 피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감각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럼 그 아이는 꼭 당장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와 개인의 가치를 구분하여 추구할 수 있는 유연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을 거라 나는 생각한다.


나는 운이 좋았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살고 있던 그 당시 은평구에는 브랜드 아파트라 할 것이 없어서 친구들이 서로 아파트 비교를 하며 계급을 나눈다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 동네에 이마트가 생겼고, 반 애들은 이마트 지하 1층에 가면 음식을 공짜로 먹을 수 있다며 서로 알려줄 뿐이었다. 나와 친구들은 동네를 목적 없이 돌아다니다가 이마트 시식코너를 돌며 배를 채웠고, 입가심으로는 자판기 우유를 뽑아 마셨다. 거진 그러고 놀았기에 거지라며 놀리는 애들도 없었다. 그런 애들은 선생님들이 혼쭐을 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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