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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 A MI Oct 16. 2020

Travel Sketch(Southern Europe)

패키지로 떠난 여행 드로잉 ep#01.-#10.


#1. 여행(旅行)은 '나그네의 행렬', 길 위에서 살펴보는 것.

여행의 첫 번째 길이자, 항상 빠지지 않는 인천 국제공항 에서의 비행기 장면.

앞으로 탑승하게 될 비행기가 분주하게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어김없이 설렘이 찾아온다.

여행을 떠나기 전 이미 긴 입국심사로 살짝 지치려던 마음을 다시 잡아주는 시간이자, 내게 열릴 하늘길과 앞으로의 시간을 예상하게 해주는 시간이다. 그 떨림과 부탁의 마음을 마음을 담으며 항상 비행기를 그린다.

특히 비행기와 승객을 '연결'해주는 탑승 통로와, 하늘과 땅과 '연결'해 주는 바퀴를 그릴 때 그 설렘은 배가 된다. 오가며 밟는 같은 길을, 다른 마음으로 걷게 되겠지.

탑승 전 후

여행을 떠날 때 준비한 스케치북의 하얀 면은 여행의 설렘을 배로 안겨준다.

탑승 전 게이트 앞에서, 탑승 후 좌석에서, 공항 경우 대기 중에도 혼자 하는 여행에서 지루할 틈 없는 든든한 친구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 끄적임은 기록이자, 수다이자, 그 시간을 옮겨 심어 두는 화분갈이가 되어 준다.

앞으로 (펼쳐질) , 그리고 뒤로 (추억하게 될) 시간을 잘 부탁해.


헬싱키 공항 경유 대기 중 낙서.


지난여름에 들렸던 헬싱키, 당시엔 공항을 이용하지는 않았었는데, 경유를 이유로 반년만에 다시 헬싱키 도착했다. 백야로 한없이 밝은 낮이 이어졌던 여름에서 너무나 짧은 낮이 지탱하고 있는 반대 계절, 겨울에 만난 것이다. 겨울의 헬싱키는 4시가 채 되기도 전에 해가 지기 시작했다. 그때 볼 수 없었던 노을을 눈에 담아둘 수 있었다. 낮과 밤, 여름과 겨울, 반대되는 속성을 한 해에 느끼며 헬싱키 공항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며 경유 대기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누가 봐도, '나 여행 중이에요.'를 보여주는 구도를 택하며 공항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모두 담아 그려본다. 비행기, 여행가방, 커피, 노트와 펜, 추억을 담을 핸드폰.

그림을 그리고 싶으나 망설이는 친구들에게 늘 하는 말, 좋아하는 것들을 그려봐. 좋아하는 순간을 남겨봐.

그리고 누구보다 그것을 잘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다. 나 자신이 즐겁기 때문에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일상 드로잉과 여행 드로잉일 것이다.


제법 길었던 시간이지만 좋아하는 것들을 그리고, 또 좋아하는 장면들을 보고 있으니 또 금방 흘러가는 것이 시간이다. 카페 벽면의 낙서들도 눈에 들어와 얼른 또 따라 그리다 보니 시간은 더욱 금방 흘렀던 것 같다.


이때만 해도 헬싱키의 대충 그린 듯한 원라인 드로잉 벽화(한 선 그리기)가 이번 여행의 미리보기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다, 이번 여행은 가장 패키지여행 다웠던 여행으로 자유시간이 너무나 짧아 거의 모든 그림이 10분을 넘기지 못했던 진정한 어반 스케치 여행이었다.

이전까지의 두 번의 여행과 앞으로의 두 번의 여행은 시간적 여유면에서 상당해 대조되는 여행이었는데, 당시에는 '운이 좋군''운이 나쁘군'으로 생각했던 속 좁은 평가들은 오랜 시간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그렇듯, 그럴만했거나, 그럼에도 좋았다는 기억이 남게 된다.

뭐든, 이미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난 대로 가치를 갖게 되기 마련이라는 것을 안다.

일어나기 전에 상상하던 것과는 다르다 하여 그것이 추억이 되지 않을 순 없으니.


항상 그랬지만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바쁘게 그린 탓에 대부분 10분을 넘기지 않고 재빠르게 그린 진정한 어반 스케쳐의 여행 드로잉, 그리고 그림 그렸던 시공간을 생생히 옮겨본 여행지에서의 순간순간들

첫 숙소에 도착해서 로비에 있던 바르셀로나 랜드마크 그림 따라 그리기


공식 일정을 시작하기 전에 로비에 있던 쉐도우 그림을 따라 그렸다.

이때만 해도 지금 따라 그린 이 그림의 대부분의 곳을 들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리고 나니 쌍둥이 빌딩, 몬주익 언덕, 성가족 성당, 바르셀로나 대성당, 구엘 공원등을 모두 들렸었다.


여행(旅行)은 '나그네의 행렬', 길 위에서 살펴보는 것.

이번 스페인 길에서 어떤 것들을 살펴보고, 어떤 것들을 담게 되고, 또 어떻게 추억하게 될지.

여행 첫날의 기분은 늘 그렇듯 '기대'의 감정이 압도적이다.



#2. '우아'하게 가 아닌 '우와!' 하게 하는 그림


우아한 자태, 고상하고 기품이 있으며 아름다운 관광 명소와 유적지들은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보다 기념품샵 엽서 사진이 훨씬 잘 나와 있으며, 그러한 장소를 세련되고 멋지게 그릴 수 있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아름다운 풍경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그림에 대한 욕심과 미련은 늘 가슴 한편에 품고 있었다.

너무나 고대하던 가우디 성당을 실물로 눈 앞에 두는 순간부터 이번 여행의 목적을 모두 다 이룬 듯 기뻤다.

성당 앞 호수에서 가우디 성당이 고스란히 반사되는 광경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장면이었다.  

모든 게 기대 이상이었고, 여행의 첫 스케치를 반드시 이곳에서 멋있게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렁였다. 때문에 잠시 집합해 있는 시간을 틈타 스케치북부터 빠르게 펼쳤다.

그러나 마음속 낭만과는 달리,  펼쳐진 스케치북이 채 5분을 넘기기도 전에 우리 팀은 이동을 시작했다.

정말 말 그대로 성당 앞에서 찰칵, 하고 기념사진을 찍을 정도의 시간만 주어졌던 것. 어쨌든 패키지여행에서는 무리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무리의 가장 마지막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얼른 스케치북을 덮고 발걸음을 맞춰야 했다. 10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고, 첫 야외스케치를 제대로 하지 못한 느낌이 들어 아쉬웠다.


아름다운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원시적이고 투박한 외부와는 달리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와 현대적인 장식의 내부가 인상적이었다. 말로만 듣던 네오고딕 양식의 그 유기적 곡선의 장식들은 그간 유럽에서 흔히 보아왔던 성당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거친 듯 정갈하고 화려한 듯 담백한 묘한 멋이 있었다. 무엇보다 '아직도 지어지고 있다'는 미완의 매력이, 완공되면 다시 와서 보고 싶다는 또 다른 발걸음을 유도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내부를 관람하고 난 뒤 성당과 제법 멀어지는 발걸음을 걸은 뒤 거리의 한 기념품 샵 가게에 들리게 되었다. 자유시간처럼 주어진 쇼핑시간, 내부 관람 전에 느꼈던 아쉬움을 달래고자 굳이 기념품 샵 안에 있는 성당의 완공 모형을 한 번 더 그려본다.

실물 성당과 모형 성당


여행을 모두 마친 뒤에 그림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면서, 장소마다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짧다며 '이번에는 제대로 못 그렸어'라고 생각이 온통 여행 내내 지배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구나 라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특히 이 가우디 성당 모형을 그린 것을 보면서, '에구, 얼마나 아쉬웠으면 굳이 또 그렸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10분도 채 못 그렸던 게 아쉽다고는 말하지만, 어차피 너무 어마어마한 외관의 성당이라 오랜 시간을 두고 그려봤자 그 느낌을 다 살리지도, 다 담아내지도 못했을 텐데 말이다.


그러다 제법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여행의 첫 그림, 그러니까 헬싱키 공항에서의 간략한 벽화를 따라 그렸던 장면을 보고 뒷장을 보니 그림체가 어느 정도 닮아 있었다는 것을 느꼈고, 뒤늦게나마 간략해도 좋잖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의 밀도나 디테일보다 당시의 감흥을 담고 있는 몇 개의 선으로만 구성되어있는 이 간단한 그림도 그대로 매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제대로'라는 말을 스스로 어떻게 정의하고 있었는지를 점검할 수 있었다. '완전(한 모습으로)', '충분(한 시간을 들여)'이라는 말 외에, '그대로'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제대로.


이곳에서 누릴 수 있었던 그 시간만큼의 이곳의 느낌을 그대로 그려냈던 거네.


그 생각이 들자, '귀엽다 이 간단한 선, 꼬물꼬물 생생해.' 라며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그렇게, 성가족 성당에 이어 다시 보니 귀엽게 보이는 두 번째 그림 구엘공원

구엘공원은 정말 아기자기했다. 건축과 기둥들이 모두 살아있는 듯 유기적이었고, 깨진 타일들은 코발트 빛깔을 반짝이며 하늘과 어우러졌다. 사람이 매우 많아 붐볐지만, 그럼에도 각자의 관광을 즐기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햇볕 따스했던 구엘공원, 모자이크 타일 의자에 기대어 사진으로만 봤던 전망이 보이는 곳을 눈과 손으로 담아 보았다. 이 그림 역시도 그때에는 아쉬움이 컸지만, 꼬물꼬물 한 선이 그때의 설렘을, 함께 찍은 사진의 햇빛이 그날의 온도와 기운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3. 여행 장소는 달라도 루틴은 존재한다.
식사 후 주어지는 잠깐의 시간을 항상 산책을 하며 즐긴다

오전 관광 후 항구에서 점심식사 후 광합성을 했다. 식사는 그토록 먹어보고 싶었던 빠에야였고, 후식은 오렌지였다.

몇 번의 유럽 여행으로 생긴 노하우, 혹은 루틴이라고 한다면 항상 식사 전에 주변을 먼저 살펴보고 나서 자리에 앉아 식사 후 먼저 눈대중으로 살펴본 동선을 실행하며 잠시나마 자유시간을 즐기는 것이다. 유럽 여행은 식사 나오는 시간까지의 대기 시간이 길고, 식사가 한 번에 주어지지 않고 코스요리로 세 번에 걸쳐 나누어서 주기에 식사 속도가 제법 빠른 나는 이 점을 이용한다. 첫 요리가 나오기 직전이나 나온 후에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면 내내 디저트가 오렌지였기에 미리 자리에 놓여 있던 오렌지를 들고 밖으로 나가 차에 오르기 전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볕이 좋지만 제법 쌀쌀한 스페인의 날씨는, 산책하며 사람들의 옷차림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러닝 하는 사람이 유난히 많았고, 이 겨울에 비치발리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또 그 옆을 걸어가는 사람은 두터운 겉옷을 입고 춥다는 듯 움츠린 자세로 지나간다. 생각했던 동선의 반환점에서 대자로 누워 햇볕을 쐬고 있는데, 나중에 일어나서 보니 주변에 마치 나의 동료처럼 대자로 누워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웃음이 나왔다.

내내 바쁘게 관광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잠시나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광합성을 하며 노곤노곤 누워있던 이 짧은 시간이 그래서 더 좋았던 것 같다.

스페인 커피는 유난히 맛있어서 자주 사 먹었고 라테 종류 용어를 배워 적어두기도 했다.


#4. 멀리, 가까이, 짧게, 길게, 밝게, 어둡게 두루 살펴본다는 것


다음날은 바르셀로나에서 그라나다로 왔다. 그라나다에서는 알함브라 궁전과 저녁에 알바이신 거리에서 낮의 알함브라 궁전의 야경을 보는 일정이었다. 먼 곳으로 이동하면서 차 안에서 앞으로 갈 곳을 생각하며 몇몇 장면을 그려보았었는데, 어쩌면 어렴풋이 오늘도 자유시간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걸 직감했는지도 모른다.


이동 중 사진을 보며 미리 그려 보았던 세 컷과 현장에서 마무리했었던 마지막 한컷까지

아치형 기둥 안쪽에서 밖을 보는 구도를 좋아하는 편이란 걸, 이번 여행에서 확실히 느꼈다. 당시엔 몰랐는데 지나 보니 궁전에서 그러한 구도의 그림을 두장이나 그렸던 것이다. 가장 먼저 그렸던 이 곳은 사계절 내내 꽃을 피우는 여름 별장 부분. 시원한 그늘과 분수가 아기자기 한 곳이었다.

위, 3분 드로잉/아래, 5분 드로잉

궁전이 워낙 커서 다 돌아보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각각의 쓰임이나 정원의 가꿈이 매력적이었던 것은 분명했지만 무엇보다 스페인에 남아있는 이슬람 문화가 놀라웠다. 스페인이 아프리카에서 온 이슬람인들의 지배를 받고, 그 이슬람 문화가 이렇게 까지 진하게 남아있는 나라라는 것을 전혀 몰랐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거리가 가까워서 이번 여행에 모로코가 같이 있나 보다 했었는데 모로코에 다녀오고 나서 알함브라하를 떠올리면 이곳의 수많은 패턴과 건축, 공예들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림은 도저히 그릴 수가 없었던 상황, 너무 예뻐 '어머 이곳은 그려야 해'하며 패키지 관광 중인 걸 망각하고 펜을 들었는데 두 세 가닥 그리니까 우리 팀은 이미 저만치에.. 그래서 펜을 들었다가 거의 그냥 놔둔 격이었던 첫 번째 시도에 연이은 두 번째 시도도 마찬가지 상황이 되자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더 이상 시도하지 않았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3분 드로잉 그림을 보는데 뭔가 이번 여행은 전과는 달리 갈수록 '도전! 그림 그리기'가 되는 것 같아 왜 그렇게 애처로운지, 웃음이 났다.

 


#5. 보낸 시간만큼 오래 기억하는 것이 추억이라면


다음날은 절벽 위의 마을 론다로 왔다.

'자유 시간이 너무 부족해요'

이틀 정도의 일정을 지내보며 어떻게든 한 장이라도 그려볼 수 있는 여유를 시시 탐탐 노려왔던 나처럼, 우리 팀 일행들도 모두 자유시간에 목말라 있었다는 것을 론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나만 느낀 게 아니라는 것에 일단 안심, 오늘은 일정이 두 개뿐이라 인솔자는 처음으로 1시간이라는 파격적인 자유시간을 주었다. 사실 자유시간 1시간이 그리 파격적인 시간은 아니지만 그간 전혀 없었던 지라  모두 뛸 듯이 기뻐했고, 각자 뿔뿔이 흩어져 저마다의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가장 여유 있게 그림을 그렸던 론다의 절벽과 누에보 다리

자유시간에 앞서 론다의 곳곳을 둘러보며 짧은 설명을 들을 때, '이 사이 골목길로 쭉 가면 다리 아래로 내려가는 길목도 있어요.'라는 말을 기억해 두었던 터라, 시간이 주어지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더듬더듬 기억하여 찾은 골목길의 끝에 다다르니 정말 절벽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신이 나서 방방 뛰며 내려간다. 얼른 내려가서 그림을 그리고 다시 올라와서 마을도 조금 구경하려면 1시간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다리라는 누에보 다리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바위틈 사이에 자리를 잡고 털썩 주저앉아 폭포 소리를 들으며 그림을 그렸던 이 시간. 기억과 추억이 보낸 시간에 비례되는 것이라면, 스페인 여행을 통틀어 가장 좋았던 시간이 바로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간 억눌려 있던 드로잉 열정이 해소되던 시간이었으며, 고요하고 광활한 이 곳의 풍경을 제약 없이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폭포의 방울방울 물방울과 머리 위로 떼 지어 날아가던 새들과 절벽 사이를 통과하는 바람 소리까지 전부 슬로비디오처럼 펼쳐졌고 눈과 그림에 이를 담았다. 여행 드로잉의 매력을 처음으로 느꼈을 때도 이와 같은 마음이었는데. 이곳에 머문 시간이 좋아서, 그게 흩어지는 게 싫어서 그림으로 담아두려고 했었던 마음. 그 마음으로 시작했던 드로잉이 어쩐지 여행의 목적이 되면서부터는 급급하게 지나온 발자취만을 남기려고 했던 건 아닌가 하는 나름 반성의 시간까지도 이르게 했다.

누에보 다리 오른편의 풍경, 지나왔던 곳을 먼발치에서 그려보는 재미

론다가 절벽 위의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막상 마을 안에서 걸어 다닐 땐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다 절벽 끝에 있는 발코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지대가 상당히 높은 마을이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절벽 옆에 위태롭게 살짝 보이는 발코니가 방금 전에 지나온 곳이었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먼발치에서 아까 내려다보던 발코니를 올려다보며 그림을 그렸다. 누에보 다리를 그리던 자리에서 시선을 오른편으로 돌려 결국 이렇게 두 장을 그리느냐 자유시간을 모두 이 곳에서 보냈다. 시간 내 약속 장소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절벽 위로 올라가 이번에는 다리 위에서 그림을 그렸던 자리를 다시 내려다보면서 지나온 곳곳을 먼발치에서 다시 보는 행동을 반복했다. 다리 위에서 감상했던 노을 지는 햇살이 비칠 때가 거의 환상이었는데 그 색감과 바람이 좋아서 '좋다'라는 말을 스무 번 넘게 한 것 같다.


#6. 그 해, 그 계절을 떠올리게 하는 건 하나의 상징물이다.
현지 가이드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을 때 수신기가 들리는 정도의 위치 한 분수대 앞에 쪼그리고 앉아 몰래 그리다 들켜서  마무리 못하고 이동하게 되었던 장면이 비디오처럼 눈에 훤하다

사실 론다보다 코르도바에 먼저 갔었는데, 코르도바의 메스키다 회교사원이 바로 이곳이다. 스페인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스페인이 오랜 시간 동안 이슬람 문화와 로마 문화의 영향권 내 있었다는 것을 몰랐는데 론다(로마 문화)와 메스키다 회교사원(이슬람 문화)을 보니 어제 그라나다에 이어 그 영향력을 짙게 느낄 수 있었다. 어딜 가나 스페인에서는 이 이슬람 문화의 잔재가 남아 있어서(이슬람 사원 자리에 성당을 짓더라도 바닥을 남겨놓는 등) 스페인은 역사를 잊지 않고 잘 간직하고 있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짧은 자유시간 내 상점에서 뚜론을 사고, 아까 지나치며 그리면 좋을 것 같은 장소로 봐 두었던 곳으로 돌아와 성공한 그림

그리고 스페인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었던 야자수와 오렌지 나무!

이 길에도 오렌지 나무 이 사원에도 오렌지 나무 이 성당에도 오렌지 나무, 어딜 가나 오렌지 나무! 오렌지 나무 천국 스페인이다. 그리고 내내 후식이 오렌지였던 터라 1일 3 오렌지. 작년은 북유럽에서 '자작나무 숲'으로 기억되는 '여름'을 보냈는데, 올해는 서유럽에서 '오렌지 나무'로 기억되는 '겨울'을 보내게 된 셈이다. 그해, 그 계절을 떠올리게 하는 건 결국 하나의 상징물인 것 같다.



#7. 모든 이동 속 모든 에피소드


배 타고 아프리카 모로코 가는 길! 유럽과 지중해로 맞닿아 있는 모로코에 드디어 가게 되었다.

스페인에 있는 내내 햇살에 좋아서 배편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일행들과 사진을 찍으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한쪽 구석으로 이동하여 청명한 하늘과 잔잔한 바다를 잠시 담아 두었다.

항상 어떤 여행에서도 그랬지만, 이번 여행에서도 이 장면을 그리며 그림 그리는 여행자였다는 것을 들키게 된 곳. 그렇게 대기 후 탑승한 배는 순조롭게 모로코 항구에 도착했고, 파도가 이렇게 잔잔해서 아무 배 멀리 없이 평온하게 도착한 것은 엄청난 행운이라는 말을 들었다.

모로코의 거리는 시간을 다소 과거로 돌린 듯 아직은 천천히 흘러가는 곳.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 버스 안에서 동선을 익혔고, 루틴대로 빠른 점심 식사 후에 산책의 시간을 갖기 위해 잠시 나왔다. 가까이에 해변가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빠른 발걸음으로 잠시 해변가에 앉아 휴식을 취했고, 후식으로 들고 나왔던 오렌지를 길고양이에게 조금 양보하며 짧지만 나만의 자유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바쁜 관광, 긴 이동, 그리고 식사. 그 사이에서 순간순간의 사소한 장면에도 의미와 에피소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여행이 주는 매력인 것 같다.


#8. 웃음소리가 물든 다는 것, 멀리 퍼진다는 것.


먼저 언급한 바 있지만 스페인 여행을 통틀어 가장 좋았던 시간은 론다에서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굳이 두 번째, 세 번째를 차례로 묻는다면 내 나름의 좋았던 순간들이 줄줄이 나올 테지만, 이곳에서의 시간을 두 번째로 뽑을 수 있겠다.

모로코에 와서 이곳저곳 짧은 관광들을 계속했고, 이번에는 모로코 왕궁에 들렸다. 가이드를 따라 한 바퀴 둘러보고 나서야 사진을 찍으라며 조금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 시간이 얼마가 되었든, 나에게는 그림 그리는 시간이 된다. 방금 들린 모하메드 5세의 영묘를 그릴까 반대편의 하산 타워를 그릴까 구도를 재보다가, 패턴이 화려하고 강렬했던 영묘가 보이도록 그려야 기억이 더 남을 것 같아 하산 타워 방향으로 걸어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렇게 걸터앉아 그림을 한적하게 그림을 그릴 때만에도 평소와 다를 게 없었는데, 그림을 막 다 그리고 사진을 찍으려고 하던 순간부터 여기에 소풍 나왔던 모로코 어린이 친구들이 갑자기 몰려들기 시작했다. 언어의 장벽도 있었지만 영문도 모르게 순식간에 열댓 명의 아이들에게 둘러 쌓이면서 적지 않게 당황해하던 찰나, 한 친구가 셔터를 누르는 시늉을 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아아, 사진을 찍고 싶었던 거구나 싶었다.

이 자리에서 잠시 셀카도 찍고, 그림 사진도 찍고 하면서 핸드폰에서 나오는 '찰칵찰칵'소리를 듣고 아이들이 몰려온 것 같았다. 알았다며, 사진 찍어주겠다고 핸드폰을 아이들에게 향하자 아이들을 뛸 듯이 기뻐하며 저마다의 포즈를 취했다. 사실, 아직도 왜 그런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이곳의 아이들은 카메라를 생소하고 신기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이곳에서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함께 셀카를 찍거나 아이들만 찍어주면서 찍기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아이들은 계속해서 자꾸 더 찍자고 그래서 이 왁자지껄 까르르 웃던 상황을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더더더 찍자고 하던 친구들을 뒤로하고 시간이 다되어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리둥절 상황 파악을 잘 못했었는데 숙소에 들어가 동영상을 재생해보니 세상 해맑은 아이들의 표정을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아아, 이렇게나 좋아했었구나. 그제야 세어 나오는 웃음. 이 표정을 당시에 눈에 더 담았더라면 더 많은 사진을 찍었을지도 모르는데 아쉽기까지 했다. 그리고 잠깐의 스치는 남이었지만, 즐거운 추억을 주어서 고마웠다. 너희들에게도 즐거운 경험이었길.


#9. 무모하지 않아도 괜찮아.

스페인보다 시설이 좋았던 사실은 모로코 호텔. 묵었던 숙소 중에 가장 따뜻하고 포근했다. 심지어 모로코 방송채널 중 하나가 한국 음악방송을 송출하고 있어 반가운 마음에 틀어놓고 넋 놓고 감상했었고 그 외에도 한국의 의 드라마, 예능, 뷰티, 시상식까지 다 방송하길래 이게 무슨 일인가 싶기도 했다.

이렇게 여행 중 숙소에 일찍 들어왔는데도, 아싸 자유시간이다 라며 밖에 나가지 않았던 건, 가이드가 이 숙소 부근이 굉장히 위험한 지역이고 특히 여성이 혼자 밖에 돌아다니는 분위기가 절대 아니니 구경한다고 밖에 나가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다지 말을 잘 듣는 성격은 아니기에 숙소로 가는 버스 안에서 당연하듯 주변 동선을 파악했던 것도 사실이나 나의 판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곳에서는 나가지 않는 게 좋겠다. 무모하지 않아도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 오랜만에 숙소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휴식을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이 심심하였기에 숙소 안의 풍경과, 숙소 안에 걸려 있었던 한낮의 카사블랑카의 여유로운 하얀 벽돌집 그림도 따라 그려보았다.   

카사블랑카의 낭만적인 하얀 벽돌집

이 곳으로 이동하면서 버스에서 영화 '카사블랑카'를 틀어주었고 As time goes by 노래를 품고 있는 영화는 이 도시를 위험하면서도 낭만적인 곳으로 그려내고 있었기에 은근 이곳의 관광도 기대했었는데, 숙소에만 머물고 끝나버린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도 괜찮다, 가끔은 이렇게 보내는 것도.



#10.   '장소'라고 말하지만 그 안엔 늘 '사람'이었네

다음날, 해가 뜨기도 전에 하산 모스크에 들렸다.

불 꺼지고 내부도 못 들어가는 이 장소에 내려놓고 자, 관광 다 했죠 라는 태도에 슬슬 모두가 다 불만이었지만 그 와중에 다들 포토타임은 빠질 수 없었고, 그 사이 나는 언제나 그렇듯 구석에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렸다. 음, 모두들 저만치 까지 갔다가 돌아오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군, 여유롭게 그릴 수 있겠어, 라는 사소한 잡념도 그림 속에는 늘 함께 남아있는 것 같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지나가던 청년인지 아저씨인지 모를 남성이 느닷없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상황도 같았다. 그림을 다 그리고 사진을 찍고 있는데, 갑자기 스윽 다가오더니 또 셔터 누르는 손 모양을 하는 것이다. 어제, 이곳은 여성 치안이 상당히 좋지 않은 곳이라는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기에 상당히 긴장했었지만 또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무슨 의도인지 의아해하며 핸드폰 카메라를 켰다. 그랬더니 같이 찍자는 식으로 옆으로 다가와 포즈를 취하길래 얼떨결에 셀카 모드로 같이 사진을 찍었다. 왜.. 왜지, 어제 아이들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뭐 때문에 사진 찍는걸 이렇게 좋아하는 거죠. 사진을 한 장 찍은 그는 만족해하며 다시 가던 길을 걸어가서 더욱더 의아해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오늘의 주 관광지인 페스로 이동하면서 들린 휴게소. 왠지 꼭두새벽부터 관광 일정을 진행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오늘도 관광하느냐 그림은 전혀 못 그릴 것 같아서 휴게소에서 잠시 그림을 그려보았다. 드로잉 갈증이 점점 시해지는 타이밍, 화장실을 이용하고 겨우 식수대를 그렸을 무렵 또 이동하자고 해서 재빠르게 마무리하면서 자리를 이동했던 기억이 있다.  

이 평범한 휴게실 그림 속에는 모로코에서의 화장실의 기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모로코에서 들렸던 화장실은 어느 유럽 화장실과 마찬가지로 유료였는데, 동전 기계를 넣던 유럽과 달리 사람들이 화장실 앞에 앉아 있어 그분들이 직접 동전을 받는다. 그렇게 이용하게 되는 화장실은 휴지 없음, 변기커버 없음은 물론 볼일 후 물도 내려가지 않는 쓰리 캄보를 자랑하였고, 그나마 몇몇 곳은 물을 양동이로 퍼서 수동으로 내리기도 했다.

예상대로 페스에서의 일정은 빠듯했다. 길을 잃기 쉬운 미로 같은 골목 메디나를 걸어 다니면서 주변 상권을 구경했었는데, 행여라도 꼬리를 놓쳐 길을 잃을까 계속 노심초사했다. 그럼에도 좁은 골목길 사이사이 예술가들이 살고 있는 듯 수공예품이 너무나 멋진 곳이었고, 그 좁은 길을 당나귀와 리어카를 끌고 다니던 상인들의 모습이 기억 남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잊을 수 없었던 것은 가죽 염색장의 냄새. 입장 전 지독한 냄새를 중화시키라며 허브 잎줄기를 하나 주는데 내내 코에 가까이 가져다 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잠시 쇼핑을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제야 잠시 구경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미로 같은 골목길 어귀에서 연주하며 노래 부르던 사람들과, 각종 수공예품, 그리고 길고양이까지.

오늘 그린 그림들은 한 장 한 장 이 고에서 스쳐 지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도 함께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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