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키지로 떠난 여행 드로잉 ep#1.-#10.
#1. 여행 일기와 여행 드로잉의 그 어디쯤
이번 여행 바로 직전 캐나다 여행에서 스케치북 한 권은 모두 채웠던 경험을 지니고 있었다. 발걸음 하나하나의 기록, 각종 영수증과 티켓들의 기록, 당시 에피소드와 감상의 기록, 그 모든 사소한 기억들이 빼곡히 채웠었고 여행 드로잉과 여행일기의 중간 어디쯤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그 노트는 내게 완벽하게 느껴졌었다.
그 좋은 기억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어 같은 노트인 하네뮬레 블랙 커버 스케치 노트(140g)를 샀고 그때의 설렘을 기억하면서 이번에도 같은 콘셉트로 만들어 낼 생각이었다.
그래서 여행 가방 꾸리기부터, 생각해 둔 데일리 룩까지 출발 전 상황도 꼼꼼히 기록하며 이번 여행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 여행기간은 겨우 일주일, 왕복 이동 시간을 빼면 실질적으로 5일 정도밖에 되지 않아 스케치북을 다 채운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욕심은 있어 자주 스케치북을 꺼내 보려 했으나 맘처럼 쉽지 않았고 나름의 애로사항도 생겨서 난처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 모든 해프닝이 담긴 소중한 드로잉 노트가 되었다.
이번 여행은 유럽여행에서는 처음으로 직항을 타게 되었다. 갈 때 11시간 50분, 올 때 10시간 40분, 저가항공에서 늘 겪었던 경유(환승 대기) 시간이 없어서 매우 기뻤다. 그 기쁜 마음을 담아 대한항공의 KOREAN AIR를 강조해서 그렸다. 그림 옆에는 비행기 티켓을 붙이고는 자리를 바꿀 수 있었던 사연, 5분도 걸리지 않았던 입국 수속, 지연 없이 비행기가 이륙된 사소한 정보들이 적혀있다.
기내식 나오는 거 사진 찍는 건 촌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매번 열심히 찍고 기록한다. 어쨌든 여행이 업이거나 자주 하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식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기내식은 매번 나올 때마다 어떤 선택이 제일 좋을까 고심하게 되는데, 개인적으론 이번 기내식들은 다시 돌아간다면 다시 선택하고 싶은 초이스들이었다. 개인적으로 기내식으로 어떤 것이 나와도 다 맛있게 잘 먹는 편인데, 그렇게 맛있게 먹었으면서도 뭔가 다른 걸 선택했다면 더 맛있지 않았을까 하는 질투 섞인 느낌 또한 늘 갖는 편이다. 갈 때는 잠을 못 청해 간간히 나오는 간식도 다 먹었는데, 올 때는 잠을 계속 자서 그런가 기내식 2번만 먹게 되어 뭔가 더 아쉽다. 중간중간 나오는 간식까지 다 먹었어야 했는데.
여행 초기에는 무조건 창가 자리를 선호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무조건 복도 자리를 선호하게 되어 버렸다. 그것도 화장실 가까이라면 더더욱 좋고. 그런데 이번에 그 조건이 모두 충족시킬 수 있었다. 오갈 때 모두 화장실 바로 앞 복도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화장실을 맘 편히 들락날락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다른 이들이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릴 때마다 인기척이나 물 내리는 소리는 감수해야 한다. 그래도 너무 편한 좌석이었다. 신발은 당연한 듯 벗어두고 기내 제공 슬리퍼 이용, 두꺼운 외투는 필수, 안대는 선택, USB 포트 충전기도 필수. 여행 중에 자신에게 어떤 행동과 물건들이 편안한 시간을 제공하는지 스스로 익히며 하나씩 쌓여가는 행동의 루틴들이 여행의 재미를 더해주는 것 같다.
#2. 같은 호텔에서 3일 이상 묵는다면, 그 일대는 '우리 동네'라고 말할 수 있다.
보통의 여행에서 호텔을 그린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 호텔은 5일의 여행기간 중 무려 3일이나 머무르게 된 곳이고, 깔끔한 신식 건물에 고급스러운 시설, 주변 환경까지 포함하여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이곳은 반드시 흔적을 남겨야겠다고 다짐했다.
건물은 2동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림을 그리고 있던 곳은 본관으로 리셉션, 레스토랑 및 조식 장소, Bar로 운영되고 그림이 그려진 반대편이 객실이었다. 넓고 세련된 인테리어는 물론, 서비스도 매우 친절하고 깔끔했다. 무엇보다 조식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머무는 내내 조식은 같은 식단으로 먹었다. 해외 호텔의 조식은 거의 모든 곳들이 비슷한 선에서 그 종류가 더 많거나 적은 정도라 선호하는 조식 식단이 있다. 반드시 빠지지 않는 메뉴인 크로와상과 에그 스크램블, 그리고 베이컨을 조합하여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 일관된 취향을 가지고 있는데 이번엔 연어가 나와서 베이컨을 대신하면서 다른 과일과 야채와 함께 매우 풍부하게 먹을 수 있었다.
흔히들 말하는 호캉스는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이 호텔에서 싱글룸을 쓰면서 마음 편히 돌아다니고 360도로 각도를 회전시킬 수 있는 TV를 화장실 쪽으로 돌려두곤 욕조에 누워 반신욕을 하면서 보내던 시간들이 그야말로 모든 피로감을 풀어주는 휴식의 시간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본래 가지고 있던 여행의 루틴, 호텔 주변 동선 파악하기를 이미 첫날 이행했는데,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던 만큼 그 길목은 나의 아침, 저녁의 산책로가 되어 주었다. 낯선 여행지에서 루틴을 만들어 이행한다는 것은, 여행지 앞에 붙은 그 '낯선'이라는 말을 지워주기에 충분했다.
#3. 비에 '젖은' 드로잉 노트가 아니라, 네덜란드의 날씨를 '품은' 드로잉
첫 관광을 앞둔 아침부터 비가 왔다. 분명 7월 마지막 주만 해도 37도를 웃도는 무더위였다고 들었는데 8월 첫째 주에 10도 정도 떨어지더니 둘째 주는 20도 정도 떨어진 완연한 가을 날씨였다. 평균 체감기온 18도. 해가 나면 20도 정도까지 올라가지만 비가 자주 내렸기 때문에 대체로 선선했다. 옷은 거의 가을 옷이었고 수시로 내리는 비 때문에 후드 집업이나 방수용 겉옷이 필요한 날씨다.
초록색 벽면과 주황색 지붕으로 아기자기했던 시골 어촌마을에 도착하자 비가 그쳤다.
신나라 하면서 설렁설렁 산책을 했고 안심하고 첫 어반 스케치를 시작했는데 두세 번의 선을 긋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부슬부슬해서 무시하고 그대로 그림 그리기를 진행했으나 점점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잉크펜으로 그리던 그림에 결국 눈물자국 얼룩을 남기기 시작해서 후다닥 마무리하고 접을 수밖에 없었다. 매우 아쉬웠던 첫 어반 스케치. 심지어 비가 내리기 전 그 소중한 시간은 어디서 그림을 그리면 좋을까 라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림 그릴 자리를 탐색하느냐 관광객 모드로 동네사진이나 셀카를 찍을 시간도 갖지 못했다.
'드로잉을 할 수 없다는 게 여행에서의 스트레스가 될 줄이야'
라고 적어둔 노트에는 아쉬움이 묻어난다. 여행의 즐거움 중의 하나였던 드로잉이 여행의 이유이자 전부가 되어버렸기에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거라고, 그렇게 야속하게 계속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정말 스치듯 비만 흩뿌리고 지나가게 된 동네.
비는 밀당을 하는지 버스로 이동 중에는 엄청나게 퍼붓다가, 관광할 장소에 도착하면 또 잠시 그치기를 반복했다. 이번에도 버스에 내려 볼렌담 상점가로 걸어갈 때까지만 해도 비가 내리지 않았었는데, 점심 식사를 하러 식당에 들어가기 직전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식당 음식이 준비되기 전에 여전히 습관처럼 식사 후 돌아다닐 동선을 머릿속으로 짜 두었고, 잠시 시간을 내어 상점가로 들어서는 입구가 보이는 장소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부슬비 속에서도 나름 번지지 않고 차분히 완성한 편이었는데, 다 그린 그림을 각도를 잡고 찍는 와중에 쓰고 있던 우산에서 떨어진 빗방울에 결국 젖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나름 이 날씨에 겨우 한두 방울만 젖었다는 건 매우 선전한 거라며 좋아했던 그림이다.
볼렌담에 즐비해 있는 상점들은 외관부터 네덜란드의 랜드마크와 상징적인 장식이 많아 대체로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고, 바로 옆에 탁 트인 북해가 보이는 곳으로 네덜란드가 바다보다 낮은 평지에 집을 짓고 산다는 것을 아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다. 둑길 의자에 앉아 그림을 그렸었는데 오른편에 있는 북해 바다보다 낮은 위치에는 일반적인 주택들이 즐비해 있었고, 둑길과 나란히 자리 잡은 건물들은 모두 고급주택이라 길목을 지나며 일행들과 '난 이 집', '난 이 집' 이러면서 취향에 맞는 집을 선택해 보기도 했다.
#4.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암스테르담 운하 크루즈 예약으로 잔세 스칸스의 시간을 비롯, 관광 일정의 시간이 모두 짧아졌다. 무엇보다 비가 계속 내려 관광을 느긋하게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
여유로운 관광도, 햇살 가득 산책도, 신나는 드로잉 시간도 모두 갖지 못했다.
항상 날씨 운이 좋았던 편이었는데, 이곳에서는 비가 내리는 강약의 조절의 운만 조금 따를 뿐, 비 자체를 거스를 순 없었던 모양이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가끔은 야속할 정도.
이번 여행지를 네덜란드로 정한 이유이자 가장 보고 싶었던 풍차마을에 도착했을 때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잔세 스칸스에 도착하자마자 쏟아지는 비를 피해 실내로 들어갔고, 치즈 공장과 나막신 공정을 구경했다.
드로잉만큼이나 좋아하는 것이 산책이라 풍차 마을에서의 한적한 산책을 내심 기대했었는데 산책은커녕 제대로 된 구경도 못하고 일행들은 출구 쪽으로 이미 발길을 돌려 나가고 있었다. 비도 비지만, 운하를 끼고 띄엄띄엄 겨우 4개만이 남아 있는 잔세 스칸스의 풍차 풍경에 다들 내심 실망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진으로 이 4개를 한꺼번에 담을 수도 없었다. 빈약한 풍차 개수와 텅 빈 풍경을 가득 메우는 것은 관광객 인파뿐. 기대가 컸기에 실망이 컸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출구로 향하는 행렬에 가담하는 순간, 아주 잠시 비가 그쳤다. 곧 다시 보슬보슬 내리긴 했지만 그 찰나를 이용하여 잠시 방향을 틀어 가장 가까이에 있던 풍차를 아주 빠르게 담아 보았다. 오렌지의 나라답게 주황빛의 풍차 날개와 선명한 초록빛의 몸짓을 짧고 강렬하게 관찰하여 담다 보니, 마냥 실망의 마음만 남는 것도 아니었다. 짧은 시간 탓에 웅대한 풍차를 제대로 담지도 못했고, 무심하게 내리는 빗줄기에 역시나 잉크가 번졌어도, 네덜란드의 상징인 풍경과 날씨가 모두 노트 안에 담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노트에 남기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여행의 소중한 순간의 기억들이라는 것을.
#5. 잠깐의 소중함, 비가 그치면 사람들이 모입니다.
암스테르담 광장에는 식사를 하기 위해 오후 늦게나 들렸다. 국립미술관, 현대미술관, 고흐 미술관이 한데 다 모여있는 광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분수대 앞에서 둘러앉아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행을 오기 전 네덜란드는 1년 365일 중 300일은 비가 오는 나라라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하루 종일 햇볕을 쬐며 광합성 작용을 한다고 들었었는데, 직접 와서 보니 그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비가 오락가락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산을 잘 쓰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잠시 비가 그치는 순간에는 어디서 들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는지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모두 모여 이 잠깐의 시간을 실속 있게 즐긴다. 간식도 사 먹고 사진도 찍고 멍하니 앉아 주변을 살펴보는 등. 물론 지속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약 30분 정도랄까. 그래도 그 30분 동안은 나도 마치 네덜란드인이 된 것처럼 그 순간이 매우 소중하게 느껴졌고 더없이 감사했다. 그래서 나 역시도 그 시간을 온전히 주변 풍경을 흡수하는데 쓰고 싶었다. 역시나 펜을 들었고 이 순간의 맑은 풍경을 담을 수 있었다. 변덕스러운 날씨, 선선한 바람, 비가 잠시라도 그치면 삼삼오오 모여 앉아 행복한 표정을 보여주는 사람들.
#6. 도개교가 보이는 산책길에서 신호대기를
강보다 낮은 잠수교와 도개교가 있던 산책로, 그리고 그 길목의 펜션 같은 주택가와 대형 슈퍼까지.
같은 숙소에서 지내다 보니 이 주변을 마치 동네처럼 돌아다녔다. 스스로 동선을 짜고 파악하고 누비고 다녔다는 것만으로도 스쳐 지나가는 듯한 관광지와는 다른 매력으로 깊게 새겨져 이번 여행의 만족도를 매우 높여주었다. 이곳 도개교 밑 잠수교는 운하보다 다리가 더 낮아 눈높이에서 강줄기와 나란히 산책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첫날 산책하면서 잠수교와 도개교가 모두 있는 이 곳을 우연히 발견한 것도 신기했었는데, 도개교가 열리며 요트가 집으로 돌아가는 풍경에는 탄성까지 내뱉게 만들었었다. "꺄! 나 지금 네덜란드야!" 라며 유명 관광지 못지않은 즐거움을 선사했다. 신호등이 평범하게 빨간색 불을 밝히면 천천히 한쪽 다리가 올라간다. 깃발이 긴 요트들이 지나가고 나면, 도개교는 천천히 다리를 이어주며 언제 그랬냐는 듯 바뀐 파란불에 차와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이 익숙하지 않았던 장면이 익숙한 장면으로 바뀔 때까지 몇 번의 산책을 더 다녔던가.
어쨌거나 머무는 내내 매일 산책했던 곳.
마지막 날에는 친해진 일행과 함께 슈퍼에서 쇼핑을 마친 후 이 강가에 앉아서 신나게 사진을 찍으며 놀았다. 운하 주변을 가득 에워싼 이 주택가와 강가에서의 산책, 그리고 포토타임, 모두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해 주었다.
#7. 유혹당하는 듯하면서 유혹하는 듯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보다.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미술관 관람 시간, 이곳에서는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소중하고 있어 유명한 덴하그(헤이그) 미술관을 들리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렘브란트 특별전'은 이곳을 더 특별하게 만들었다. 생각보다 규모가 크지 않아 다소 여유롭게 관람할 수 있었고, 특히 3층에 있었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앞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었다. 가까이에서 면밀히 살펴보다가 먼발치에 떨어져서 바라보기를 반복하며 북유럽의 모나리자의 모습을 눈에 담아보았다. 유혹당하는 듯하면서 동시에 유혹하는 듯한 은밀한 시선과 묘한 분위기. 전에 없던 베르메르의 단독 인물상으로 검은 배경 속에서 반짝이는 진주 귀걸이만을 부각하며 온 시선을 소녀에게 빼앗기게 만든다.
#8. 비와 먹구름과 감자 미트볼 식사에 익숙해진다는 것
베르메르의 고향인 델프트는 그의 집터라던가 작품을 동상으로 남겨 놓은 아담한 동네였다.
볼 것이 많은 곳은 아니었기에 거의 스치듯 지나쳤던 곳이나 특유의 고요하고 잔잔한 분위기는 17세기의 네덜란드를 간접 체험하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패키지여행에서는 식사를 그리 기대하지 않는다. 어떤 식당을 들어가도 여행사에서 부탁한 요리는 똑같기 때문에, 줄곳 비슷한 음식을 먹게 된다. 이곳을 여행하면서 소소한 변화는 있었으나 내내 으깬 감자와 미트볼을 주식으로 먹었다. 뻔한 식사의 내용과 자주 늦던 서빙으로 식사 후에 주로 움직이던 루틴은 식사 전부터 이루어진 편이었다. 식사 자리를 안내받자마자 바로 일어나 식당 내부를 어슬렁 거리며 드로잉 할만한 장소를 찾았다. 평소였다면 식당 밖으로 나가서 주변을 살폈겠지만 지금 당장 비가 오지 않더라도 한 치 앞도 모르는 상황이 계속 연출됐기에 식당 내부에서 정원을 그리기로 했다. 그릴 곳이 마땅치 않아 통로 계단에서 그렸는데 역시나 그리던 도중 우르르 쾅쾅 요란한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려 시원한 빗소리를 들으며 그림을 마무리하고 자리로 돌아가 식사를 했다. 식사도, 날씨도, 드로잉도, 그리고 숙소에서의 시간도.. 모두 예측 가능한 범주 내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니 이제 네덜란드도 제법 친숙하게 느껴졌다.
#9. '다음에 이곳을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장소에 간다는 것
벨기에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간 곳은 루벤스의 그림이 있는 안트워프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었다. 이곳 앞에는 <플란다스의 개>의 주인공 네오와 파트라슈의 동상이 있었고, 간단한 설명과 함께 바로 벨기에에서의 첫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얼른 성당 내부에 들어가면 루벤스의 그림부터 보았다.
사실 기대했던 건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그림이었는데 실제 작품을 직접 감상해 보니 빛의 오묘함으로 성스러움을 자아냈던 <성모승천> 그림이 더 인상 깊게 남게 되었다. 루벤스의 그림만으로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 성당 내부에 오도카니 앉아 상념의 시간을 보내다 밖으로 나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릴 만한 장소를 물색하며 돌아다녔다. 성당의 외부는 공사 중인 데다 인파가 많아 그리기에 적절하지 않았고, 주변도 마땅히 눈에 띄는 곳이 없어 두세 바퀴를 계속 챗바퀴처럼 돌다가 결국 안트베르라는 도시 이름의 유래를 나타내는 동상(병사 브라보가 폭군 양타곤의 손(한트)을 던지는(베르펜) 모습)이 놓인 광장 앞 와플가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청 건물과 길드하우스, 성당들이 줄지어 있는 광장 가득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그림을 반쯤 그리고 나니, 그제야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나타났다. 자리값 낸다고 생각하고 벨기에 플레인 와플을 주문하자 또 한참 뒤에 나와,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그림을 마무리했다. 공사와 행사 준비로 분주한 광장에서 그 풍경을 온전히 담을 순 없었지만, 겉바 속촉의 벨기에 와플이 새삼 여행자의 기분을 내게 해 주었다.
브뤼게에서의 선택 옵션이었던 마차 타기를 선택하지 않아 잠깐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가장 유명한 종탑을 가볼까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줄이 매우 길었고, 12유로라는 비싼 값으로 좋아하던 전망대에는 오르진 않았다. 대신 시청사로 가는 길목 중에 가장 눈에 띄었던 와플집에서 와플을 사 먹었다. 벨기에에서 처음 먹었던 와플이 토핑 없는 기본이었기에, 이번에는 딸기 토핑이 가득 들어간 와플을 샀다. 결과는 정말 인생 와플에 등극할 만큼 대만족! 엄청 쫀득, 달콤, 촉촉, 표현할 수 없는 녹아드는 맛이었고, 벨기에의 국기를 꽂아주는 게 킬링 포인트였다. 상점가와 거리 프리 마켓, 길드 상회를 두루 품고 있는 종탑 앞 광장에서 오르지 않았던 종탑의 벨소리를 들으며 벨기에에서의 두 번째 와플을 그려보았다.
마차 관광을 끝낸 사람들에게 자유시간이 주어졌기에 덩달아 나도 조금 더 쉴 수 있었다. 방금까지 계속 번화 중심가에 있었던 터라 이번에는 그곳에서 몇 발자국 벗어나 조금은 한적한 느낌이 드는 공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곳까지 와플을 들고 와서 여유롭게 먹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는데, 종류가 제각각이라 이곳은 정말 와플 천국이구나 싶었다. 아까 먹은 벨기에 와플 국기를 스케치북 위에 꽂아두고 뒤에 보이는 천주교 성당과 브뤼게 버전 갈릴레오인 시몬 스테빈 동상을 구도 삼아 그림을 그렸다. 여행 전에 그려보는 여행의 순간은 항상 이런 장면이다. 한가로운 공원에서 적당한 주변 소리와 어우러지는 드로잉의 사각거림. 이 곳에서 잠시 그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브뤼게의 거리를 빠져나오며 마지막으로 식당에 들렸다. 머문 시간은 짧았지만 어쩐지 마음에 쏙 들었던 브뤼게였기에 마지막 순간까지도 놓치고 싶지 않아 역시나 식사 전에 바로 식당 앞에 있던 마차 쉼터 분수대를 그려보았다. 신나게 말머리에서 나오는 물을 그리고 있을 때 아까부터 뭔가 시원하게 나오지 않던 펜의 잉크가 똑 떨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여행을 위해 새 잉크로 바꿔서 들고 왔고 평소보다 그림을 더 그리긴커녕 오히려 덜 그렸는데 왜 삼일 만에 떨어진 거지 싶어서 계속 펜을 흔들면서 그렸는데 역시나 잉크가 떨어진 게 맞았다. 황당하긴 했지만 처음 겪는 일도 아니었던 터라 결국 그리다 만 느낌 그대로 노트에 남겨두고 식당으로 돌아갔고, 남은 일정은 가지고 있던 다른 펜으로 그려야 했다.
이번 여행은 은근하게 네덜란드 미술기행이 가미되어 있었다. 베르메르의 고향인 델프트 구경과 헤이그에서의 베르메르 그림 감상, 루벤스의 고향인 안트워프의 성당에서 루벤스 그림 감상, 얀 반 에이크 동상과 그림이 있는 겐트 성당, 고흐 미술관까지..! 얀 반에이크의 그림은 성당 내부 중에서도 4유로를 주고 입장해야 별도 전시장에 마련되어 있었는데, 비 좁은 곳에 사람들이 모여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림 보호 차원의 유리막이 그림과의 거리를 멀게 해 제대로 감상할 수 없어 아쉬움이 컸다.
그림 감상 후 잠시나마 또 자유시간이 주어져 얼른 성당과 동상이 다 보이는 벤치에 걸터앉아 임시방편으로 필기용으로 가져왔던 검정펜(0.3mm 코픽 펜)으로 성당을 그렸다. 라미 만년필의 굵은 선으로 내내 그리다가 라인 펜의 가는 선으로 오랜만에 그리자니 매우 어색했고 높은 성당을 다 욱여넣겠다고 엄청 납작하게 눌러서 그렸다. 그리는 게 어색해서 시간이 다소 걸렸었는데, 이렇게 천천히 오래 그리는 것도 참 오랜만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다 그리자마자 또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나 방수 펜의 위력으로 전혀 번지지 않았다. 그림을 그린 후에는 자유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보다 핫 플레이스였던 운하 주변 풍경은 그리지 못했다. 그래도 그곳에서 혼자 셀카를 찍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그곳에 있던 여러 사람들이 번갈아 가며 사진을 찍어줘서 나름대로의 즐거운 추억을 남길 수 있었다.
#10. 관광 명소와 숨은 명소
브뤼셀에서는 내내 비가 왔다. 그래서 현장에서는 전혀 그림을 그릴 수 없었는데, 다소 실망스러웠던 오줌싸개 동상과 그 번외 버전은 관광 후에 숙소로 돌아와 사진을 보며 그려보았다. 벨기에 일정은 하루뿐이라 이곳에서 머문 숙소는 아주 외지에 시설이 좋지 않았으나, 역시나 오는 길에 봐 두었던 길목으로 짐을 푼 후 얼른 산책을 나가 보았다. 모처럼 마음에 드는 장소로 여행을 왔는데 오늘 그린 스케치 양은 조금 아쉬웠다.
우연히 들어간 식당이 맛집이고, 우연히 걸어간 곳이 관광장소일 때가 있는 것처럼 산책하다 우연히 멋진 장소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과장일 수 있으나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성벽은 동화 같았고 라푼젤이 나올 것만 같고, 주변의 석양은 아름다웠고 그랬다. 주변에 마땅히 걸쳐 그릴 곳이 없어 쭈그려 앉아서 그리다가 다리 저려 일어났다가 다시 쭈그려 앉아 그리길 반복하여 완성된 그림이다. 결국 난 그림만 그린 게 아니구나, 그 순간의 추억들을 모두 담고 왔구나, 라면서 다리 저린 순간을 미화시켜 본다.
이후의 얘기이지만, 네덜란드/벨기에 여행에서 정작 하루뿐이었던 벨기에는 너무나 강렬해서 꼭, 나중에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문 시간이 짧아서 아쉬웠다면 아쉬움일 수도 있고, 머무는 동안의 시간이 모두 좋아서였다면 기쁨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이후에 여행지 어땠냐는 질문에 "벨기에가 너무 좋았어"라는 대답을 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숙소에 돌아와 가방을 정리하다 평소 가지고 다니던 가방을 그대로 들고 온 탓에 여유분의 잉크가 하나 있었다는 걸 발견하고 다음날부터 다시 라미 만년필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