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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 A MI Sep 01. 2020

Travel Sketch (North Europe)

패키지로 떠난 여행 드로잉 - ep#1.~ #10.


     #1.   일탈은, 하지 않았던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다.


긴  여행을 위해 ‘책’ 한 권과 ‘노트’한 권을 어김없이 챙겼고,

비행기를 타기 전 카페에서 시간을 때우며 생각했다.


‘이번엔 그림을 많이 그려야지’


이번 여행은 여행지에 대한 기대나 장면보다,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모습을 먼저 떠올리고 있었다.

2017.08.04 in Incheon Airport


나의 여행을 도피라고 말해도 좋고, 일탈이라고 말해도 좋다.

일정을 정리하는 그림, 시간을 때우는 낙서, 현장에서의 어반 스케치, 그 어떤 형태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좋아하는 것들을 실컷 해야지.

2017.08.04 in Incheon Airport

언젠가 이 그림을 다시 펼쳐보면, 그림 그릴 때와 같은 마음을 고스란히 전달해 줄 수도 있겠고, 아마도 이러지 않았을까 하며 추측하게 만들 수도 있겠지. 지난 추억을 얼마만큼 어떤 무게로 가지고 있을지는 정말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아는 거니까.

그렇다면 그러한 '사소함'들을 남겨 놔야겠다.

이 사소함들이 후에 미루어 짐작하리라. 혹은 그 시간으로 다시 데려다 놓으리라.

2017.08.04 in Incheon Airport


     #2.   드로잉북이 있다면 대기시간이 지루하지만은 않다.


아닌척해도 사실 이륙할 때마다 들뜬다.

여전히 비행기 아래에 낮게 깔리는 구름을 좋아하고, 수평선에 설렌다.

석양이라면 더더욱 좋겠다.

평소 접하지 못할 식사라, 배고프지 않아도 '사육'이라고 말하는 기내식을 꼬박꼬박 챙겨 먹는다.

대기시간이 길어도 펜과 종이만 있다면 이제 더 이상 지루하지만은 않다.

그리고 비행시간이 기니 그림도 많이 그리겠군! 하며 큰소리치다가도 이내 대부분 시간에 잠이 들어 흘려보낸다는 것도 알고 있다.

2017.08.04 in airplane

환승 대기시간도, 기다리거나 낭비하게 되는 시간이 아니라 여행 중 하나의 시간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때문에 어디에 놓이든 주변을 관찰을 좋아하게 되었고, 가끔씩 이를 기록하기도 하며 시간 앞에서 유연해졌다. 잊고 있던 순간이라도 장소와 함께 남겨진 기억은 장소에 다시 놓였을 때 거짓말처럼 다시 떠오른다.

전체 재생이 아닐지언정 순간의 장면들은 허공을 떠돈다는 것을 알았다.

2017.08.04 in Tashkent

두 번째 우즈베키스탄 항공사, 두 번째 타슈켄트 공항.

나는 떠오르는 기억을 더듬으며 추억에 젖다가, 결국 지금을 본다.

그렇게 지금과 과거를 아우른 드로잉을 남겼다.

그때 거기, 지금 여기, 그리고 다시 그때 거기가 될 모든 시간.


     #3.   결국엔 머물러 있는 것에 안정감을 느낀다.


비행기가 향하는 방향이 계속 해가 떠 있는 지역이라 지치지도 않고 하루 꼬박 해가 떠있는 모습을 보며 이동했다. 피곤했지만 모스크바에서 첫 숙소에 도착하자 씻고 자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머무르게 된 이곳을 천천히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꾸벅꾸벅 졸면서도 애매하게 남아있던 종이의 빈칸을 채웠다.

도착한 이 순간의 감정을 남기고 싶어서.

2017.08.04 in Moscow

숙소에 앉아 있으니, 버스나 비행기 안보다 안정감을 느낀다.

내 발로 딛고 이곳에 스스로 서 있는다는 것에 대한 안정감.

고단함 속에 안도감이 더해지니 이곳이 처음 오는 곳이라는 낯선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4.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부터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부터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성향이, 나의 방향성을, 나의 행동을 결정한다.


난 어떤 사람이야, 라는 한 가지 정해둔 신념을 고집했을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수정하며 변해왔을 수도 있다.

난 무엇을 좋아해, 라는 그 확고한 취향을 알고 이를 반복하는 횟수를 늘여나갔을 수도 있고, 다소 의문형인 취향을 들고 이것저것 시도해 왔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자신이 좋아해 왔던 것의 역사를 알면 자신이 누군지 알 수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그 순간을 알면 자신에게 더 충실할 수 있다.


2017.08.05 in Moscow

첫 관광지,

짧게 사진 찍을 시간 정도의 자유 시간만 주어져 그림 그릴 시간은 턱없이 모자랐다. 그래도 그려보겠다고 잠깐 시도해보았지만 얼른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뒤쫓아가느냐 그림이 정갈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웠다. 그러다 다음 이동을 위해 들린 기차역에서의 대기시간이 한없이 길어졌고, 이 시간 역시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나는 아까 제대로 그리지 못했던 그림을 다시 한번 그려보고 싶어 졌다. 그런데 막상 시간을 두어 정갈한 그림을 그려보려 하자 문득, "제대로 다시 그린다니?"라는 자신이 했던 말에 의문을 갖게 된다.

뭔가, 이건 아니야. 이건 내가 원하던 게  아니었어, 라는 것을 깨들은 듯한 느낌.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 내가 그린 그림이기에 의미가 있다고. 늘 그렇게 말했으면서 정작 마음은 그러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잘 그려서 어디에 보여줄 것도 아니고 팔 것도 아니면서 무슨 잘이더냐.

난 정갈하고 예쁘게 그려낸 그림이 아니라 '그곳'에 있었던 '순간'이 좋아서 단지 잠시 남겨보는,

'그곳'에서 직접 그린 그림이 좋아, 그 마음으로 그림 그리는 것을 시작했었잖아, 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웃음이 났다. 5분 만에 그렸던 내 엉망진창 드로잉이 더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맞다 맞아,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여행 드로잉이자, 가장 좋아하는 행위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그려보겠다고 끄적이던 그림에서 손을 뗀다.

이제부터 나는 슥슥, 순간의 감정만을 남기자. 순간의 그림을 그리자.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외쳐보았다.



     #5.   실제와 상상은 다르다.


‘실물로 본 바실리카 대성당. ‘

그것만으로도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충분했다. 너무나 보고 싶은 장면이었고 이곳으로 여행을 결정하게 된 계기였기에 그것을 실제로 접하게 되었을 때의 감동은 말로 이어지지 못한다.

 

나는 이곳에서 사진을 수도 없이 찍었고 그에 못지않게 계속해서 눈에 담아보았다. 날씨가 오락가락했던 것도 개의치 않고 , 모두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았던 탓에 부탁했던 사진과 내가 찍은 사진 모두에서 이렇다 할 명장면을 남겨주진 못했지만 늘 상상만 해오던 장면을 실물로 보게 되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예뻐’, ‘좋아’를 남발하며 오락실의 테트리스 기계에서 방방 뛰어다니던 그 아저씨처럼 나 역시도 방방 뛰어다니며 충분히 멋지게 기억될 곳이었다.

2017.08.05 in Moscow


기대했던 것보다 멋질 수도 있고, 시시할 수도 있다. 실제 관광지에는 관광객들이 넘치도록 많이 있고, 날씨와 계절에 따라 관경이 달라진다. 언제 어느 시기에 누구와 오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고, 어떤 각도에서 얼마만큼 담아내느냐도 다를 것이다. 따라서, 여행지에서 아무리 많은 사진을 찍어도 이곳에 와야겠다고 결심하게 한 결정적 장면이 되어준 장면처럼 멋진 사진을 내 손으로 찍을 순 없다. 그저,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관람하고 눈에 담고 추억하는 일만 남아 있을 뿐, 그렇게 담은 장면만이 내 세상으로 남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6.    추억은 꼭 멋진 장면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진 좀 찍어 주세요.”

혼자 온 나는 기념사진을 찍고 싶었다. 마침 성당 앞 의자에 앉아 쉬고 있던 헬싱키 할아버지에게 부탁했고, 내가 선택한 헬싱키 할아버지는 핸드폰 카메라 촬영 버튼을 누르실 줄 모르셨다. 여러 번 포즈를 취했던 것 같은데 사진은 모두 이상하게 찍히고 말았다. 바닥이 찍히거나 초점이 나가거나 전혀 찍히지 않거나. 아저씨 잘 찍고 있어요? 하며 가까이 다가가자 절레절레하시며 카메라 버튼을 잘 못 누르셨는데 그때 찍힌 사진이 가관이었다. 할아버지의 눈과 이마, 나의 눈과 이마가 각 절반씩 찍힌 사진이 왜곡되어 찰칵, 나는 카메라를 받아 들며 ‘엉망이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와 동시에, 그래서 그게 또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예쁜 사진을 남긴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똑같이 예쁘게 미소 짓고 찍으며 남긴 사진보다 이런 엉터리 사진이 오히려 장소에서의 에피소드와 함께 기억엔 생생하게 남겨질 테고 나는 이제 이곳을 특별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 할아버지 와의 만남을 비롯해, 사진을 신나게 망친 뒤에 앉아서 피식피식 웃으며 그림을 그리는 내게 살갑게 말 걸어주시던 다른 여행사 무리의 아주머니들과의 대화, 전날 욕실에서 넘어져 다리를 심하게 다쳐 울먹이던  나보다 더 피멍이 잔뜩 든 부상을 숨기고 있던 인솔자와의 대화, 한가롭던 광장, 그 모든 것들을 말이다.

2017.08.06 in Helsinki

장소 앞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는 수많은 관광객 인파와 그 주변을 감싸고 대기 중인 수많은 관광버스들이 이곳이 관광 명소이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2017.08.06 in Helsinki

특별한 여행을 하길 바라며 자유여행을 해도 결국 명소를 찾는다.

우리는 이곳에서 보편적인 여행의 한 발자국을 남기게 될 것이다.



     #7.   빛처럼 스며드는 것들, 한눈에 볼 수 없는 것들.


자유 시간이 주어지면 열심히 돌아다니기보다는 주로 자리를 잡고 앉는 편이다.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는 패키지여행의 특성 때문인지 단지 게으른 속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물러 관찰하는 쪽을 택한다. 자연광이 오롯이 스며드는 원형의 창을 빙글빙글 시선을 돌려가며 한눈에 담기 쉽지 않았던 암석교회. 나는 온몸을 감싸며 스며드는 빛도, 한눈에 담을 수 없었던  창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이 또한 누군가를 알아가는 과정 같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사람에게 어느 순간 익숙해졌다고 느끼는 건 천천히 관계에 물들어갔기 때문일 것이고, 그만큼 누군가를 알아가는 과정 또한 한 눈이 아닌 여러 만남을 통해서겠지.

언제나 관계에 어려움을 겪어왔기에, 어떤 순간에도 관계에 대입하고 만다.



     #8.   왔노라, 보았노라, 찍었노라.


애초에 오르는 것을 포기했다가도 온 김에 한 번 봐야지 하고 끙끙대며 오르내렸던 곳이라, 아주 짧은 시간 머물렀는데도 불구하고 이곳은 기억 한편에 잘 자리 잡고 있다.


패키지여행에서 시간이 부족하다고 투덜대는 일행이 있을 때 인솔자들은 통상적으로 이렇게 얘기한다.

패키지여행은 원래,“왔노라, 보았노라, 찍었노라”로 설명된다고.

이 장소는 그 말에 딱 걸맞을 정도의 시간만 주었던 장소, 그곳을 어떻게 기억하는지는 각각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언덕 아래에서부터 빼꼼 보이기 시작하던 그 순간부터, 내려서 성당 안까지 들려보라고 했던 짧은 시간.

이 성당의 높음과 그곳으로 향하는 계단을 보면 당시 전날 다리를 다쳐서 절뚝거리며 걸어 다니는 나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왜 꼭 여행지에서 한 번은 다치거나 아프게 되는 건지.


2017.08.06 in Uspenski Cathedral

이 곳은 나에겐, 절뚝거리던 다리로 보기엔 '계단이 너무 많아 힘겨웠던 장소'로 남게 된 성당이다.



     #9.     때때로 장면은 햇빛이나 바람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시벨리우스 공원은 단출했지만, 공원 앞 호숫가와, 뒤 산책길을 걸으며 자유시간을 보내기에 충분했다.

이 그림을 보면 당시 바람이 엄청 불었던 호숫가의 물결이 떠오른다. 그리고 한 일행 사이에서 바람을 가르며 호숫가 위에 떠있는 한 커피숍까지 구경 가던 장면도, 그리고 그 호숫가로 반짝이던 햇빛도 함께 떠오른다.

2017.08.06 in Sibelius Park

때때로 어떤 장면은 이렇다 할 사건 없이도, 기억에 남는 대화가 없어도, 햇빛이나 바람만으로도 기억되기도 한다. 공원 조각의 반짝임 만큼 눈부셨던 호수, 강풍처럼 휘몰아치던 바람, 총총 걷던 산책 걸음 때문에 그림만 봐도 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10.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은 아니다.


2017.08.07 in Norway

국경을 세 개를 넘어 노르웨이로 도착했다.

하루 종일 이동을 했고, 이동하면서 창가 틈 사이로 보였던 장면들이 무성영화처럼 지금도 눈 앞에 아른거린다.


‘이동을 하면 이동한 장면이 남는다’


멈춰진 장면만이 기억에 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조용한 장면들이 반짝이며 눈앞을 스친다.

나는 처음 보는 광경들에 입을 벌리고 감탄하다가도 꾸벅 졸다가, 낙서로 시간을 때우다가, 틈틈이 책도 읽으면서 그렇게 이동의 시간을 보냈다. 때때로 주변을 돌아보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그 시간을 보내는지 관찰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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