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의 『정신현상학』
사례 1.
이제 막 대학교에 입학한 희성이는 신입생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띈다. 멀끔한 외모 덕일 수도 있겠지만 희성이의 매력은 발표나 토론 시간에 특히 두드러진다. 어릴 때부터 웅변 학원에 다녔고 스피치 대회에서도 여러 번 수상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희성이는 말하기에 대한 자신감이 엄청나다. 많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 말하는 것에 익숙한 그였기에 발표나 토론을 하면 두각을 나타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느 날 희성이를 주의 깊게 보던 교수님은 교내 스피치 대회에 나가지 않겠냐고 묻는다. 당연히 희성이는 거절하지 않는다. 그는 대회를 준비하면서 교수님에게 지도를 받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스스로 스피치 실력이 완벽하다고 자부했던 희성이의 자신감은 산산조각이 난다. 교수님의 눈에 희성이의 스피치는 고쳐야 할 부분이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교수님은 희성이가 스피치를 시연하는 족족 지적한다. 그러나 희성이는 절망하지 않는다. 교수님의 지도로 꾸준히 자신의 스피치를 개선한 그는 결국 교내 스피치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는다.
사례 2.
4학년이 된 희성이는 졸업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친구들처럼 취직에 압박감을 느끼지 않는다. 대학교에 다니는 4년 동안 교내 스피치 대회를 휩쓸고 다닌 희성이다. 희성이는 졸업 후 스피치 학원에 취직해 강사로 활동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럴 만한 실력과 스펙을 갖추었다고 확신한다.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교외 스피치 대회에서는 수상은커녕 참가조차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희성이는 교외 스피치 대회에 참가한다. 하지만 몇 개월간의 연습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선도 통과하지 못한다. 충격을 받은 희성이는 결과를 부정한다. “분명 나의 스피치는 완벽했어!” 그는 대회에서 스피치하는 자신의 모습이 녹화된 영상을 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스피치하는 당시에는 자각하지 못했던 실수나 좋지 않은 자세가 노골적으로 눈에 들어온다. 심지어 신입생 때 교수님과 애써 고쳤던 손동작 버릇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자신의 스피치 실력에 실망한 희성이는 절망의 수렁에 빠지기 일보 직전이다.
모자람의 절망에서 나를 구해 줘
나에게는 왜 이렇게 모자란 구석이 많을까?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버릇을 가진 사람들의 현저한 특징 중 하나는 스스로의 모자람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무릇 ‘모자람’이라는 단어는 무언가를 갖지 못했다는 뉘앙스를 내포한다. 그런데 나에게는 모자란 구석이 많다. ‘모자람’을 많이 가졌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헛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자기를 되돌아보며 인지하게 된 자신의 모자람, 부족함, 모순, 오류. 이러한 결핍의 단어들은 반성하는 이의 자신감과 자존감을 한없이 떨어뜨린다.
일례로 희성이는 스피치라는 분야에서 자신의 모자람을 자각한다. 그리고 본인의 스피치 실력에 실망한다. 게다가 그의 실망감은 절망으로 깊어지려 한다. 완벽한 줄 알았던 자신에 대한 실망이 그의 자신감과 자존감을 갉아먹은 실정이다. 그런데 모자람으로 인한 실망과 절망은 비단 스피치와 같은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다. 모자람에서 비롯되는 자책은 반성하는 이의 성격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왜 이렇게 다혈질이지? 나에게는 왜 참을성이 모자랄까?” 한편으로는 정신적 성숙에 관련될 수도 있다. “나는 왜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나에게는 왜 주체성이 모자랄까?” 모자람으로 인해 느끼는 절망감은 삶의 총체를 구성하는 모든 영역에서 다양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모자람으로 인한 절망은 그것이 해소될 때까지 우리를 압박한다. 모자람, 부족함, 모순, 오류. 모자람은 끊임없이 모습을 바꿔 우리 앞에 등장한다. 스스로의 모자람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고 있는가? 그렇다.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고민에 빠져 있는가? 그렇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가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독일 철학자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위와 비슷한 고뇌에 갇힌 사람들에게 탈출의 단초를 제공한다. 헤겔의 대표적인 저서를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정신현상학』은 한 가지 물음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의식은 어떻게 발전하는가.” 그는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정교하고도 난해한 말로 풀어낸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읽기 힘들다는 고전 중에서도 특히 어려운 고전이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모자람 때문에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어려운 책을 읽으라는 제안은 또 다른 절망을 추가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죽을힘을 다해 밧줄을 붙잡고 올라가야 구렁텅이에서 빠져나갈 수 있듯이, 모자람의 절망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있는 힘을 다해 『정신현상학』을 탐독해야 한다.
헤겔은 인간의 의식이 어떻게 발전하는지, 그래서 최종적으로 진리라고도 일컬어도 무방한 절대지(絶對知)의 경지에 도달하기까지 어떤 단계를 밟아 나가는지를 밝힌다. 여기서부터 이미 진리를 대하는 헤겔의 태도가 암시된다. 그에게 있어 진리는 도화지에 찍힌 고정된 점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진리는 전임자들의 주장과 같이 이성의 직관이나 신앙적 믿음을 통해 포상처럼 주어지는 요소도 아니다. 헤겔에게 진리란 현실 속에서 생생하게 변화하고 발전하는 과정을 거쳐 완성되는 그 무엇이다. 현상계를 초월해 존재하는 이데아는 진리와 거리가 멀다. 진리는 항상 현실에서 비롯되고 현실로 구체화된다. 그리고 그 과정은 절대 불변의 신이 피조물을 창조하는 순간처럼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진리는 긴 시간 동안 역동적으로 변천한 결과로서 완성된다. 헤겔은 현실에서의 인간 의식이 점진적인 단계를 거치며 진리를 완성해 나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진리를 피안의 세계에서 찾는 헤겔 이전의 철학자들은 잘못된 접근법을 취한 것이다. 헤겔은 그들이 설명하는 진리의 도출 과정이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단순하다고 비판한다. 진리에 대한 이들의 견해는 현실에서의 구체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전임자들의 확신이나 바람과는 다르게 진리는 현실 속에서 분명해진다. 현실에서의 인간 의식은 점진적이고 구체적인 과정을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헤겔은 이 과정의 설명을 시도한다.
의식이 발전하는 방식
모자란 점이 많은 우리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발전의 궤도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발전의 최종 목표는 진리와의 일치다. 우리의 의식이 진리와 일치하는 단계까지 발전하면 우리는 비로소 완벽한 모습을 갖춘 자신에게 흡족해하리라. 그때는 더 이상 모자란 사람으로 남지 않아도 된다. 그러면 앞에서 질문한 대로, 우리의 의식은 어떠한 방식으로 발전하는가? 헤겔은 변증법(Dialektik)의 방식을 제시한다.
본래 변증법은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된 말로 대화에서 사용하는 문답법이라는 의미가 강했던 용어다. 그러나 헤겔은 변증법의 의미를 인간의 의식이 진리를 향해 발전하는 원리로 확장한다. 헤겔에 의하면 우리의 의식은 변증법의 원리에 따라 발전한다. 변증법은 의식이 발전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즉자존재(an sich)-대자존재(für sich)-즉자대자존재(an und für sich)의 단계를 포함한다.
우리의 의식은 기본적으로 즉자존재다. 즉자존재는 단순히 말해 그저 자기 자신 자체로만 존재하는 상태다. 이는 번역된 ‘즉자(卽自)’라는 단어를 들여다보면 쉽게 이해된다. 자신에게 ‘즉(卽)’하다. 곧 즉자존재는 순전히 자기 자신으로 머물러 있는 존재다. 자기 자신 안에 머물러 있다 보니 즉자존재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반성적 시각을 결여한다. 스스로에 대한 고찰이나 반성이 실행되지 않은 상태로 단순히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즉자존재는 자신의 문제점을 깨닫지 못한다. 자신이 무엇이 모자란지, 무엇이 부족한지, 어떤 모순을 나타내는지, 어떤 오류를 저지르는지 미처 자각할 수 없다. 우리가 즉자존재의 상태라고 할 때 그것이 함의하는 바는, 우리가 가진 장점은 물론 모자람, 부족함, 모순, 오류를 알아채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어떤 부분에서 모자란 사람인지는 차치하더라도 모자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단계다. 즉자존재는 우리의 기초적인 존재 방식이자 발전의 출발점이다.
즉자존재였던 의식은 어느 순간 스스로를 되돌아본다.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 작업이 수행되는 시점이다. 이 시점에서 의식은 대자존재가 된다. 대자존재는 말 그대로 나 자신을 ‘대(對)’하는 존재다. 자신을 대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객관화시켜 마주한다는 뜻이다. 자신을 대면하게 된 대자존재는 적극적으로 질문을 펼친다. 나는 무엇인가? 나의 장점은 무엇이고 또 나의 단점은 무엇인가? 질문은 필연적으로 대답을 견인한다. 의식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즉자존재였을 때에는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의식의 모자람, 부족함, 모순, 오류를 발굴해 낸다. 이렇게 대자존재에 진입하면서 의식은 자신의 모자람을 발견하는 것이다.
자신의 모자람을 발견함으로써 의식은 완전성과의 불일치를 경험한다. 즉자존재는 모자람을 자각할 수 없기에 자신의 완전성에 도취되어 헤어나지 못한다. 즉자존재는 불편한 진실이 아닌 달콤한 거짓 속에서 헤엄치는 의식이다. 반면에 대자존재는 자신의 모자람을 알아챈다. 스스로를 대상으로 삼아 수행했던 의식의 반성 작업은, 숨겨졌던 모자람, 부족함, 모순, 오류를 들추어냄으로써 결과적으로 의식 자신이 완전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다. 이러한 완전성에 대한 불일치의 경험은 대자존재의 의식이 맛보는 일종의 비극이다.
그러나 헤겔은 의식에게 닥친 불일치의 경험을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반대로 헤겔은 의식이 자각한 완전성과의 불일치를 의식 발전의 핵심이라고 선언한다. 더 나아가 그것이 진리 자체의 속성이라고까지 언급한다.
불일치는 부정적이면서도 핵심적인 것으로서 진리 그 자체 속에 직접 존재한다.
(임석진 옮김, 한길사, 2005, 1권 78쪽)
왜냐하면 불일치의 경험은 진리와의 완전한 일치 상태로 나아가는 데 필수 불가결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나의 완전성에 대한 믿음이 깨지고 찾아오는 완전성과의 불일치는 발전을 위한 통과의례나 마찬가지다. 자신의 모자람을 의식하지 못한 즉자존재의 완전성은 단지 환상에 불과하다. 실은 완전하지 않은데 완전하다고 착각하는 환상과 다름없다. 따라서 의식이 더욱 발전하려면 환상에서 깨어나 반드시 자신의 모자람을 알아야 한다. 모자람의 자각이 선행되어야 모자람의 수정도 가능하다. 자신의 모자람을 마주하는 용기가 진리로 향하는 통로를 개척한다. 그래서 헤겔은 불일치가 진리 그 자체에 내재한다고 서술한 것이다.
불일치를 극복하고 다시 일치된 완전성으로 나아가는 의식의 노력은 즉자대자존재 단계에 들어서면서 열매를 맺는다. 즉자대자존재의 의식은 대자존재가 발견한 모자람을 보완하고 해결해 한 단계 발전한 의식이다. 이제 의식 안의 모자람, 부족함, 모순, 오류는 극복되었다. 의식은 다시 자신이 완전함을 느낀다. 이로써 의식은 한층 발전된 제2의 즉자존재가 된다.
한 번만으로 끝이 아니야
정확한 비교는 아니지만, 의식이 발전하는 과정은 희성이가 교내 스피치 대회를 준비하면서 실력을 향상시킨 과정과 유사하다. 자신의 스피치 실력이 완벽하다고 자부하던 희성이를 즉자존재에 비유한다면, 교수님의 지도를 받아 고쳐야 할 부분을 깨달은 희성이는 대자존재에 빗댈 수 있다. 그리고 교내 대회에서 수상할 정도로 스피치를 개선한 희성이 모습은 즉자대자존재의 의식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희성이는 그 이후로 또다시 불일치에 직면한다. 졸업을 앞두고 참가한 교외 스피치 대회에서 그가 받은 성적표는 예선 탈락이다. 부족한 점을 고쳐 보다 발전한 실력으로 출전했지만, 희성이가 얻은 거라곤 자신의 부족한 점을 추가로 발견한 것뿐이었다. 스피치를 하는 당시에 즉자존재였던 희성이는 자신의 모습이 녹화된 영상을 보며 스스로를 대면한다. 대자존재의 희성이는 스피치를 하는 순간에는 몰랐던 자신의 실수나 버릇을 발견한다. 스피치 실력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해서 발전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의식도 희성이의 발전과 같다. 즉자존재에서 즉자대자존재로 한 단계 발전했다고 해서 발전이 마무리되지 않는다. 즉자대자존재의 단계는 일시적이다. 즉자대자존재가 자신의 완전함에 취하는 순간 의식은 다시 제2의 즉자존재로 뒤바뀐다. 즉자대자존재의 의식이 즉자존재에서 한층 발전한 상태이긴 하지만, 자신의 또 다른 모자람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제2의 즉자존재와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제2의 대자존재로 나아가 모자람을 인지하고, 그것을 해소함으로써 다시 발전하는 과정이 요구된다. 한 단계의 발전은 다시 다음 단계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이런 식으로 의식의 발전은 여러 단계를 거듭한다. 제3의 단계, 제4의 단계, 제5의 단계…….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이 단계를 감각-지각-오성-자기의식-이성-정신-종교-절대지 순으로 나열한다. 이렇듯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의식은 결국 세계의 진리인 절대지까지 도달한다. 이는 의식이 악착스럽고 줄기차게 변증법적 발전의 단계를 밟아간 결과다. 의식이 도달한 절대지는 세계를 총체적으로 꿰뚫는 앎이자 진리다. 여기까지 오면 의식이 발전의 최종 목표로 삼는 진리와의 일치가 완성된다.
이는 완전하고도 진실한 내용에 자기라는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그의 개념을 실현하는 동시에 바로 이 실현된 상태 속에 개념을 견지하는 정신으로서, 이것이 바로 절대지이다.
(같은 책, 2권 349쪽)
의식이 즉자존재에서 즉자대자존재로 한 단계 발전하는 양상을 헤겔은 지양(Aufheben)이라고 명명한다. 독일어 동사 ‘aufheben’은 여러 가지 뜻을 담는다. ‘높이다’와 ‘파기하다’라는 뜻이 대표적인데 언뜻 느끼기에 서로 상충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의식의 발전 양상을 생각하면 이 단어만큼 헤겔의 의도를 반영한 단어는 찾기 힘들다. 의식은 자신의 모자람을 ‘파기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다.’ 단어가 가진 이중적인 의미가 헤겔이 제시하는 의식의 발전 양상에 딱 들어맞는 셈이다. 이렇게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한 단어인 동사 ‘aufheben’은 헤겔 철학에서 의식의 발전 과정을 효과적으로 함축하는 단어로 자리한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말로 번역된 단어인 지양(止揚)도 적절한 번역이 아닐 수 없다. ‘지(止)’의 ‘그치다’라는 뜻과 ‘양(揚)’의 ‘올리다’라는 뜻은 ‘aufheben’이 지닌 의미의 이중성과 상통한다.
즉자대자존재로 지양한 의식은 다시 즉자존재로 전환된다. 의식은 절대지와 일치할 때까지 여러 번의 지양을 실천해야 한다. 간추리자면 지양은 한 번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의식의 발전은 단발적이지 않다. 우리는 단 한 번의 지양만으로는 절대지의 경지에 다다를 수 없다. 우리의 의식은 지양에 지양을 한결같이 반복해야 완성된 층위에 당도하게 된다. 『정신현상학』은 우리에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한 단계의 지양에 만족하지 말고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의식의 발전 과정에서 헤겔은 무엇보다도 이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성은 감각에서 절대지까지의 전체 단계를 두루 품을 수 있는 의식이다. 이성은 물질을 통해 얻는 감각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의식의 단계부터 세계의 총체적 진리인 절대지의 단계까지 포괄한다. 그래서 헤겔은 이성을 “온갖 실재라는 확신”이라고 표현한다. 이성=온갖 실재라는 확신. 이 도식은 『정신현상학』 전반에서 여러 번 문장화된다. 이성은 조그마한 물질에서부터 거대한 진리까지를 아우르는 인간 의식이다.
헤겔은 인간 의식이 점진적이고 구체적인 단계를 거쳐 진리로 발전하는 과정을 성공적으로 해명한다. 조그마한 물질에서부터 거대한 진리까지, 세상의 모든 요소들은 인간 의식의 변증법적 발전 과정 속에 정렬한다. 헤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철학은 세상의 모든 요소들을 하나의 원리 아래 통일시킨다. 서양철학의 호수라고 불리는 칸트 철학도 물질적 세계와 윤리적 세계를 일관되게 통일시키지 못하고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으로 나누었다. 비록 『판단력비판』으로 양자 간의 괴리를 없애기 위해 노력했지만, 칸트 철학은 영역의 분리에서 풍기는 이질감이라는 냄새를 완벽하게 제거하지 못했다. 헤겔은 칸트로부터 시작된 독일 관념론을 포함한 이성주의 철학의 전통을 이어 나감과 동시에, 그의 전임자들이 해결하지 못한 한계를 넘어섬으로써 서양철학의 정점을 찍는다. 이전의 철학이 노출한 빈약한 뼈대를 헤겔은 단단하고 확실한 철학적 체계로 재구성한다. 헤겔 철학은 세상의 모든 것을 통일한 철학이다. 가히 철학의 완성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자신의 모자람을 탓하며 절망하는 우리에게 헤겔 철학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헤겔은 말한다. “모자람을 자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발전이다.” 모자람을 자각하지 못하면 발전 자체를 시작할 수 없다. 발전이라는 현상은 우리가 가진 모자람, 부족함, 모순, 오류를 깨닫는 순간부터 일어난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모자람을 지나치게 의식해 스스로를 부족한 사람으로 비하해 버린다. 그러나 모자람이 없는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사람은 모자람이 많은 사람과 모자람이 없는 사람으로 나뉘지 않는다. 자신의 모자람을 아는 사람과 자신의 모자람을 모르는 사람으로 나뉠 뿐이다. 두 사람 중 자신의 모자람을 아는 사람은 곧 발전하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모자람은 발전의 방증이다.
그렇다고 모자람을 자각한 상태에 안주하라는 말이 아니다. 발전은 지양으로써 완성되고 지양할수록 완벽해지니까. 교외 스피치 대회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신 희성이도 다시 한 번 지양하면 더욱 완벽한 스피치를 구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모자람에 대한 자각을 지양의 시작점으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조금씩 발전한다면 언젠가 우리는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도달하리라.
□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헤겔은 1770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난다. 라틴어 학교와 김나지움에 다니며 어릴 때부터 고대 그리스 문학을 즐겨 읽은 헤겔은 튀빙겐 대학에 입학해 신학을 전공한다. 대학에서 또래인 횔더린(F. Hölderlin), 그리고 셸링(F. W. J. von Schelling)과 어울리며 사상적 교류를 나눈다.
졸업 후 헤겔은 스위스 베른과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정 교사로 일한다. 가정 교사로 여러 해를 보내던 그는 셸링의 소개로 예나 대학 강사에 부임한다. 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예나 대학의 교수로 임용된다.
이후에도 헤겔은 김나지움 교장과 여러 대학의 교수를 역임하며 교육과 연구에 힘쓴다. 더불어 『정신현상학』, 『논리학』, 『법철학 강요』을 포함한 많은 저서를 남긴다. 그의 업적을 질투하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헤겔은 위대한 철학자로 유명세를 떨친다.
활발한 학문 활동을 펼친 헤겔은 콜레라를 앓다가 1831년 세상을 떠난다.
※ 추천 도서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1·2』, 임석진 옮김,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