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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 A MI Sep 16. 2020

Travel Sketch (North Europe)

패키지로 떠난 여행 드로잉 - ep#21.~ #30.


     #21.   누군가의 감정을 알고 싶거든 뒷모습을 보는 것이 좋겠다.


동화나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동상이라니. 그런데 그게 또 관광명소라니. 어차피 상상 속의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 별 다른 감흥 없이 다가갔지만, 몰려든 관광객 사이에서 나도 모르게 들뜨고 만다. 열심히 인증 샷을 찍어대다가 돌아섰다. 관광 패키지에 충실한 발걸음이었다. 나 여기, 와봤다로 끝나는 장소.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코펜하겐  운하를 도는 투어 중 다시 인어공주를 만났을 때의 느낌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운하 쪽에서 인어공주 동상으로 다가가면서 현지 가이드가 설명해주던 말이 인상 깊었다.


“여러분이 알던 인어공주의 모습과는 조금 다를 겁니다. 어떤 모습이 다른지 잘, 보세요.”



2017.08.11 in Denmark

“그녀의 뒷모습은 여러분이 알던 인어공주와는 또 다른 느낌이죠?”


배를 타고 인어공주 동상에 가까이 접근하며 바라보았던 뒷모습은, 그저 상상 속의 존재에서 벗어나, 그저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뒷모습의 굴곡은 여과 없이 감정의 굴곡을 표출하고 만다.

그리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나의 감정 또한 고스란히 투영되고 있으니, 그렇구나, 표정을 숨기려는 누군가의 감정을 알고 싶거든 그 뒷모습을 보는 것이 좋겠다. 


     #22.  작게 흩어진 것들에 대하여.


스톡홀름을 지나가는 주변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배를 타고 두 시간 정도 이어지는 장관을 연출한다. 

그 작은 섬들마다 별장들이 지어져 있고, 섬들마다의 세계를 꾸리고 사는 것처럼 보였다. 

작은 하나의 세계들.

작게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도 그렇게 저마다의 세계를 가지고 흩어져 있는 것일까.

2017.08.12 in Stockholm

기억의 조각들을 굳이 한 곳으로 끌어 모아 어떤 하나의 감정상태로 기억하려 했었는데, 아름다웠다가 아름답지 못했던 그 기억들을 모으는 건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버려 두기엔 일상 속에서 툭툭 튀어나와 감상에 젖거나 아파하게 만들어서 ‘그 시절’이라는 이름으로 굳이 묶어두려 해왔던 것이다. 

둥둥 떠 있는 섬, 그곳의 별장들, 그렇게 저마다의 세계를 누리는 사람들. 

이런 장면을 보며 그간의 고민에 대한 실마리가 풀릴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이런 점이 또 여행의 묘미일지도 모르겠다. 



     #23. 일탈 속에서도 일탈을 꿈꾼다.


여러 다른 나라의 시청사와 달리 유료 관람이었던 스톡홀름 시청사는, 실물로 봤을 때의 감흥보다 후에 느낀 감상이 더 아련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점심식사를 빨리 마치고 또 재빠르게 나와 주변을 산책하면서 이끌리듯 한 고서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고서점은 세련되면서도 괴짜스러운 면이 있었고, 그러면서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갖고 있는 묘한 공간이었다.

어쩌면 이 여행 자체가 일탈임에도 불구하고 그 일탈 속에서 또 일탈을 행했던 '나만의 고서점 탐방'은 이번 스톡홀름 여행 중에 가장 생각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디자인된 시청사 엽서와 수첩들을 보면서 이 곳 사람들이 얼마나 이 시청사를 아끼고 있는지 엿 본 기분이 들었다. 시청사에 들렸을 때 내부 관람보다 차라리 바깥에서 한가로이 앉아 주변 환경을 더 보는 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그제야 들었던 것이다.

2017.08.12 in Stockholm

 이 곳 사람들이 이 곳의 장소를 생각하는 마음을 엿보았던 일탈의 시간을 생각하면, 실제 그 장소에 있었던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이 머물러 면밀히 그 장소를 관광했던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24.  기대하는 것들을 보고 싶고, 기대받는 것들을 보여주고 싶다.


낯선 외국인들이 뒤섞인 광장 한복판, 그곳이라면 사람들 사이에 섞여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여러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것만큼의 여행의 기분을 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광장에서의 자유시간이 주어지면 어김없이 한쪽 의자에 자리 잡고 앉아 시간을 보냈다. 중간쯤 그렸을 때 말을 걸어준 덕에 뒤에서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시점부터는 다소 긴장돼서 평소처럼 그리지는 못했던 것 같다.

'마무리가 좀..'

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 뭔가 긴장돼서요 라는 말은 변명인 것 같아서 하지 않았다. 

2017.08.12 in Gamla Stan

지켜본다는 게 그런 것 같다. 일정치의 기대치가 있기 마련이다. 

지켜볼 때의 입장도, 그 반대의 입장도 '기대치를 두고 지켜봤다'는 전제 때문에 그 기대에 충족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그것은 타인에 의할 때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 도 마찬가지이다. 그 기준치를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 ‘실망’이라는 감정과 함께 비난이나 '자기반성'이라는 다음 행보로 이어진다. 자기반성이라는 행보로 이어져 '동기부여'가 되기도 하고 '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도 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만약 실망 다음이 비하나 절망으로 가버리면 움직임을 멈춰버리기 때문에 기대라는 것은 대체로 두려운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실망할지언정 결국 (성장)을 기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대에 실망하더라도 (성장)의 밑거름이 되는 쪽으로 움직이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나 자신에게 향하던 타인에게 향하던, 기대하는 것들을 보고 싶고, 기대받는 것들을 보여주고 싶다.



     #25.  처음부터 잘 못 본 것이라면.


리가와 탈린에서 각각 성당을 한 장씩 그렸는데 모두 아래부터 그리다 가장 위 쪽 첨탑 부분을 구도상 잘려버리게 그리고 말았다. 리가에서 그릴 때만 해도 '아차, 실수했다' 싶었지만 똑같은 실수를 탈린에서 저지르자, 실수가 아니라 처음부터 구도를 잘못 계산하거나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거였구나 하며 '잘못을 인정'하게 되었다. 

2017.08.13 in Riga

누구에게 보여주거나 책임을 물을 일도 아닌데 스스로에게 습관적으로 변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실수야, 라던가 종이가 작았어, 상황이 그랬어 라면서 말이다. 

처음부터 잘못 본 거였어, 라는 말이 왜 처음부터 나오지 못했는지. 

이러한 습관이 과연 나의 변호에 도움이 되고 있는지, 그런 잡다한 생각들로 이어졌다. 

어쩌면 관계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고. 

상황에 변하거나 몇 번의 실수들로 틀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서로 처음부터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서로를 알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Ignoramus et ignorabimus 이그노라무스 에트 이그노라비 무스

'우리는 모르고 모를 것이다.'


제 각각의 크기의 십자가들, 엄청난 양의 염원의 언덕

그 어딘가 사이에 놓아둔 내 소원은 늘 같아서 1유로짜리 십자가에 어떤 말을 적었을지 기록하지 않아도 뻔하다.


더, 알고 싶어요. 세상을, 그리고 나 자신을,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26.  나만의 프레임을 선택하는 데는 그만한 그 이유가 있다. 


그림을 그릴 때, 제일 중요한 것은 그만한 자유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 

두 번째로는 그 자유시간을 다 써버려도 아깝지 않을 만큼 눈에 들어온 장면이라던가 의미가 있는 곳일 것. 

세 번째로는 그릴 만한 (시간 내 해낼 수 있는 묘사량을 갖출 것) 곳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오가는 사람이 적어야 하고, 근처에 편하게 앉아서 그릴 수 있을 만한 장소여야 한다는 것들이 나만의 그림을 그리는 장소 선택의 조건이다. 꼭 여행 드로잉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이다. 

2017.08.14 in Tallinn

하루의 대표로 기억될만한 장소를 선택하는 데는, 그 장소에서 내가 그릴만한 곳으로 선별되는 프레임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래야 그 장소를 온전히 다 담아내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나는 그림만으로 그 시간에의 온도, 햇빛, 소음, 감정, 자세 중 어떤 점이라도 함께 떠올릴 수 있게 된다. 때문에 나는 이 그림 속 건축양식이 제 각각이라는 것과, 그림을 그릴 때 휠체어를 타고 간 사람이 지나가도록 자리를 내어준 것과 내 앞에 주차한 사람이 얼른 지나가길 바랬던 그 사소함 까지도 기억해 낼 수 있게 된다. 



     #27.   말해주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 더 많다.


패키지여행의 장점은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미술관에서 그림에 대한 해설을 듣는 것처럼 장소에서 역사부터 그 지역 사람들이 그 장소에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주변에 살만한 것들은 무엇이 있고, 어떤 것들이 눈 여겨 볼만한 지 등 이것저것을 들으며 도시를 누린다. 

2017.08.14 in Tallinn

알지 못했다면 그저 풍경이 되어 스쳐 지나갔을 것들, 말해주지 않으면 놓치게 될 장면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던 탈린의 골목골목들.


     #28.  우리 여기에서 저기만큼 함께 걸어볼까요.


‘우리 저만치 걸어갔다 올 건데.. 같이 갈래?’


라는 말로 시작했던 함께 하기 시작했던 산책의 시간이 여행 내내 몇 번 있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세는 것을 멈췄다. 그만큼 잦았던 한 일행과의 산책.

그렇게 이번 여행에서 산책을 좋아하던 한 부부 일행과 몇 번이고 함께 산책을 했지만, 이 곳에서 걸었던 두 시간의 길목이 가장 좋았다. 걷는 보폭도 제 각각이고 생각도 다르며 풍경을 보는 감상법도 달랐다. 그럼에도 함께 그 순간을 누린다는 것은, 그 다름을 한 발자국씩 물러서고 맞춰가며 걷기 때문이 아닐까. 따뜻했던 순간순간들.

2017.08.15 in Sankt Peterburg


‘우리 저만치 걸어갔다 올 건데.. 같이 갈래?’


혼자, 앉아서 그림을 그리곤 했던 내 어깨를 살짝 치며 건네주셨던 따뜻한 말.

그 산책이 주는 고요한 시간이 모두 좋았던 건 결국, ‘함께’ 걸었기 때문이구나. 



     #29.  더 오래 눈길이 가는 것은 따로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여름궁전과 겨울궁전 모두 둘러볼 수 있었다. 

여름 궁전에서에서도 나는 산책을 좋아하는 부부와 함께 천천히 정원을 누렸고, 11시에 대형 분수쇼를 관람한 후에야 펜을 꺼내 들었다. 

정원은 화려한 분수대를 중심으로 대칭 구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 한쪽 편에 단출하게 솟아있는 분수가 보다 눈길을 끌어 던 건 아마도 오가는 사람을 훨씬 더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넓고 정갈한 미로 같은 길목에 한 사람이 분수대로 향하면 왜인지 모르게 그의 행보를 끝까지 눈으로 좇게 된다. 그 동선을 쫓아가는 시선이 즐거웠던 모양이다. 

풍경은 그대로여서 좋지만, 그 풍경 속에는 항상 사람이 있고, 각자의 동선이 있고, 각자의 시선이 있다. 

나의 시선이 쫓는 곳에 타인의 시선이 있고, 타인의 시선 끝에는 또 다른 것이 놓여있다. 

이야기는 그렇게 끊임없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2017.08.15 in Sankt Peterburg

화려하다고 무조건 눈길이 가는 것은 아니다. 

작고 무던하다고 해서 무조건 눈에 띄지 않는 것도 아니다. 

걸음의 속도, 그날의 감정, 그동안의 경험, 저마다의 이유로 시선을 이끌고 사로잡는다.

더 오래 눈길이 머물다 간 장소들은 그래서 저마다 다르다.


그가 놓친 것을 나는 열심히 보았다. 내가 놓친 것을 그는 유심히 보았다. 

그거 봤어?

아니

이거는 봤어?

아니, 그런 게 있었어..?

같은 곳에 있었는데도 때때로 이런 대화가 오고 가는 건 신기한 일이자 즐거운 경험이다. 



     #30.  그땐 몰랐고, 돌이켜보니 좋았던 순간들


여행을 떠나기 전 들었던 의구심과 걱정은 이제 남겨두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여행을 다녀온 후에 남는 것들을 생각해야 했다. 

경유 대기 중에 동그라미 무늬의 창가를 보며 방울방울 남겨진 추억을 정리했다. 정해진 몇 개의 칸 속에 채워 넣을 추억을 선별하면서, 추억은 이렇게 선택되는 것인지, 아니면 불가항력적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그 순간에는 그 가치를 모르지만, 시간이 지니고 한걸음 물러나 돌이켜보면 다시 보이는 장면과 감정이 있다. 

2017.08.16 in Tashkent

돌이켜보니 좋았던 순간들. 

머릿속에서 둥실 떠다니는 기억들을 글과 그림으로 잡아두자, 그 가치를 보다 분명히 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또다시 기억이 흐려지면 그때 다시 이 페이지를 넘겨보며 웃을 수 있도록.  



every ep #. 1 -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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