흄의 『오성에 관하여』
사례 1.
쨍그랑! 날카로우면서도 청명한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주방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서재에서 책을 읽던 정연 씨는 깜짝 놀라 주방으로 달려갔다. 주방에 들어서자마자 정연 씨의 눈에 들어온 건 깨져서 바닥에 널브러진 그릇 조각들이었다. 식탁 위에 있던 비싼 명품 그릇이 떨어져 깨진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단종되어 구할 수조차 없는 제품이라 정연 씨가 특별히 아끼는 그릇이었는데……. 깨진 건 그릇뿐만이 아니었다. 간만에 정연 씨에게 찾아온 서재에서의 평온한 휴식도 산산이 깨져 버렸다. 분노에 사로잡힌 그녀는 참혹한 재난의 현장 속에서 용의자를 발견한다. 주방 구석에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안절부절못하는 일곱 살짜리 아들이 서 있었다. 이놈이 그릇을 깼구나! 아들은 종종 물건을 깨뜨리곤 했다. 아들이 범인임을 확신한 정연 씨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들을 혼낸다. 그러자 아들은 울음을 터뜨리며 거실 소파 옆에 숨어있는 반려견을 가리킨다. 알고 보니 집에서 키우는 골든 리트리버가 식탁 위의 그릇을 쳐서 떨어뜨린 것이었다.
사례 2.
점심시간이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온 연수 씨는 자리에 앉아 회사 인트라넷 메일함을 열어본다. 부하 직원에게 점심시간 전까지 견적서 파일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는데 제때 보냈을까? 혹시나 했던 마음은 순식간에 역시나로 변했다. 부하 직원에게서 온 메일이 없었다. 연수 씨의 요청을 까먹은 것이 분명했다. 부하 직원은 상습적으로 상사의 지시 사항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거나 업무를 누락하기로 유명했다. 연수 씨도 그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화가 난 연수 씨는 부하 직원에게 전화를 건다. “오전에 내가 견적서 파일 보내라고 했잖아! 왜 항상 일을 제대로 못하는 거야!” 부하 직원이 전화를 받자 연수 씨는 다짜고짜 소리를 지른다. 수화기 너머로 부하 직원의 당황한 기색이 느껴진다. 그는 잠깐 말이 없다가 더듬거리며 대답한다. “오, 오전에 보냈습니다.” 멈칫한 연수 씨는 자신의 메일함을 다시 살펴본다. 찬찬히 살펴보니 부하 직원이 보낸 메일이 있었다. 부하 직원은 제시간에 견적서 파일을 보냈다.
당신은 완벽히 이해하고 있나요
완벽히 이해했다고 믿었던 것들이 오해로 밝혀지는 일이 참 많다. 때때로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 완벽히 이해했다고 확신하고 성급하게 행동한다. 정황상 아들이 그릇을 깼다고 확신한 정연 씨, 부하 직원이 업무를 누락한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한 연수 씨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주 보이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이해했다고 믿었던 것이 오해였음이 밝혀졌을 때의 민망함은 우리 몫이다. 자칫 상황이 심각해지는 경우에는 오해를 받은 상대방과의 감정싸움으로 번질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숱한 민망함과 감정싸움을 겪어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우리는 다시 오해를 이해로 착각해 그릇된 확신에 빠진다. 같은 일이 반복된다.
우리가 어떤 상황을 오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으로 이해했다고 확신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문제의 원인은 자신의 이성에 대한 맹신이다. 무언가에 대한 이해는 이성적 사고의 결과다. 우리는 이성이라는 능력을 사용해 어떤 상황을 이해한다. 내 눈앞에 무슨 상황이 펼쳐졌는가. 상황이 발생한 원인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떠할 것인가. 이성은 이러한 질문에 적절한 답을 내려준다. 이성은 연역적 명료함과 논리적 투명함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이성적 사고의 결과에는 오류가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서양철학의 시초인 플라톤도, 또 근대철학의 아버지인 데카르트도 인간 이성에 찬양의 목소리를 높였던 것이다.
그런데 앞의 사례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가 이성을 활용해 형성된 사고의 흐름을 무조건 따라가다 보면 많은 경우 이해가 아닌 오해라는 지점에 당도하기도 한다. 위대한 플라톤과 데카르트가 찬양해 마지않던 이성이 우리를 잘못된 목적지로 안내하다니! 혹시 우리가 맹신하는 완벽한 이성에는 사실 빈틈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이 맥락에서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인간 이성의 확실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이성이 가진 약점을 가장 잘 파악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우리는 앞 장에서 데카르트 철학이 근대 유럽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데카르트를 대표로 내세우는 근대 서양철학은 이성에의 찬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의 데카르트 외에도 독일의 라이프니츠(G. W. von Leibniz), 네덜란드의 스피노자(B. de Spinoza)와 같은 철학자들도 이성을 최우선으로 꼽았다. 이성을 최우선으로 꼽은 철학자들이 공교롭게도 모두 유럽 대륙에 속한 나라 출신이기에, 이들의 철학을 한데 묶어 대륙 이성론으로 분류한다. 근대 유럽은 이들 대륙 철학자들이 강조한 이성의 힘을 활용해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르고 획기적인 문명의 진보를 이룩해 낸다. 이성은 인간이 가진 능력 중 가장 위대한 능력으로 여겨졌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흄은 용감하게도 인간 이성에 회의적인 눈초리를 보낸다.
과연 우리의 이성은 오류를 저지르지 않을까? 우리는 이성을 무조건 신뢰해도 될까? 흄은 질문한다. 그는 이성의 오류 가능성을 고찰한다. 이성의 다양한 기능 중에서도 흄이 특히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은 이해력, 다른 말로 오성(understanding)이다. 이성주의 학문의 진리 체계는 사태를 이해하는 능력인 오성의 작용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이해에 뿌리를 둔다. 진리 발견의 초석인 오성을 검증하는 일. 이것이 흄이 『오성에 관하여』에서 수행하고자 하는 바다.
믿었던 오성이 뒤통수를 치다니
『오성에 관하여』에서 흄은 이해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현상-인상-관념.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말은 곧 어떤 현상에 대한 관념을 형성한다는 말과 같다. 우선 우리 주변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면 우리는 그 현상을 경험한다. 우리가 현상을 경험하면서 주로 이용하는 도구는 감각 기관이다. 어떤 현상과의 접촉은 눈으로 보고 코로 맡고 입으로 맛보면서 이루어진다. 피부로 만지고 귀로 듣는 과정도 수반한다. 이렇게 감각 기관을 이용한 우리에게 현상에 대한 느낌이 각인된다. 이 느낌이 바로 인상이다. 이어서 우리는 새겨진 인상이 어떠한지 생각하며 관념을 형성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현상에 대한 관념이 만들어지면 우리는 그 현상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여기에 강박증 수준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변호사가 있다. 그는 매일같이 정해진 시간에 산책을 나간 칸트처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정한 시간에 자신의 사무실로 출근한다. 그의 출근 시간은 오전 아홉 시다. 아홉 시에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그가 첫 번째로 하는 일은 텔레비전 켜기다.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누르자 텔레비전이 뿅 켜진다. 그는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누르면 텔레비전이 켜진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변호사는 자신의 손가락이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누르는 현상을 눈으로 보고 손가락의 감촉으로 느끼며 인상을 체득한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인상을 되새겨 자신의 손가락이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는 관념을 형성한다. 또한 그는 텔레비전이 켜지는 현상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인상을 새긴다. 뒤이어 텔레비전이 켜졌다는 관념이 만들어진다. 변호사는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텔레비전이 켜졌다. 이는 몇 년 동안 변하지 않고 매일 반복된 현상이다. 변호사는 그 현상을 이렇게 이해하게 된다. “오늘도 어김없이,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누르니까 텔레비전이 켜지는군.”
변호사가 현상을 이해하는 일련의 과정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인다. 그는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누르면 텔레비전이 켜진다는 사실을 아주 잘 이해했다. 심지어 이는 아주 잘 이해했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변호사가 아닌 초등학생이 같은 경험을 했어도 변호사와 똑같이 이해했을 것이다. 이해하는 능력인 오성을 갖춘 인간이라면 달리 이해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흄은 이 과정에서 오성의 약점을 발견한다. 다시 변호사의 사무실로 되돌아가자. 어느 날 변호사는 사무실로 향하면서 몇 년 동안 리모컨의 건전지를 한 번도 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사무실에 도착하면 리모컨의 건전지부터 갈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강박적으로 규칙적인 삶을 선호하는 그는 예기치 않은 사건을 꺼린다. 건전지가 닳아서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눌러도 텔레비전이 켜지지 않는다면 하루 루틴이 시작부터 망가질 게 뻔하다. 내면의 평화를 망가뜨리는 변수는 미리미리 제거해야 한다. 정확히 아홉 시. 변호사는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리모컨 뒷면의 덮개를 연다. 그런데 리모컨에는 건전지가 들어 있지 않았다. 변호사는 당황한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 순간 뿅!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텔레비전이 켜진다. 변호사는 더더욱 당황한다. 이윽고 그는 사무실에 출근한 첫날을 떠올린다. 그는 첫날에 텔레비전이 매일 아홉 시에 자동으로 켜지도록 설정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변호사는 현상을 이렇게 이해해 왔다. “오늘도 어김없이,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누르니까 텔레비전이 켜지는군.” 그렇지만 현상의 실상은 전혀 달랐다. 애초에 리모컨에는 건전지가 없었고 텔레비전은 아홉 시에 자동으로 켜지도록 설정된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변호사는 현상을 잘못 이해한, 즉 오해한 셈이다. 흄은 우리의 오성이 이런 식으로 오류를 저지른다는 진실을 꿰뚫는다. 변호사는 대체 어떤 지점에서 오류에 빠진 것일까? 그의 오류는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누르는 현상과 텔레비전이 켜지는 현상을 별개의 독립된 현상으로 파악하지 못한 데 있다. 건전지가 없는 리모컨과 자동으로 켜지도록 설정된 텔레비전은 그 어떤 상관관계도 형성하지 않는다. 즉 전자의 현상과 후자의 현상은 동떨어진 현상이다. 따라서 전자의 관념과 후자의 관념도 따로따로 파악되어야 마땅하다. 변호사는 무모하게도 독립적인 두 관념을 하나의 관념으로 연관 지은 것이다.
흄에 의하면 변호사가 두 관념을 하나의 관념으로 연관 지은 이유는 반복에 의해 내재된 습관 탓이다. 리모컨에 건전지가 들어 있고 텔레비전이 자동으로 켜지도록 설정되지 않은 보통의 일상에서는,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누르면 텔레비전이 켜지는 것이 당연한 순서다. 평소에 이런 현상을 반복적으로 접하는 우리는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누르면 텔레비전이 켜진다고 생각하는 습관을 갖는다. 변호사도 습관적으로 사무실에서의 현상을 일상에서의 현상과 똑같이 이해했다. 사무실에서의 현상은 일상에서의 현상과 똑같지는 않았지만 매우 유사했기에 그는 충분히 착각할 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현상을 오해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처럼 무언가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오성은 습관의 개입에 굉장히 취약한 모습을 보인다.
우리의 모든 활동 및 정념과 함께 거의 대부분의 추론들이 버릇과 습관에서 유래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언제나 거의 납득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이준호 옮김, 서광사, 1994, 136쪽)
흄은 무언가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대부분 습관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습관에 의해 현상을 잘못 이해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의식중에 제대로 이해했다는 착각에 빠진다. 아들을 혼낸 정연 씨와 부하 직원에게 소리를 지른 연수 씨도 습관적 이해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실수를 저질렀다. 우리가 오성을 활용해 수행한 이해라는 과정에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믿었던 오성이 뒤통수를 친 격이다. 나는 제대로 이해했다고 믿었는데 실은 내가 오해한 것에 불과했다니! 대륙 이성론이 끝없이 신뢰했던 인간 오성은 명확한 관념조차 만들어 내지 못하는 연약한 능력임이 여기서 밝혀진다.
경험만은 믿으셔도 됩니다
오성이 연약한 능력이라면 기존의 이성주의 학문이 건립한 진리 체계도 위태로워진다. 상술했듯이 오성은 진리 발견의 초석이다. 오성이 오류를 저지르기 쉽다면 오성에 기반해 발견된 진리도 오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사람들이 지금껏 진리로 여겼던 모든 요소들은 회의론 속에 던져진다. 심지어 데카르트가 철저한 검토를 거쳐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확증한 절대 불변의 신과 영혼도 진위를 의심받는다.
영혼이라는 실체에 관한 물음은 절대로 알 수 없다.
(같은 책, 255쪽)
신과 영혼이 없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있다고도 단언할 수 없다. 흄은 의심한다. 그동안 사람들이 진리라고 부르던 요소들은 명료한 이해가 아닌 성급한 오해에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우리는 신과 영혼이 있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들어 왔기에 그렇게 믿는 것이 아닐까? 신과 영혼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단순히 습관적 생각이지 않을까?
흄은 이성이 도출한 진리를 불신한다. 진리의 이면에는 이성의 명료함이 아닌 반복에 의한 습관이 위치한다. 우리는 진리를 알지 못한다. 단지 습관적으로 믿을 뿐이다. 그렇다면 진리를 도출하는 인간 고유의 능력인 이성 또한 믿을 수 없다. 흄은 플라톤 이래 2000년 동안 이어진 이성에 대한 신뢰를 무참히 박살 낸다. 그는 우리가 맹신했던 이성의 민낯을 과감히 공개한다.
이성은 본래 필연성을 추구한다. 이성이 정답이라고 확정한 사안은 필연적으로 정답이어야 했다. 하지만 흄의 시각에서는 이성이 추구하는 필연성조차 허구다. 이성은 필연성을 보증하지 못한다. 오직 개연성을 확보하는 데 그친다. 이성은 필연적인 정답을 가려내는 능력이 아니고 그저 개연적으로 정답일 확률이 높은 답을 선택하는 능력에 불과하다. 문제를 해결할 때 이성은 기존에 반복적으로 또 습관적으로 선택했던 답을 다시 선택할 따름이다. 이성이 선택하는 답은 “반드시 ~다”가 아니다. 오히려 “아마 ~일 것이다”다. 가령 누군가가 “반드시 신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틀린 명제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명제는 “아마 신은 존재할 것이다”다. 이렇게 이성은 필연적 확신을 상실하고 개연적 한계를 노출한다.
드디어 불편한 진실이 완전히 드러났다. 인간은 이성을 활용해서는 더 이상 진리와 거짓을 구별할 수 없다. 흄은 인간의 이성을 동물의 지적 능력과 유사한 차원에 놓는 극단적인 입장마저 나타낸다. 인간의 이성은 반복에 의한 습관에서 자유롭지 않기에, 반복적인 훈련으로 사냥이나 배변 활동을 학습하는 동물의 지적 능력과 유사하다는 주장이다.
이성이 이토록 불안정한 능력이라면 우리는 이제 스스로에게서 무엇을 믿어야 하나. 흄은 이성이 아니라 경험을 믿으라고 충고한다. 가만히 앉아서 고민하고 사유하고 추론하는 활동은 우리를 오류의 항아리에서 꺼내지 못한다. 오히려 이성은 우리가 무언가를 오해해도 이해했다는 착각으로 유도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상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은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 가장 진실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내가 경험하는 현상이다. 진리를 쫓는 과정에서, 과거의 경험과 그로 인해 생긴 습관,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제멋대로 추측하는 오성의 작동은 철저히 제외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인간의 진실성을 보증해 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지배하는 원리들인 우리의 경험뿐이다.
(같은 책, 131쪽)
흄의 철학에서 진리의 초석으로 강조되는 것은 오직 경험이다. 신과 영혼은 우리의 경험을 넘어선 개념이므로 논의하기에 적절치 않다. 다른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논의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않는 한 저 너머의 진리들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불가능하다.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모든 학문은 불확실한 추정 및 가정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우리가 직접 경험하고 관찰한 결과들만이 학문으로 발전할 자격을 얻는다.
기존의 진리를 의심함으로써 논지를 전개했다는 점에서 흄은 데카르트를 닮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새로운 진리를 확립하기 위해 제시한 답은 너무도 상반된다. 데카르트가 인간 이성을 진리 탐구의 기초로 설정했다면 흄은 현상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중시한다. 흄은 데카르트와 대척점에 선다. 이로써 근대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이성 중심 철학을 잇는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스피노자의 대륙 이성론과, 경험을 중시하는 영국 철학자인 흄, 베이컨(F. Bacon), 로크(J. Locke)의 영국 경험론으로 양분된다. 플라톤의 『국가』를 다룬 장에서,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을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중요시하는 학파와 실제로 경험하는 것을 중요시하는 학파로 나뉜다고 했었다. 이 싸움의 구도는 근대 서양철학에도 고스란히 이어져, 이성을 중요시하는 학파와 경험을 중요시하는 학파의 대립으로 표면화된다.
근대 서양철학을 대표하는 대결의 선두에는 데카르트와 흄이 서 있다. 거대한 두 흐름은 팽팽하게 충돌한다. 이 두 가지 흐름 중에서 우리는 무엇이 더 옳은 철학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오성에 관하여』를 통해 흄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선명하다. “네 멋대로 오해하지 마라.” 우리는 살면서 우리의 이성과 이해력을 맹신하고 섣불리 추측한다. 섣부른 추측으로 얼마나 많은 오해가 산출되는가! 어떤 사건에 대한 정황이나 근거 없는 소문만으로 성급하게 판단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의 지적 능력을 지나치게 신뢰한 나머지, 자신의 섣부른 추측과 성급한 판단이 냉철한 이성적 사고의 결실이라고 믿는다. 미디어에서 유명인들에 관한 의혹이 제기되거나 논란이 불거지면 대중들은 확신에 차 비난한다. “저런 사람일 줄 알았어!” 이와 같은 대중들의 현대판 마녀사냥 또한 오성의 오작동의 결과다.
사태를 오해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흄의 전언을 곱씹어야 한다. 확실히 이해했다고 믿는 우리의 생각이 습관의 결과는 아닌지, 개연적인 정황을 필연적인 확신으로 혼동하는 것은 아닌지 잠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하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그러니 우리의 이해력을 맹신하는 습관을 경계하자. 멋대로 오해하지 않으려면 이제부터라도 내가 직접 보고 들은 내용으로만 판단해야 할 것이다.
□ 데이비드 흄 (David Hume, 1711~1776)
1711년 영국 에든버러에서 태어난 흄은 어릴 때부터 지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는 또래에 비해 유독 영리하여 남들보다 일찍 대학에 진학한다. 흄은 에든버러 대학에서 공부하며 뉴턴(I. Newton)의 학문에 영향을 받아 경험적이고 실험적인 탐구를 중시하게 된다.
이후 흄은 프랑스로 건너가 몇 년 동안 머물며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를 집필한다. 1권 『오성에 관하여』, 2권 『정념에 관하여』, 3권 『도덕에 관하여』로 구성된 이 책은 흄의 사상이 집약된 책이다. 그러나 이성주의 철학 중심의 학계에서는 흄의 저서에 냉정한 평가를 내린다. 더불어 흄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끄는 데도 실패한다. 사람들의 반응에 실망한 그는 역사와 관련된 대중서를 여러 권 출판한 후에야 마침내 대중적 인기를 얻는다.
부와 명성을 누리며 공직에 종사하기도 한 흄은 1776년 고향 에든버러에서 숨을 거둔다.
※ 추천 도서
데이비드 흄, 『오성에 관하여』, 이준호 옮김, 서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