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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 A MI Aug 28. 2020

Travel Sketch (Eastern Europe)

패키지로 떠난 여행 드로잉 -  ep#10.-#18.

#10.    어떤 것이든 그 끝을 헤아리는 것은 힘든 것 같다.


마음의 깊이도, 인연의 길이도, 어떤 것이든 그 끝을 헤아리는 것은 힘든 것 같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관계도

흔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마음도

잊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순간도

다시 올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기회도


끝없이 이어지는 광활한 수평의 지대를 지나가며 국경을 넘고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버스로 국경을 넘은지도 모르게 쉽게 넘나 들었는데, 그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나라의 끝과 나라의 시작이 맞닿은 곳, 국경.


2016.08.09 in Hungary

물리적 국경은 이렇게 명확한데 심리적 국경은 얼마나 모호한가.

마음의 깊이와 마지막이 되는 순간, 그것이 무엇이 정말 그것이 끝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아주, 많은 시간이.


     #11.  어떤 하루가 길게 느껴진다면 여러 감정 곡선을 그렸기 때문이다.


이 한 장의 그림에는 3가지 에피소드가 담겨있다.

자그레브의 레몬맥주,  부다페스트의 병따개, 마침 헝가리와 한국의 펜싱 선수의 올림픽 결승전이 치러지던 TV.

이 각각의 소품에 담긴 에피소드마다의 감정이 달라서 이날 하루는 유난히 길었고,  그 긴 하루의 끝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던 마음을 그림으로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떤 때는 선을 하나하나 그릴 때마다의 잡다한 마음들이 요동 치기도 하며, 반대로 어떤 때는 다른 생각 없이 현장을 관찰하고 그리는데만 집중하게 되어 차분하게 진정시킬 때도 있으니 그림 그리는 마음가짐 또한 여러 가지 인 것 같다.


장소마다 여러 다른 감정을 느꼈는데, 어떻게 그것을 하나로 정리할 수 있을까.

어떤 하루가 길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분명히 여러 가지의 감정 곡선을 그린 날일 것이다.   

2016.08.09 in Hungary


글로 쓰지 않은 그림일기 같은 드로잉은 지극히 감정적이고,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로 가득해서 펼쳐볼 때마다 시끄럽게 느껴진다.



     #12. ‘왜’라는 질문은 때로는 불필요하다.  


어제 야경으로 맞이했던 그 충격적인 눈부심과는 달리, 우울한 잿빛의 기운을 흩뿌리는 부다페스트의 민낯.

부다페스트의 이 알싸한 분위기는 헝가리에서 머무는 내내 나를 울적하게 만들었다.

헝가리라는 나라의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기운 때문에 단 이틀 머무는 사이에 여러 번 눈물을 흘렸다.

2016.08.10 in Budafest

왜인지는 지금도 알 길이 없지만 구태여 그 이유를 찾고 싶지도 않다.

성찰을 위한 왜가 아니라면, 현상에 대한 왜라는 질문이 때로는 불필요하다고 느꼈다.

슬픔의 이유를 안다고 해서 그 슬픔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거나 없었던 일이 될 수도 없고, 때로는 뜻 모를 슬픔으로 인해 감정이 정화되기도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13.  아픈 기억은 떠올릴 때마다 아프다.  


아침부터 체기가 있었는지 속이 메슥거렸고 두통이 가시지 않아 어지러웠다.

그렇게 이날은 거의 하루 종일 몸이 아팠다. 그럼에도 관광을 놓칠 순 없어서 겨우 일정을 쫓아다녔고, 프라하 성부터 구시가지를 도는 시간은 내내 힘겹기만 했다.

 

그러다 매 정시마다 울리는 프라하 천문 시계탑 앞에서의 모처럼만의 자유시간이 주어졌고,  평소 같았다면 구석구석 돌아다니거나 어디 앉아 그림을 그렸을 테지만 이번엔 어쩔 수 없이 가만히 앉아 체기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천문시계 앞 카페에 앉아 점점 모여드는 인파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활기차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무력하게 앉아 있었다.


뎅뎅뎅-뎅뎅뎅-


별거 없는 종소리에 사람들은 환호했고, 그 틈 사이에서 그래도 기념하겠다고 동영상도 찍고 열심히 웃어 보이며 사진도 찍으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


다음 일정이자 마지막 일정이었던 까를교까지 다녀오고 나서서야, 일이 터지고 말았다.

버스로 돌아가는 프라하의 한 다리 위에 어지러움증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아 그대로 속을 게워내었고, 그대로 목놓아 엉엉 울었다.


여행 9일 차,


홀로 이렇게 긴 패키지여행은 처음이었고 내색하진 않았지만 조금 지쳐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종일 끙끙 앓았던 게 서러웠는지도 모른다.

여행이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다는 것도 알았고,

그 속에서도 위로해주고 배려해 주었던 사람들이 고마웠고,

내내 앓던 체기가 빠져나와 겨우 안심하기도 했지만,


이때 휴지로 얼굴을 감싸고 목놓아 울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프다.

2016.08.11 in Praha

단지, 정시마다 시계가 울린다는 이유로 이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다는 게 신기하지 않아?

시간은 계속 흐르기 마련이니 사람들은 계속해서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어.

그러니 놓치고 흘려보낸 것에 마냥 아파하고 있을 필요도 없는 것 같아.



     #14.  가끔은 언어들도 풍경이 된다.   


체스키 크룸로프에서의 자유시간은 특히나 이국적이었다.

피노키오 인형 상점들을 비롯하여 다양한 수공예품들을 구경한 후 광장에 앉아 이국적 정취를 둘러보았다.

건축물, 사람들, 그리고 그 소음.

광장 한복판에 앉아있으며 주변에 각 나라의 관광객들이 뒤섞여 저마다의 여행을 즐기는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보고 있노라니, 그 모든 장면들이 풍경 같았다.  


여러 가지 언어가 뒤섞여 있는 광장에서 사람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그 순간은 시끄럽기보다 고요했다.

고요한, 풍경 같았다.

2016.08.11 in Český Krumlov

이제는 내가 항상 약속 장소 근처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인솔자가 날 부르는 소리에 완성하지 못한 그림에 손을 떼고 일어나서 합류한다.

그 숱한 언어들 속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 반가운 그 소리.



     #15.  사람을 모으는 ‘같이’라는 한마디.  



산장호텔은 대부분 와이파이가 로비에서만 된다.

한가롭게 로비에 앉아서 인터넷도 하고 드로잉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같이’ 맥주 한잔 하자며 일행 몇 명이 모이기 시작했다.

자리를 마련하면 사람이 모인다.

‘같이’는 늘 기분 좋은 한마디인 것 같다.


낯선 곳, 낯선 분위기,  낯선 사람들이 ‘같이’라는 한마디에 옹기종기 모여, 그날 우리는 산장에서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2016.08.12 Sankt Johann im Pongau

서로 모르는 사람들,

여태 몰라왔고,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 만나기 힘든 사람들.

이 얼마나 속마음을 털어놓기 좋은 상대인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진짜 속내를 꺼낼 수 있는 분위기와, 맥주와, 음악이 여기 있었다.



     #16.   ‘만남’이 있으면 ‘추억’ 이 생기기 마련이다.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 며칠간의 여행을 함께 하며 ‘이 사람’은 ‘이 상황’에서 반드시‘이런 행동’을 하겠지 라며 어느새 알아주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자유시간 후 만남을 갖게 되면, “또 그림 그렸지? 이번엔 뭘 그렸니”라는 당연한 물음이 정겨웠다.

나의 드로잉이 모두의 드로잉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일행들이 맥주 마시기, 간식 사 먹기, 기념품 사기, 사진 찍기, 새로운 농담 연구하기 등으로 어떤 자유 시간을 보냈을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각자의 추억만큼 서로의 여행도 추억으로 가지고 갔을 것이다.


만남으로 겹쳐진 시간만큼은 함께 쌓아 갔을 추억이 너무나 소중하다.

혼자 갔지만, 결코 혼자이지 않았던 여행.

좋은 추억을 만들어준 사람들이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2016.08.13 in Salzkammergut

더듬더듬, 준비했던 말들을 이어간다는 것.

조용히 낯선 풍경을 더듬어 살펴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 것이라고.



#17.    어떤 장면은 음악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때로는 입고 갔던 옷을 보다 문득

때로는 너무나 인상 깊던 음식으로부터

때로는 그 장소와 어울리던 음악이 들렸을 때


여행지에서의 추억은 그런 것들로부터 불현듯 나타나기도 한다.


하모니카 음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내내 한 곡만 연습하던 그 선곡이 가장 잘 어울렸던 순간.

2016.08.13 in Hallstatt

할슈타트의 이 아름다운 풍경은, 하모니카 소리와 따뜻했던 라테의 기억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18.  미쳐 마무리되지 못한 것을 굳이 마무리 지으려 하지 않으련다.  


패키지여행에서 보통 자유시간을 조금 더 확보하기 위해선 식사시간을 이용한다.

식사를 남들보다 빠르게 하고 이동하기 전까지 주변을 조금 더 둘러보면서 시간을 즐기는데, 여유가 된다면 바로 이때 틈틈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뮌헨에서의 마지막 일정, 그리고 여행지에서의 마지막 일정이었던 이날.

나는 가장 먼저 식사를 마쳤고, 식사 후에 버스를 타게 될 장소에 먼저 도착해서 남들보다 긴 자유시간을 가졌다. 광장 앞 카페에 자리 잡고, 카드결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원에게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사정하면서까지 자리에 앉아 마지막 여행의 여유를 즐겼다.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는지, 나는 광장에 들어왔다 나가는 관광버스들의 이동을 구경했고, 숱한 관광객들의 동선에 눈을 쫓으며 광장 구경에 시간을 빼앗겼다.

다 그리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내가 타야 할 관광버스가 들어왔다.

일행이 버스에 타기를 재촉하는 손짓을 했고, 후다닥 달려갈 수밖에 없었던 순간이 담긴 마무리되지 못한 선.

나는 그 순간을 그대로 남겨두기로 했다.


이 그림엔 나만의 자유시간과 마지막의 아쉬움, 정리되지 못한 선과 함께 정리되지 못한 감정들까지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2016.08.15 in München


살면서 매듭지지 못했던 많은 순간들, 미쳐 마무리되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꺼내어 볼 때마다 아쉬움이 남을지언정 애써 마무리 지으려 하지 않으련다.  

다른 이유들을 덧대어 매듭짓고 덮으려 하지 않으련다.

모든 일을 그렇게 정리하기엔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이 더 많기에.



every ep 18 moment



 Travel Scketch (Eastern Erope) ep#1.-#18.

나만의 펜도 그림체도 없었던 첫 여행드로잉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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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펜과 드로잉습관이 생긴 다음 여행드로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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