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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바벨 Jun 19. 2019

한샘 바스 엔지니어

그리고 싸움에서 이긴 건 역시 목소리가 큰 녀석이었다.

사주를 봐줬던 아줌마의 말마따나 역마살이 낀 것인지 나의 20대 시절은 연관성을 지을 수 없는 온갖 직업군을 널뛰기하듯 무분별하게 겪어냈고, 그중 한샘에서 바스 엔지니어(Bath engineer)로 일했던 경험은 나에겐 질병에 가까웠다.


내가 이 일을 직업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을 조금 부정하고 싶었고, 밥 먹듯이 날 말아먹으려는 사람들에게 먹히지 않으려 많이 분노하거나 타협해야 했으며, 우울감이 밀려올 즘엔 아직 현실 어딘가에 '퇴근'이라는 단어가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간신히 수용함으로써 안도감을 되찾았다.


한샘에서 일하는 하루하루가 내 윤리의식과 직업정신의 테스트 날이었다.


65만큼 치열하고 35만큼 여유로웠던 제주살이를 끝낸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 일자리를 구하고 있었다. 올라온 거리만큼 돈독도 잔뜩 올라 있었는데, 정말로 돈만 많이 준다면 가족 빼고 뭐든 다 갖다 팔아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제주살이는 계획을 이탈한 실패를 이루어냈고, 음악한다는 놈이 음악으로 돈을 벌 재주가 없었으며, 내 스펙으로 다시 취직을 한들 월 300만 원 이상 주는 직장은 못 구할 터였다. '300만 원을 준대도 400 아니 500만 원 만큼 일해야겠지. 미친. 어차피 그럴 거면 500만 원 주는 일을 구하고 1000만 원 만큼 일하련다.' 이게 그 당시 나의 자본론이었다. 벌 수 있는 돈의 한도를 최대한 올리는 데 목적이 있었으므로 고생의 수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러한 탓에 몸 쓰는 일을 하자는 결론이 도출되었는데, 기술을 배울 수 있으면 더 좋았다. 후보 하나는 로켓같이 빠른 배송을 하는 일이었고, 나머지 하나가 '한샘 바스 엔지니어'였다. 두 일을 놓고 저울질하던 중 "잘 버시는 분들은 한 달에 천만 원도 벌어요."라는 한샘 인사 담당자의 한마디에 꽂혀 나는 곧장 한샘 일을 한다고 했다. 그 순간만큼은 직업에 대한 어떠한 편견이나 선입견,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에게 오롯이 천만 원만 존재할 뿐이었다. 아, 그리고 이름도 좀 있어 보였다.


'바스 엔지니어(Bath engineer)'



출근(부사수)


부사수(조수)로서의 첫날이었고, 내 사수된 사람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중간중간 심부름만 했다. 때문에 내가 힘든 점은 없었다. 그래서 더 막막했던 것 같다. 지금 저 사람이 하는 일이 훗날 나의 일이니까.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그는 화장실 장인이었다.

사수는 평균 6개월 정도의 부사수 기간을 거친 뒤 시험을 통과하면 나갈 자격이 생기는데, 그러면 나도 부사수를 들이고 사수로서 일을 해내야 하는 것이었다.


힘든 일이었다. 내가 아는 일중에 이것보다 더 힘든 일이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는 일은, 기존의 낡은 욕실을 뜯어내고 다시 새로 만든다. 근데 그걸 하루 만에 해내야 한다. 내가 친구들에게 이 얘기를 처음 했을 때 친구들은 "그게 가능해?"라고 질문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땅과 바다의 아주 깊은 곳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일단 그곳에 계속 있게 되면 그 일들은 더 이상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달과 태양이 뜨고 지는 것처럼 그냥 일어나는 일. 즉, 일상이 된다.


아침 7시
저녁 7시

하루에 가능한 일이지만, 하루에 끝내야 했으므로, 하루 종일 힘들어야 했다.

말이 좋아 '바스 엔지니어'지, 그냥 '욕실 기사, 화장실 기사'였다.

'어 맞네. 바스 엔지니어가 화장실 기사네.' 싶었더랬다.


채용 담당자에게 일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 왜 한샘이라는 브랜드의 욕실 시공을 하는데 개인사업자로 일을 해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니까 다르게 말하면 한샘에서 욕실 시공 기사를 직원으로 운영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부사수로 나간 첫날에 이유 하나를 알아차렸다.


'아, 이 일. 존나게 다치겠구나.'


사수 형의 차를 얻어 타고 함께 퇴근하던 길은 늘 많은 대화가 오갔다. 일에 대한 얘기를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하면 '힘들다. 돈 많이 번다. 다치지 말아라.'였다. 나는 사수 형이 한 달 급여로 천만 원을 찍는 역사적인 모습을 지켜봤고, 그건 나한테 어떤 힘듦도 견뎌내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행이었던 건 사수 형은 내 성향을 잘 파악한 것 같았다. 보통 이쪽 일은 소위 '곤조'가 심하다. 하나를 배우기 위해서 열 번의 쌍욕을 들어야 하는 게 보편적인 교육 방침이다. 그런데 나는 형에게 욕을 들어본 적이 없다. 욕을 할 필요가 없었거나, 아마 내가 욕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지 아는 사람 같아 보였다. 형은 일할 땐 프로페셔널했고 일이 끝나면 다정하고 재밌었다.


"다치지 말아라." 그날도 형은 나에게 말했다.


다치지 말걸. 나름 부사수 기간이 경과하며 일 좀 배웠다고 기술자가 된 기분이었다. 막막한 일이 만만한 일이 됐다. 누가 그랬었는데. 6.25 전쟁이 방심해서 일어난 거라고.


일이 끝나갈 무렵, 화물차 적재함에서 뛰어내리다 발이 걸려 그대로 땅바닥에 추락했다. 나는 머리가 부딪히는 걸 막기 위해 팔로 머리를 감쌌다. 팔이 잠깐 반대로 꺾였다 돌아오며 '빠각'하는 소리가 들렸고, 놀란 사수 형이 달려와 내 등짝을 마구 때렸다. 형이 때린 등과 팔이 동시에 아팠다. 나는 30분 정도를 더 일하다 팔이 보라색으로 물드는 걸 발견하고서야 'GG'를 치고 병원에 갔는데, 한 달을 내리 쉬게 되었다.


다친 날

한샘 형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노)가다꾼 스타일'이라는 표현이 있다. 거칠고 야생성이 강한 사람이 이쪽 일에 어울린다는 뜻으로 쓰는 말이다. 가다꾼 스타일의 형들 기준에서 나는 선비 같은 이미지였다. 그래서인지 그때 다들 내가 그만둘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부사수 10명 중에 8명 정도는 그만둔다'라는 이야기를 사수가 된 후에 들을 수 있었다.

힘들어서 그만두고, 겁나서 그만두고, 다쳐서 그만두고, 빡쳐서 그만둔다.


나는 애석하게도 힘든 건 돈이 보상해 줄 거라 생각했고, 겁보단 용기가 좀 더 많았고, 다친 건 존나 아팠지만 참았고, 빡친 건 내 그릇 탓이니까 그것도 참았다. 그리고 나는 원래부터 그런 환경에 꽤 익숙했다.


한 달 뒤,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다시 복귀했을 때부터 한샘 형들은 나를 또라이, 미친놈, 변태 등으로 불러주기 시작했다. 나는 그 말들이 이 바닥에서 누군가를 인정할 때 사용하는 호칭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또한 그 말들을 듣는 빈도가 잦아질수록 내가 사수로 나갈 날 또한 가까이 왔다는 걸 체감하고 있었다.



출근(사수)


"한솔아 출발해볼까? 고고!"

처음부터 나는 한솔이를 부사수로 데려올 생각이었다. 한솔이는 내가 예전에 다닌 직장에서 만난 사이였는데 그때는 한솔이가 내 선임이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한솔이한테 당했던 만큼 복수하려고 부사수로 데려왔다 농담했지만 사실 한솔이는 나를 한 번도 서운하게 한 적이 없었다.


나는 한솔이와 함께 일하면 더 자유로운 하루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사수가 된 한솔이는 처음 겪어보는 종류의 일이라 과거의 나처럼 얼빵했고, 나도 사수로서 처음이었으니 우리는 하루가 서투르고 빠듯했다.

그 탓인지 내 상상처럼 자유로울 순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처한 현실에 비해 즐거워했다.


바스 엔지니어는 힘들고(Difficult), 더럽고(Dirty), 위험한(Dangerous) 기준을 필요 이상으로 충족하는 직업이었다. 새벽 6시에 출발해서 다음날 새벽 2시에 퇴근하는 끝 간 데 없이 격렬한 업무 시간에도 우리는 웃음이 나왔다. (사실 우리가 담배를 조금만 덜 피우고 일의 이해도가 지금만큼 됐다면 저녁 7시 전에는 끝났을 것이다.) 더 웃음이 나는 사실은 잠깐 눈 붙이고 또 같은 일을 하러 가야 한다는 거였다. 그런 우리에게 레드불은 수액이자 스팀팩이었고, 구원자이자 저승사자였다. 더럽기는 또 어찌나 더럽던지. 내가 일하는 곳은 화장실이었다. 변기를 철거할 때면 미처 오수관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바닥에 걸려 있는 똥을 만지기도 했다.


"형..똥, 똥!" 한솔이가 말했다.

"또, 또, 뭐, 왜?" 내가 대답했다.

"아니, 똥!" 한솔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똥이 있었다.

"그러게, 똥이네. 치우자. 앞으로 자주 볼 거야." 나는 한솔이에게 똥을 발견했을 때 해야 할 일을 알려줬다.


부사수를 거쳐 사수로 올라온 내 기준에서 똥이나 피를 보는 건, 그날 일이 잘 풀린다는 좋은 징조였다. 이미 난 장갑을 끼고 똥 만지는 일은 대수롭지 않은 지경에 이르렀었고, 굳이 그러지는 않았지만 장갑이 없다면 맨손으로도 그냥 집어서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한샘 일을 2년 정도 더 했다면 나는 똥의 상태로 고객의 건강 상태까지 체크해주는 전방위적 욕실 시공 기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무렵 나는 친구들에게 별명이 하나 생겼는데, '똥쟁이'였다.

"야 어디야?" 친구 P가 나에게 전화로 물었다.

"어디긴 어디야. 일하고 있지." 내가 대답했다.

"아, 화장실이야? 맨날 화장실이냐. 똥쟁이야?" P가 말했다.


그랬다. 화장실이 내 직장이었다. 어디냐고 물어보면 나는 아침에도, 오후에도, 저녁에도 화장실이라고 대답했다. 오늘은 용인 화장실, 내일은 김포 화장실, 모레는 구리 화장실. '똥쟁이'와 '화장실 성애자' 둘 중 하나가 별명으로 불릴 위기였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나는 그나마 귀여운 '똥쟁이'를 선택했다.


친구들은 연관성 없이 널뛰기하는 내 직업군을 신기해했는데, 유독 한샘 일을 할 때 호기심이 폭발했다. 그 호기심은 내가 버는 돈 때문이기도 했다.

"야, 그거 존나 전문가가 하는 거 아니냐? 도대체 네가 그걸 어떻게 배웠어?" 친구들은 내게 아무렇지 않게 이런 말을 했다. 도대체가 도대체라니. 내가 부사수로 겪은 시간을 친구들은 잊어버린 듯 보였다.

그럼 나는 친구들에게 "존나 전문가는 도대체 무슨 전문가냐. 이런 개.."까지 욕을 꺼냈다가,

"이런 개..구쟁이들아. 그건 말이야. 그냥, 그냥 하는 거야."라고 대답하곤 했다.


정말이었다. 그냥 하는 거였다.

내 친구들은 어려운 일들이 아주 잘 짜인 틀 안에서 돌아간다고 여겼지만, 어떤 일은 틀을 벗어난지도 모르게 돌아가는 그런 일들도 있었다. 그건 대기업도, 대기업의 하청 업체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완료 전 현장
존나 전문가가 그냥 완료한 현장


운도 꽤 좋았다. 처음이 중요하다며 일을 챙겨준 사수 형 덕분에, 나는 사수 첫 월급으로 550만 원을 받았다.

지금껏 받아본 적 없는 액수의 월급이었다. 신입 사수치곤 많은 액수였고, 그런 탓인지 일을 잘한다는 평을 듣기 시작했다. 잦은 경우로 고객들에게 식사 대접도 받았고, 팁도 쏠쏠히 받았다.

화장실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매일 다른 곳에서 매번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나의 성향에도 잘 맞았다.


그런데도 나는 이 일을 평생 직업으로 삼게 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내가 꿈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일이 많아질수록 나는 삶이라는 게 참 피로하고 별거 없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러니까 이건 변덕이기도 했고 성찰이기도 했다. 사랑에 실패하고 꿈에 외면당한 사람에게 일과 놀이는 필수불가결했지만 의미 또한 금세 휘발돼 사라져버리곤 했다.


나의 꿈은 음악으로 성공하는 것이었다.

나는 정상에 오르고 싶어 했고 내 친구들은 정상적으로 살고 싶어 했다.

친구들은 대학을 자퇴하고 음악을 하는 내 모습에 ‘대단하다, 자유로워 보인다.’는 말을 자주 건넸는데, 그건 내가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났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청춘은 언제나 정상적이지 않았으며, 어떤 삶에든 위험성은 존재한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때문에 친구들의 꿈이 '학자금 대출 상환'이라던가 '정시 퇴근'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충분히 공감하지 못했다. 적어도 나는 꿈이라 할만한 것을 좇았기 때문에 후회 없는 인생을 살 거라 생각했다. 계속 노력한다면 자신감과 실력이 쌓일 줄 알았지만 언제부턴가 부채 의식과 불안함이 쌓여만 갔다. 친구들은 자기만의 평범한 꿈을 실현시키며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뒤처진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으며 때때로 낭만은 쓸모없고 볼품없어 보였다. 나의 꿈이 서서히 나의 현실을 좀먹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의 많은 민낯을 마주한 덕분에, 나는 사람들이 나의 쓸모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에도 일정한 체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사회적 규범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할뿐더러 때때로 폭력적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폭력성이 사실은 겁이라던가 질투, 과시 혹은 오만 같은 지질한 것에서부터 비롯된 거라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사람들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또, 나의 꿈은 사회가 요구하는 ‘직업’이라는 1차원적인 형태로 정의된 거라는 것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하물며 그 ‘직업’ 조차도 어린 시절의 내가 야트막하게 알고 있던 것들 중 선택한 것이었다. 세상과 나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때 더 다채로운 선택을 할 수가 있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가 여전한 건 단지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음악이어도 좋고 음악이 아니어도 좋다. 그러니까 꿈을 포기하지 못했다는 것은 여전히 내가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찌 됐건 나는 정상에 오르지 못한 티를 내고 싶진 않았기에 한샘 사람들에게 굳이 내 꿈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았고 그들은 나를 정상인으로 대해주었다.

한샘 일은 노력에 정비례하진 않았지만(버는 돈보다 훨씬 고생한다고 느꼈지만) 파이 자체가 컸기에 내가 벌어들이는 돈의 액수 또한 컸다. 그렇게 나는 사수를 나온 지 6개월 차에 월급으로 700만 원을 받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월급이 늘었다는 건 내가 그만큼 많은 고객을 만났다는 뜻이었으니 나도 특별한 고객을 만날 확률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진상 혹은 VIP


그 해 여름은 온갖 것들로 빼곡히 차 있던 나에게 소란스럽고 쨍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세상 모든 것들이 햇빛에 흐늘흐늘 녹아내릴 것 같았고, 덕분에 나와 한솔이 몸에 배어버린 남자 냄새는 계절 내내 빠져나가질 않았다. 한솔이는 지하철로 퇴근할 때면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사람들이 없는 쪽을 찾아 헤매 다녔다고 한다. 나의 화물차에서는 늘 담배 냄새가 났으므로 담배를 안 피울 수 없었다.


그날도 여느 날과 같이 한솔이를 차에 태우고, 담배를 함께 태우고, 모르는 사람의 집에 도착해 벨을 눌렀다.

"뭐야, 왜 이렇게 어린 사람들이 왔어? 나이 많은 사람들이 잘하는데, 전문가 맞아요?"

고객이 문을 열어주며 나랑 한솔이에게 인사 대신 한 말이었다.


"시끄럽고 냄새나니까 화장실 문 꼭 닫고요. 민원 들어오면 안 되니까 조용히 공사해요."

일 시작 전, 고객의 요청사항이었다. 만나자마자 까칠한 고객의 말투 때문에 하마터면 나는 '고객님, 그런데 조용히 공사하는 건 어떻게 하는 건가요?'라고 물어볼 뻔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조용히 공사하는 법에 대해서 배워본 적이 없었다.


참 많은 요청을 하는 고객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말들인데도 기분 나쁘게 들리도록 하는 재주가 있어 보였다.

"제발 조용히 공사할 수 없어요? 선전에는 엄청 간단하게 공사하는 것 같이 나오더만 왜 이렇게 시끄러워?"

"끝나고 청소도 다 해주고 가는 거죠? 먼지 조금이라도 있으면 가만 안 둬."

"아니, 별로 어려워 보이지도 않는데 좀 더 빨리 끝낼 수 없어요?" 이때가 오후 4시였다.


그 고객은 우리가 찜통더위 속에서 화장실 문을 닫고 하루 종일 일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볼 가치조차 없다는 듯 행동했다. 본인이 지불한 금액에 본인 행동의 당위성마저 포함되어 있다고 믿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매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고객의 성향을 알아채는 촉도 나름 함께 발전했는데, 저 정도의 언행이면 최소 '데프콘 2'에 해당되는 준전시 상황이었다. 우리는 물 마실 시간도 아껴 빨리 이 전쟁 같은 현장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렇게 시간과 감정을 최대한으로 아껴 화장실을 만들어냈다. 알고 보니 바스 엔지니어는 '아끼면 똥 된다'라는 말을 현실에 구체화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그날 우리가 어떤 분위기였냐면, 내가 속으로 '시발, 시발'거리다가 실수로 한솔이를 '야, 시발아'라고 부르면 한솔이가 얼떨결에 '아 왜, 시발'하고 대답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직도 한솔이에게 고마운 건, 그해 여름 존나 더운 더위 속에서 내 길을 묵묵히 같이 걸어준 거, 나와 개그 배틀을 붙어준 거, 나에게 욕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거다. 물론 나도 한솔이에게 욕을 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었다.



고객들은 비슷한 수준의 돈을 지출했지만 비슷한 형편은 아니었기에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누군가에게는 무척 큰돈이었고, 누군가에게는 그냥 돈이었다.

또, 고객들은 비슷한 인성은 아니었기에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누군가는 나를 귀한 사람으로 대했고, 누군가는 돈이 너무 귀해 내가 사람이라는 걸 잠시 잊은 듯했다.

나 역시 돈독이 올랐었기에 돈을 귀하게 여기던 고객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당시 한샘은 '책임 시공제'라는 시스템을 운영했다. 시공한 현장의 A/S까지 직접 책임져야 한다는 소리였다. 고객이 한샘 본사에 전화해 다른 A/S 기사라도 나오면 내 돈과 평가가 깎일 수 있으므로, 나는 늘 고객에게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고 직접 전화를 달라고 당부했다.


덕분에 수없이 많은 전화를 받았는데,

자신이 얼마나 적극적인 소비자이며 앞으로 얼마나 더 적극적일 수 있는지 브리핑한 고객도 있었고,

지인이 한샘 고위직에 종사하는데 그들이 나를 어떻게 할 수 있는지 경우의 수를 알려준 고객도 있었으며,

A/S를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갈 테니 자신의 딸과 밥이나 한 끼 하자는 딸 사랑이 극심한 고객도 있었다.


언젠가 사수 형은 내가 앞으로 가지게 될 직업병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는데,

첫 번째,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심장이 먼저 뛰기 시작한다.

두 번째, 잠시라도 방심하면 A/S를 다니느라 쉬는 날이 없어진다.

세 번째, 술이 늘더라. 였다.


한샘 일을 한 지 1년 6개월쯤 됐을 때의 나에게 모두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추가할 게 있다면 음악을 할 때 생긴 이명과 한샘 일을 하다 다친 팔의 통증이 심해졌다는 점이었다.


나는 한샘 일을 하는 동안은 피폐하고 불안한 날들이 계속될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이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할지, 어떤 의미를 선택하고 살아가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때마침 겨울 비수기가 되면서 일이 없는 날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역마살이 낀 욕실 시공 기사는 욕실을 떠나고 싶어했다.

자아들이 싸워댔다.

그리고 싸움에서 이긴 건 역시 목소리가 큰 녀석이었다.

나는 비수기를 명분 삼아 또 한 번 퇴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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