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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 A MI Sep 04. 2020

Travel Sketch (North Europe)

패키지로 떠난 여행 드로잉 - ep#11.~ #20.



     #11.  항상 갖지 못한 것을 그리워한다.


여행지를 선택할 때의 첫 번째 조건, 그것은 '계절'이다. 

주로 내가 있는 곳과 '반대의 계절'을 갖고 있는 여행지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계절은 여행지에서의 옷의 두께를 결정하고, 옷의 두께는 여행 가방의 크기와 무게를 결정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여서, 한여름에 두꺼운 옷들을 여행 가방에 챙기는 행위 자체가 여행이 주는 하나의  즐거움이라 생각했다. 

오다 지역의 지대 높은 산장에서 처음으로 두꺼운 옷을 꺼내어 주변을 산책했다. 

찬 공기에 입김을 내뿜으며, 여기엔 없는 한국의 한 여름을 그리워했다.

'으, 입김 나오는 거 봐. 춥다. 거기는 따뜻하겠지?'

어느새, 한국에서의 무더움이 따뜻함으로 바뀌어 내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2017.08.07 in Norway Otta

조금만 멀리 떨어져도 누리고 있던 것들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쉽게 바뀌는 것을.

항상 갖지 못한 것들을 그리워하는 건, 

현재의 소중함을 모르는 못난 본성인 걸까, 고쳐야 하는 나쁜 속성인 걸까.



     #12.  누구나 다 사연은 있다.


여행에서 '운전자'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한 거였구나 하는 것을 깨달은 여행이었다. 

여행사 버스 경험도 없었고, 영어도 못했던, 운전기사 리처드. 그는 모든 게 처음이었던 지라 융통성도 일말의 요령도 없었다. 시간에 쫓기는 인솔자는 일정을 소화하지 못해 우리의 여행을 망치게 될까 여행 내내 리차드에게 화를 냈다. 그리고 일부 일행들은 화만 내는 인솔자를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의 목적은 다 같았는데, 표현방식은 제 각각이라 이해관계가 상충되고 만 것이다. 

누군가를 위한다는 말은 방식의 차이로 때론 오해를 낳고 만다. 

이 그림을 보면, 교회 안으로 한발 자국 들어가자마자 펼쳐졌던 풍경이 공동묘지여서 놀랐던 것보다, 교회 옆 주유소에서 말도 없이 계획에 없던 기름을 넣던 리차드로 인해 오해가 폭발했던 그때의 그 장면이 생각난다. 

2017.08.08  in Lom Stavkyrkje

오 마이 갓 리차드, 난 처음이라 잘 모른다고, 화내지 마요 인솔자님, 다 이유가 있어요 손님들..



     #13.  앞으로 가야 할 길이 굽이 굽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산 정상에 올랐을 때 제일 먼저 들었던 말은 앞으로 가야 할 길목에 대한 안내였다. 

지금은 반대쪽에서 올라왔고요, 내려갈 때는 이쪽 아래 길로 내려가서, 저기 지그재그 길목 보이시죠, 그곳을 지나 저쪽 반대편으로 갈 겁니다.  

정상에서, 이곳에서 만끽하게 되는 기쁨보다 앞으로 가야 하는 길에 대한 설명을 듣는 기분은 묘했다. 


일에서의 목표든 길목에서의 목적지든, 항상 어딘가의 끝을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끝이라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다음 길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도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쉽지 않다고 한다. 이를 알았다고 해서 가지 않을 수 없는 길. 

나는 그 기묘한 감정을 품고 정상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2017.08.08 in Geirangger Fjord

'위험해요'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바위에 걸터앉아,

‘아름답다’는 말 이외에 참으로 많은 수식어가 붙게 되었던 찰나의 감정들을 포함하여. 

  


     #14.  유난히 좋아하는 것들은 이유가 없다.


피요르 지역은 광활한 장면들에 압도당하는 경관을 연출한다. 

피요르 지역을 관통하는 페리를 타고서 이동할 때 타임 슬랩으로 빠르게 스치는 장면들을 찍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한 페이지를 다 채우는데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지만, 매서운 칼바람에 두 손을 들고 다시 실내로 들어갔다. 


유난히 이 배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좋았다. 

2017.08.08 in Geirangger Fjord

이 한 컷에는 여러 가지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만 모아두었다. 

나는 현장에 앉아 정말 빠르게 스케치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나는 광활 환 산도, 탁 트인 호수도, 배를 타는 것도 모두 좋아한다. 

푸르른 한 여름의 경치보다 새하얀 눈 쌓인 경관을 좋아하고, 또 여행지마다 장소와 함께 신발을 함께 찍어 ‘내가 여기 왔노라!’하는 허세 사진을 찍는 것도 좋아한다. 

이렇게 유난히 좋아하는 것들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15.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바쁘다 바쁘다 하지만,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결국 네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야.”


 TV를 보다가 한 패널이 한 말이었는데 내가 가장 공감하고 좋아하는 말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취미생활에 가장 열을 올리고 있었고, 여행에서도 관광명소를 찾아가는 것에 대한  열망보다 그곳 어딘가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삼고 있었다.


노르웨이에서의 가장 마지막 일정, 그 때문인지 베르겐에서 자유여행을 온 것만큼의 긴 시간이 주어졌다. 사람들은 제각각 어시장에서의 쇼핑, 골목골목의 상점 구경, 음식점에서의 디저트 먹기 등 자신이 여행에서 가장 선호하는 일을 했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길 한복판에서, 길목의 끝에서, 그렇게 그림을 한 장씩 그려나갔다. 

2017.08.09 in Bergen

자유여행에서도 항상 동네가 훤히 보이는 카페에서 오래도록 앉아있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하며 시간을 보낸다. 시간과 돈을 들여 여유를 사고, 그곳에서의 시간을 드로잉으로 잡아두는 것을 가장 중요시 여기고 있는 사람이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가장 열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동적인 순간을 평면에 담아 스케치북에서 영상처럼 움직이는 짧은 썸네일들을 담아 두는 것?

아니면, 전혀 반대쪽에서의 풍경을 담기 위해 먼저 오래도록 관찰하는 것?

아니면 그저, 낯선 곳에서 낯선 풍경을 그리고 있다는 그 행위 자체? 

어떤 것이든, 여행지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는 나는 이제 상상할 수 없게 되어 버렸으니, 상상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해야겠다.



     #16.  찰나의 생각이 영원히 남을 때가 있다.


베르겐의 브뤼겐 거리의 가장 끝까지 걸어가면, 베르겐 후스 요새가 나온다. 

요새까지 걸어가는 관광객은 그리 많지는 않아서 이곳은 복잡하던 브뤼겐 거리와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림은 바로 정면에 보이는 의자에 앉아서 그렸는데, 정면 의자에 앉아 있는 가족들을 그림 속에 담으면서 '이제 저 가족들은 내 그림 속에서 평생 머무르겠군', 하는 시시한 생각을 잠시 했었다. 

2017.08.09 in Bergen

그런데 그 잠시 머물렀던 그 시시한 생각 그대로, 그림 속 세 명의 사람들과 함께 정말로 평생 남게 되었다.

오랜 고민이나 오랜 대화를 나누면서 들였던 시간들은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오랜 시간 동안 어떤 대화와 생각이 오갔는지 흐려지기 마련인데, 가끔씩은 이렇게 순간적인 찰나의 생각이 영원히 남을 때가 있다.

묘사하지 않은 그들의 동작과 표정은, 떠올려 볼 때 마다 바뀌겠지만, 이 시간의 이 사건만은 영원히.


     #17.  당연한 것이 되는 것들에 대하여.


베르겐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에서의 시간, 여기서 한적함으로는 최고조의 시간을 보낸다. 

전망대나 산 정상에서 보내는 시간을 원래 좋아하기 때문에, 그저 오르고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편이다. 정상까지 인솔해주었던 인솔자가 그저 멍하니 앉아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여기서도 그림 그릴 거죠?’


라고 당연한 듯 얘기하는 바람에 전혀 그릴 생각이 없었는데도 ‘그.. 그려야 하나?’라는 의무감이 생기더니 어느새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느새 당연한 것이 되는 것들에 대하여.


습관과 같은 행동들도, 항상 그곳에 있는 물건이나 사람들도, 누군가가 대해주는 일정한 대우나 배려도. 그 모든 것들에 대하여. 때문에 이 전망대에서의 1시간 30분의 시간은 잊지 못한다. 

윗옷을 벗고 일광욕하던 사내도, 마녀 주의라는 푯말도, 산책하며 만났던 산양 떼들도, 한가로이 음악을 들으며 발아래로 펼쳐진 경관을 보던 시간도, 모두 다. 

2017.08.09 in Bergen

이 넓은 장소와 많은 것들을 어떻게 다 그리지?

아니다, 다 그릴 필요가 없구나.

내가 추억할 수 있는 곳들만 그리면 되겠다.

그러면 풍경은 어느새, 나의 추억 지도가 되겠지. 



     #18.  시간이 지나면 무엇이든 요령이 생기기 마련이다.


패키지여행을 자주 이용하는 자로써, 버스로 이동할 때도 놓치지 않고 주변을 살피어 위치를 파악하고, 대기시간이 생기면 바로 펜을 들고, 식사를 하기 위해 도착한 장소에서의 식사 전과 후의 시간을 아주 잘 활용하는 편이다. 요령이 생긴 것이다. 주변 파악과 시간 확보가 끝나면, 이미 눈여겨봐 두었던 곳에서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린다. 

물론 그림만 그리며 모든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순간에는 ‘이때 그림 그려야 할 걸’이라는 듯 자유시간이 충분히 주어져도 주변을 관광하는데 오롯이 모든 시간을 다 쏟을 때도 있다. 명소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옆 길로도 잘 세고, 스치듯 지나갔던 장소에 돌아가 다시 자세히 살펴보기도 하고, 멀리 두고 사진도 찍고, 노곤노곤 햇빛을 쬐며 나름의 시간들을 보낸다. 

이곳에서도 그러했다. 

생각해보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주변 산책을 끝마치고 시청사 건물의 작은 조각까지 면밀히 살펴보고 앞 분수에서 사진도 찍고 계단을 오르락 내라며 관광객이 관광객을 구경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항상 사진을 보면, 이곳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세세히 기억나는 점이 신기하면서도 바로 그 점이 단지 사진으로 명소를 접하는 것과 직접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저 기둥, 저 분수, 저 계단, 저 건물 뒷 벽에서 나의 모습을 함께 남기고 왔다.



     #19.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고 해서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칼 요한 거리는 중앙역에서 노르웨이 왕궁까지 이어지는 긴 길목을 얘기한다.  

2017.08.10 in Oslo

유럽에서 가장 단출한 왕궁이라는 노르웨이 왕궁 쪽으로 걸어가 가히 왕궁만으로도 어떤 성격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노르웨이의 심플함에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뒤를 돌아보니 한 화가의 그림을 통해 상상만 하던 칼 요한 거리가 쭉 이어졌다. 일직선상의 그 거리에는 양 옆으로 주요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이곳까지 올 때도 볼 수 있었던 길목마다의 가로수와 형형색색의 꽃밭, 그 길의 끝에 중앙 역이 보였다. 


“전혀 다른데”라는 말을 내뱉은 뒤에, “너무 좋다”라는 감상이 나왔다.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고 해서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든 풍경이든 모든 기대치가 있고 나름의 기준이 있었겠지만, 꼭 그것과 맞아떨어져야 만족감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의외’라는 말은 그렇게 늘 경험의 중요성과 사고의 폭을 넓혀준다. 

2017.08.10 in Oslo

상상만 했던 칼 요한 거리에서, 이제 상상의 날개를 접고 실제의 생동감 넘치는 경험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경험에는 시끄러움, 깨끗함, 활기찬, 밝은, 등의 다른 수식어들을 동반한다. 물론 이 또한 여름의 칼 요한 거리로만 남아 있어 아직 겨울의 칼 요한 거리는 상상의 날개를 접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내내 관광만 즐기느냐 한 그림도 그리지 못했던 구스타프 비겔란 공원은 눈에 담았던 장면들을 숙소에서 정리하게 되었다. 정리의 개념으로 더듬더듬 오늘의 주요 장면만 다시 꺼내어 남겨둔 것뿐이었는데 꼭 현장에서 그리지 않더라도 생생하게 오랜 기억으로 남게 될 수 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역시 드로잉 습관으로 단련된 관찰자적 시선과 관련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20.  무리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무리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먼저 나의 무리가 누군지 알아야 하고,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들과 너무 멀어져서도 안되며, 그들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무조건 그 일을 고집하진 않는다.

주저 없이 내가 하고 싶은 행동을 개시한다 해도 미련 없이 내가 하고 싶은 행동을 중단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일상에서는 이런 것들을 생각지 못하고 ‘내 상황’과‘조금만 더’라는 말을 앞세우곤 했는데, 여행에서는 무리에서 길을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다. 


2017.08.11 in Denmark

15분 정도 주변을 둘러보고 오라는 말에 또 주저 없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귀에는 인솔자의 설명을 전해주는 이어폰을 끼고, 눈으로는 왕실과 무리를 번갈아  바라보며, 손으로는 바쁘게 그림을 그렸다. 

뭔가, 오늘은 일정 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다급함이 서려있었기에.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사정일 뿐. 무리들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직 절반도 그리지 않았는데 시야에 들어오는 거리에 있던 인솔자의 손짓에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달려갔다. 

이 여행에서는 무리에서 길을 잃지 않는 것이 첫 번째로 중요한 사항이기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무엇을 가장 열망하는가.


이번 여행은 이 두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every ep #. 1 -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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