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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 A MI Oct 28. 2020

Travel Sketch (Western Europe)

패키지로 떠난 여행 드로잉 ep#11.-#20.


#11. 파괴된 도시가 아닌, 파격의 도시

벨기에에서 하루 만에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로테르담 도시 중심부에 들려 한 바퀴를 쓱 돌아보며 도시 전반의 분위기를 익히고 나서는 바로 자유시간이 주어져 비교적 여유 있게 돌아다닐 수 있었던 곳이다. 여전히 잦은 비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내인 마켓 홀에서 쇼핑을 즐겼고, 나는 여느 때처럼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Grote of Sint-Laurenskerk Rotterdam

로테르담은 1940년대 2차 대전 폭격으로 쑥대밭이 되었던 도시이다. 폭격으로 도시가 아예 소멸되고 도시 전체가 다시 재건된 거라 건물들이 대부분 '미래 건축물'들이라고 불릴 만큼 수직상승의 건축 해석을 뒤엎은 뒤틀리고 기울인 현대식 건축법으로 지어진 독특한 양식의 건물들이 총집합해 있다. 이 미래 도시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과거의 흔적인 고전 건물이 바로 이 성로우렌스 성당이다. 여느 성당의 상징과도 같은 높은 첨탑이 없어 보이는 건 전쟁의 잔해라고 볼 수 있다. 화장실을 들리기 위해서 잠시 내부에 들어갔었는데 성당 자체도 많이 무너져내려 내부는 상당수 보수가 되어있고, 지금도 진행 중인 것처럼 보였다. 2유로를 안쪽 깊숙이 들어가 구경할 수 있었으나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관람은 가능했다. 로테르담이 아무리 미래의 도시라고 하지만, 이렇게 과거를 잊지 않고 공존해하고 있는 모습 때문에 아무래도 그 많은 화려한 건축물들보다 이 고전 건물에 눈이 더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자유시간이 주어졌을 때 제일 먼저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한 곳은 바로 이곳이었다. 성당 앞에는 에라스무스 동상이 놓여있고, 근처에 타일로 만들어진 조형물도 있었다. 음식과 옷을 사는 것보다 책을 사는 것이 먼저라는 르네상스의 최고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는 로테르담 출신이었다.


'자라나는 손톱이 먼저 있던 손톱을 밀어내는 것처럼 나중에 만든 좋은 버릇으로 오래된 나쁜 버릇을 밀어낼 수 있다.'   

      

로테르담이라는 도시의 속성과 참 어울리는 인물이다. 이 성당이 다 보이게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앞에 있는 잔디밭에 앉아서 그려야 했는데, 이곳 역시 방금 전까지 내린 비로 축축한 상태였다. 이 잔디밭에 앉아 그림을 그린 후 셀카를 열심히 찍고 있자, 안쓰럽게 지켜보던 다른 혼자 온 관광객이 정성스레 사진을 찍어줘서 상당히 고마워했던 기억을 남기고 도시 중심가로 돌아왔다.

로테르담에서의 커피 한잔

로테르담의 상징인 펜슬 하우스(pencil house)와 큐브하우스(cube house), 그리고 마켓 홀( house market hall)은 한 곳에 몰려있었다. 마켓 홀 쪽에 있는 카페에서 두 건물이 동시에 보이는 뷰에 앉아 3유로짜리 카푸치노를 마시며 분위기를 내보기로 했다. 사실 바로 직전까지 비가 엄청 내려서 방금 전 성당의 잔디밭처럼 이곳의 야외 테이블과 의자는 다 젖어있었지만 퐁피두 센터를 닮은 도서관과, 연필 모양의 아파트, 큐빅 모양의 호텔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 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제법 바람이 불기도 했고 젖어있던 자리라 후다닥 그리고 후다닥 사진을 찍은 뒤에 금세 실내로 들어가긴 했지만 커피 한잔을 두고 그림을 그린다는 설정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여행자의 기분을 심어주었기에 만족감이 매우 높았다. 여전히 하늘은 정말 먹구름이 가득했고, 도심 속 사람들은 일상 속이였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이 도시에 잠시 머물다 간 흔적을 이렇게 그림으로 남기게 되어 기뻤다.



#12. 배가 닻을 내리고 머무는 것을 정박이라 하였다.
로테르담 항구에서의 점심시간

로테르담 중심부 구경을 마치고 근처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왔다. 오는 길에 바로 앞에 항구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애피타이저-본식-디저트로 나오는 간격이 길다는 것을 알기에 루틴처럼 자리를 잡자마자 바로 가게 앞 항구에 나와 계단에 앉아 두리번거리며 주변 관경을 구경했다.  

항구 근처 계단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다가 일어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다 보니 네덜란드 친구들은 보면 끼니를 간단히 때우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심하게 앉아 바닷바람을 쐬며 샌드위치를 먹는 모습이 일상에 잘 녹아있는 듯 보였다.

가까이에 널려있는 닻도 그러했다. 닻이 이렇게 큰지 몰랐는데 도심 한복판에 무심하게 널려 있는 모습은 그림으로 담지 않을 수 없었다. 배가 닻을 내리고 머무는 것을 정박이라고 한다고 했던가, 그리고 닻은 배의 정박용으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달리는 배의 브레이크처럼 잠시 멈추거나 고정시키기 위해서 사용하기도 한다고 했던가.

그러한 닻 또한 쉬고 있다고 생각을 하니 그 모습이 이 근처에 앉아 간단히 끼니를 때우며 쉬다 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지금 이렇게 낯선 여행지에 앉아 쉬고 있는 나의 모습과 겹쳐 보이며 별반 다를 게 없구나 싶었다. 현대식 고층 건물들을 배경으로 어우러지는 항구와 등대, 정박해 있는 배와 말리고 있는 닻, 그리고 그 사이에 바쁘지만 잠시 앉아 이 풍경을 즐기며 식사하는 사람들이 있는 풍경이라니, 모든 장면이 눈에 그림처럼 들어왔다.



#13. 악기를 통한 시간여행
오르골 박물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오르간

위트레흐트에서 들린 오르골 박물관에서는 운 좋게 도슨트의 설명 시간과 겹쳐져서 따라다니며 상당한 종류의 오르골 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설명을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아, 이만한 크기의 오르골은 이런 소리를 내는구나, 아 이 모양에서 이런 소리가 나는구나 하면서 눈으로 보는 전시가 아닌 소리로 듣는 오르골 전시가 되니 보다 입체적으로 기억할 수 있게 되어 좋았다. 오르골의 모양이나 기발한 생각도 생각이지만, 직접 듣고 싶었는데 그 기회를 얻은 건 다행인 것 같았다. 화려하고 웅장한 것들도 있고, 귀여운 아코디언 소리를 내는 것들도 있고 다양했다.

14세기 네덜란드 교회의 시간을 알려주던 종소리가 오르골의 원리가 되어 시작되었다곤 하지만, 일정에 오르골 박물관이라고 되어있을 때만 해도 시큰둥했던 편이었다. 그러나 오르골의 원리와 발전은 물론 다양하고 이토록 방대한 크기인 줄 몰랐던 오르간들을 구경하고 나니 이곳 역시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14. 네덜란드 마트 뿌시기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의 쇼핑의 전부

이날 저녁 네덜란드 담광장에 다시 도착했을 때, 역대급으로 비가 많이 내려서 무슨 태풍이 온 줄 알았다. 보통 비가 내려도 30분 이상 내린 적이 없었는데 두 시간을 쉬지 않고 내려 어떤 일정도 소화시키지 못하고 식사만 하고 돌아왔다. 폭우를 뚫고 스쳐 지나갔던 안네의 집은 기대했던 모습이 아닌 세련된 미술관처럼 상업적으로 변해서 다소 실망했었고, 비는 여전히 그칠 줄 몰라 숙소로 돌아와 떠난 채비를 꾸리며 물건 정리에 힘썼다.


평소 이곳에서 산책을 하면서 봐 두었던 마트에 여행 중 친해진 두 분과 함께 다녀왔다. 우리의 주 공략 상품은 와플 과자였는데, 로테르담에서의 마켓 홀이나 다른 주요 관광지에서의 여느 가게보다 이곳 마트의 가격이 가장 저렴했다고 하셨다. 그분들을 따라 나 역시 과자 사이에 들어간 시럽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과자를 사게 되었다. 먹어보지도 않고 종류별로 한 개씩만 샀던 와플 과자는, 후에 사람들과 나눠먹으며  조금 더 살걸 하는 후회가 남을 정도로 굉장히 맛이 있었다.

물론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의 소비라고 해보았자 이게 전부라 초라한 편이지만 쇼핑을 전혀 하지 않는 나로서는 굉장한 짐꾸러미가 되었다. 필요한 물건만 꽉 채워가는 편이라 그 틈새 공격을 하면서 이리저리 배치를 바꿔가며 꾸역꾸역 가방에 챙기느냐 애썼다.


그렇게 네덜란드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역시나 마지막 아침 산책 길에 나섰다.

이 풍경을 수없이 봐왔지만 떠나는 날의 날씨가 너무 좋아 거울 같은 운하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싱그러웠던 아침 산책길. 어제 이곳에서 마트를 부순 후에 많은 사진을 남기기도 했던 기억도 함께 남기고 가게 되었다. 겨우 익숙해진 풍경을 보내려 하니 아쉬움도 많이 남는다.


#15. 왜 때문에 떠나는 날 날씨가 가장 좋은 건지 설명해 주세요.

오늘은 여행의 마지막 날로 오전/오후 동안 암스테르담 광장에 있는 국립미술관과 반 고흐 미술관을 둘러보고는 암스테르담 공항으로 가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내내 실내에 있어야 하는 일정에다 미술관 투어를 하는 날인 데다가, 마지막 날이라 하루 종일 머물 수도 없는 바로 오늘, 여태까지 지내던 중에서 가장 날씨가 좋았다. 

구름 한 점 없었던 날씨는 또 점차 뭉게구름이 모여들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비는 오지 않았다. 

저기, 그러니까 왜 제가 가는 날에 날씨가 이렇게 좋은 건지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 네덜란드 씨?

거대하고 방대했던 국립미술관을 관람하고 고흐 미술관을 들리기 전 잠시 앉아서 쉬는데 날씨가 너무나 좋아 아쉬움과 포근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선선하게 부는 바람과 싱그러운 잔디, 간지럽히는 햇살, 한가로운 사람들의 발걸음. 모든 풍경이 천천히 눈에 들어왔다. 

Van Gogh Museum


오전에 국립미술관 관람에 다소 소진된 체력을 첫날 들렸던 그 분수대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며 잠시 체력 보충을 했다. 이 분수대 뷰는 넓은 잔디밭과 모여있는 미술관 때문인지 첫날에도 느꼈지만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장소이다. 

고대하던 고흐 미술관은 가히 최고였고, 연대기마다 층층이 그림이 전시되어 있던 구성도 좋았다. 정말 진품으로 보고 싶었던 여러 작품을 보고 있다는 게 꿈만 같았다. 


'열심히 노력하다가 갑자기 나태해지고, 잘 참다가 조급해지고, 

희망에 부풀었다가 절망에 빠지는 일을 또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래도 계속해서 노력한다면 그림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그 속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야겠다. (1882년 1월, 반 고흐의 편지)'


가장 좋아하는 고흐의 말을 되새겨 본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야겠다.'라는 말은 늘 큰 위로가 된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고흐 그림의 장소를 따라다니는 여행도 꼭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Moco Museum

아기자기한 주택 같은 느낌을 주는 Moco 현대 미술관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뱅크시 전시를 하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많이 홍보하고 있는 포스터들을 봤었는데 이곳에서 하는구나 싶었다.

바로 고개만 돌리면 옆에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고흐 미술관 그리고 바로 스케치 한 장 더, 이로써 일전에 그렸던 국립미술관까지 합쳐져 암스테르담 광장에 있는 미술관을 모두 완성했다.


#16. Bravo drawing
앵무새가 있던 암스테르담 중앙역의 식당에서 바라본 성 니콜라스 대성당 (Basiliek van de Heilige Nicolaas)

암스테르담 공항을 가기 전 중앙역에 들려 2층에 위치한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시간을 내어 사람들과 떨어진 테이블에 자리 잡고 창밖 풍경을 짧게나마 담아보았다. 이제 곧 떠난 다고 하니 한 장면이라도 더 담고 싶어 급한 마음에 빠르게 그려보았다. 눈은 창밖을 향해 있지만 귀는 일행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는 소리에 신경 쓰고 있어서 어서 빨리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초 집중 상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 한 무리가 식당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아 앉을 때 뒤에서 났던 소란스러운 소리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나를 향한 관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시간상 급하게 펜 뚜껑을 닫고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 멀리서 보고 엄지 척해주거나 '브라보'라고 외쳐주는 모습을 보면서 그제야 그 웅성거림이 나를 향한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가끔씩 그림을 그릴 때 지나가던 행인들이 '브라보'나 '굿 드로잉'이라며 칭찬 해준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브라보라고 외쳐주니 어쩐지 쑥스러워졌다. '에이~ 그 정돈 아니에요'라는 손짓을 하며 부끄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취향이 반영된 일기와도 같은 드로잉이지만 그래도 가끔씩 듣는 이런 칭찬이 싫지만은 않다. 쑥스러운 것도 사실이나, 힘이 되기도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17. 비의 나라 여행의 마무리
갈 때도 올 때도 직항으로 편했던 비행

공항에서 보딩 대기 중 너무 배고파 8유로짜리 샌드위치와 5유로짜리 음료수를 사 먹었다. 돈을 잘 쓰지 않고 아끼던 나로서는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지 굉장히 파격적인 지출이었다. 공항에서 샌드위치를 먹던 공간이 굉장히 멋진 카페 분위기여서 그림을 그리는 맛이 절로 났고 그래서인지 비행기를 두 번이나 그렸다. 물론 두 번째 비행기는 그리다가 시간이 다 되어 나중에 주변 풍경만 조금 더 보태어 완성했다.


그렇게 이틀을 걸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긴 시간은 내내 잠을 자느냐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계속 비가 내렸다가 그쳤다가를 반복하는 바람에 하도 비를 맞고 다녔더니 약간의 몸살 기운도 있었고, 비 오는 바람에 잉크에 그림이 번지기도 부지기수, 비가 오지 않아서 펜을 들어도 5분도 안돼 비가 내리거나 다 그렸다 싶었을 때도 어김없이 쏟아지거나 아예 비가 와서 펜을 들지 못하는 일들의 연속이었던 이번 여행. 

모든 여행이 계획대로 된 적은 없으니 뭐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지만 다소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다 해도 언제나 그렇듯 시간이 흐르면 모두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있다는 점. 이번 여행도 즐거웠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스케치 자체는 여행에서의 기억을 담기 위한 거지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한 건 아니니까 여행에서의 생생한 순간을 담았다는데 의미를 둔다. 그래 맞아, 이때 비가 와서 다 번졌지, 네덜란드의 날씨는 아주 변덕이 심했어, 라며 여행지에서의 날씨를 드로잉 북에 함께 담아 두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every ep #. 1 -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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