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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바벨 Oct 04. 2021

저가 커피 전문가

그는 기대에 부응할 줄 아는 준비된 인재였다.

내 친구 P는 우리 동네 저가 커피 전문가다.

그가 커피를 선택하는 기준은 경제적이고 명료하다.


우선, 그는 커피란 자고로 싸고 양이 많아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2000원이 넘어가는 커피는 취급하지 않으며, 그 이상의 커피는 남이 사줄 때나 기프티콘이 생겼을 때만 마실 수 있는 특별한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섬세한 입맛을 가진(척을 하는) 그는 빽다방과 메가커피도 지점마다 맛이 달라 어느 지점으로 갈까 고민을 한다고 한다. 요즘엔 메가커피 신응암시장점을 가장 선호한다는데, 이유를 물어보니 집에서 가까워서란다. 묘하게 앞뒤 맥락이 다른 대답을 한 그는 이어 자신의 커피 본고장인 을지로 입구 지하상가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을지로 입구 지하상가의 대표적 저가 커피 전문점은 rb커피, 모노치즈, 아리스타가 있으며 가격은 1500원 대로 비슷하지만 그는 모노치즈를 가장 자주 간다고 했다. 그 요인으로 열다섯 번 마시면 한 잔 무료로 주는 쿠폰 제도를 꼽았다. 맛이 어떠냐는 질문에는 '고소하니 딱 좋다'라는 저가 커피 전문가다운 평도 해주었다. 아리스타는 한시적 할인으로 1500원에 제공되는 점임을 참고해달라는 세심함도 엿보였다.


그에게 을지로 입구 지하상가는 단순히 직장으로 향하는 길목이 아니라 커피의 고장이자 핫플레이스였다. '을지로가 핫한 건 알고 있냐, 힙지로라는 말 들어봤냐'라고 자랑하듯 말하는 그에게 내가 거기가 힙지로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줘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그저 그가 데이트할 때만큼은 제발 그곳을 가지 않길 염원할 뿐이었다.


'페이스북에 마크 저커버그가 있다면 응암동에는 마크 저커전(저가 커피 전문가)이 있다.'라고 말하는 그의 자부심은 기본적으로 해박한 지식에서 비롯됐다. 그는 저가 커피에 한해서는 눈 감고 마셔도 어디 커피인지 알아맞힌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는데, 내 생각에는 보리차를 조금만 진하게 우려 가져다줘도 베트남 로부스타와 헷갈려 할 것 같다. 이렇듯 남다른 그의 커피 세계는 우리가 스물다섯 살에 함께 일했던, 대기업 사원들의 복지를 위해 운영하는 사내카페에서 태동되었다.


"아니! 초코는 검은색, 캐러멜은 갈색이라니까?"

그는 초코 소스와 캐러멜 소스를 구분 못해 음료를 잘못 만들기 일쑤였다. 카페 일을 처음 해보는 그는 바보 같았다. 원래도 바보인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곳에선 더 뿌리 깊은 바보 같아 보였다. 손님이 구매한 병음료를 마음대로 개봉해 굳이 빨대를 꽂아주는 몹쓸 친절함도 돋보였다. (자신이 어렸을 때 자주 가던 슈퍼의 할아버지는 바나나맛 우유를 사면 말없이 빨대를 꽂아줬다며 변명을 했다.)


그는 계산도 느린 탓에 손님의 거스름돈을 곧바로 주지 못하고 음료가 나갈 때 함께 돌려주곤 했다. 또 그가 만든 딸기 바나나 주스에서는 토마토 주스의 맛이 났고, 손님을 부르는 그의 목에서는 삑사리가 자주 났다. 재고 관리를 선입선출법으로 하라고 알려주던 중에는 그가 내 이름인 '선욱'에서 따와 만들어 '선욱선출법'인 거냐고 물어봤다. 마치 자신의 이름을 딴 기술을 만든 기계체조 금메달리스트 '양학선' 선수처럼 말이다. 그때 그는 정말로 진지한 표정이었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그랬다. 그의 뇌는 인식의 장벽이 없는 편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봐온 그는 시트콤에나 나올 법한 캐릭터를 한결같이 고수해왔다. 나는 때론 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사람들을 웃기는 재주를 타고난 그가 부럽기도 했다. 그렇다고 닮고 싶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의 기행에 놀라던 카페 직원들도 어느샌가 오늘은 그가 과연 어떤 신기한 행동을 보여줄까 기대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그는 기대에 부응할 줄 아는 준비된 인재였다. 카페 직원들과 나는 드디어 이 정신없고 건조한 일터에서 일하는 우리를 구해줄 진짜가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희왕이었다. 아니, 타마코였다. 카페를 망치러 온 우리의 구원자식이었다. 실수야 어찌 됐건 하루에 1000잔가량을 판매하던 사내카페에서 웃음은 그 무엇보다 소중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즐겁게 일하기 위해 그를 카페에 데리고 들어온 것인데 '직원이 행복해야 손님도 행복하다'라는 명제를 증명해내듯 사내카페는 우리가 있을 때 오픈 이래 최고 매출을 달성하기도 했다. 그리고 숱한 타박에도 굴하지 않던 그는 그곳에서 온갖 영광과 민폐와 웃음을 담당하는 바리스타로 3년 가까이 일하며 가장 오래 일한 직원이 되었고, 서서히 저가 커피 전문가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P.S.  사원들의 복지를 위해 1200원에 아메리카노를 제공하던 까닭에 회사원 아저씨들은 커피를 물처럼 마셔댔는데, 맛으로 마신다기보다는 살려고 마시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 카페 이름을 '살마커피(살려고 마시는 커피)'로 짓는다면 또 하나의 유니콘 기업이 탄생할지도 모르겠다. 무신사도 '무진장 신발 사진 많은 곳'이라는 뜻이며 당근마켓도 '당신 근처의 마켓'이 아니던가.




*해당 글의 공개 여부에 관하여 당사자인 P에게 스타벅스 커피를 사주며 동의받았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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