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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필은 Nov 01. 2022

<고전정신> 철학4. 사람답게 행동한다는 것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사례 1.

수정 씨는 오늘도 초과 근무를 한다. 그녀가 정시에 퇴근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정시 퇴근이 일상인 회사에서 수정 씨는 항상 초과 근무에 열을 올린다. 정시가 돼도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는 수정 씨와 다르게, 회사 동료들은 정시가 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난다. 동료들은 퇴근하면서 수정 씨에게 한 마디씩 건넨다. “오늘도 야근하세요? 고생이 많으시네요.” 마침내 모든 동료들이 사무실을 빠져나가면 그제야 모니터와 수정 씨의 눈이 떨어진다. 이윽고 수정 씨도 사무실에서 나와 밖으로 향한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주변 식당에서 여유롭게 저녁을 즐긴다. 식당이 외진 곳에 있기에 퇴근한 동료들을 마주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저녁을 먹고 느긋하게 사무실로 복귀한 수정 씨는 이제 천천히 짐을 챙기고 퇴근한다. 사실 수정 씨가 초과 근무를 하는 이유는 단지 수당을 챙기기 위해서다. 대부분의 동료들이 정시 퇴근을 하기에, 실질적으로 업무를 하지 않고도 적당히 시간만 보내면 초과 근무 수당을 받을 수 있다. 애사심을 가진 직원이라는 평가는 덤이다. 수정 씨는 오늘도 두 시간 초과 근무를 했다.     


사례 2.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정희는 손님의 컴플레인을 꺼린다. 귀찮은 일에 엮이는 건 딱 질색이다. 다행히 정희는 친절하고 상냥한 다른 아르바이트생 동료와 같이 일한다. 그 친구는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해서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 그래서 정희는 매번 귀찮은 일을 동료에게 맡길 수 있다. 마침 한 손님이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카운터로 다가온다. 컴플레인을 직감한 정희는 슬며시 카운터에서 벗어나, 열심히 음료를 만들고 있는 동료에게 향한다. 정희는 동료에게 괜히 힘든 척을 하며 손님의 컴플레인을 대신 응대해 달라고 말한다. 정희의 말을 들은 동료는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카운터로 간다. 그리고 친절하고 상냥한 말투로 손님의 컴플레인을 응대한다. 얼마 후 동료와 대화를 나눈 손님은 조용히 자리로 돌아가고 동료도 다시 음료를 만들기 위해 돌아온다. 정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 친구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이 친구와 같이 일하면 정희는 귀찮은 일에 엮이지 않아도 된다. 귀찮은 일을 모두 떠넘기면 되니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우리의 마음은 욕망에 취약하다. 마음은 갈대와 같고 욕망은 불과 같아서 마음에 욕망이 불붙으면 걷잡을 수 없이 번지기 마련이다. 불어닥친 욕망의 화재 앞에서 양심은 무기력하다. 마음이 욕망에 지배당하면 우리는 양심의 경고를 무시한 채 행동하기도 한다. 이때 우리의 행동은 오로지 욕망 충족을 목적으로 삼는다. 심지어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라면 주위 사람을 이용하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수정 씨와 정희의 행동은 마음이 욕망에 지배당한 사람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 준다. 욕망은 행동의 동기로 자리하고 타인은 욕망 충족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이다.

욕망에 휘둘려 행동하는 사람을 보며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저 사람은 사람답게 행동하지 않는구나!” 사람답게 행동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 사람다운 행동의 참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칸트의 3대 비판서를 살펴야 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이른바 3대 비판서로 유명한 철학자다. 3대 비판서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순수이성비판』은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 과정을 다룬다. 말하자면 인식론을 주요 골자로 한다. 이에 비해 『실천이성비판』은 인간의 윤리 혹은 도덕에 관한 서술이다. 이는 윤리학의 영역에 속한다. 3대 비판서 중 마지막으로 출간된 『판단력비판』은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을 연결하는 일종의 가교 역할을 담당한다. 『순수이성비판』의 인식론과 『실천이성비판』의 윤리학이라는 서로 다른 두 분야는 『판단력비판』으로 인해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칸트의 저작 중 인간의 이론이성을 주로 검토하는 『순수이성비판』에 주목한다. 이 책에서 칸트는 묻는다. “우리는 사물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칸트에 의하면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과정은 이렇다. 우선 우리는 감각 기관을 이용해 사물을 직접적으로 경험한다. 이 경험이 사물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한 재료가 된다. 그 후 재료인 사물에 대한 경험은 이성이라는 틀을 거친다. 경험으로만 그쳤다면 그저 느낌 및 감각에 지나지 않았을 재료가 이성이라는 틀에 의해 개념으로 빚어진다. 객체로서 존재했던 사물은 우리의 이러한 인식 과정을 지나 머릿속 개념으로 변환되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사물을 인식함으로써 얻는 개념은 경험이라는 재료와 이성이라는 틀이 결합해 형성된다. 쉬운 이해를 위해 아이스크림을 떠올려 보자. 만약 우리가 삼각형 모양의 아이스크림을 만들고 싶다면 삼각형 모양의 얼음 틀과 음료수가 있어야 한다. 삼각형 모양의 얼음 틀에 음료수를 부어서 얼려야만 아이스크림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음료수만 가지고 있다면 음료수는 삼각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기괴한 꼴로 얼 것이다. 마찬가지로 음료수는 없고 얼음 틀만 있다면 우리가 바라는 삼각형 모양의 아이스크림은 만들어질 수 없을 것이다. 음료수라는 재료와 얼음 틀이라는 틀이 모두 준비되어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삼각형 모양의 아이스크림을 만들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경험이라는 재료와 이성이라는 틀이 모두 필요하다.

한마디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인식론에서 이성과 경험의 조화를 꾀한다. 그는 순전히 이성만으로 진리를 건립하라는 이성주의와,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만이 확실하다는 경험주의를 모두 반박한다. 경험 없는 이성은 음료수 없는 얼음 틀이요, 이성 없는 경험은 얼음 틀 없는 음료수에 불과하다. 칸트에 의하면 순전히 이성으로 형성한 개념은 알맹이가 없고 경험에 그치는 인식은 구체적인 개념으로 발전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가 사물을 제대로 인식하려면 이성과 경험의 적절한 조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칸트는 이성과 경험 어느 하나도 도외시하지 않는다. 이로써 칸트 철학은 이성의 오만한 폭주를 제어하지 못했던 데카르트 철학의 한계와, 불신의 눈으로 이성을 지나치게 움츠러들게 한 흄 철학의 한계를 동시에 뛰어넘는다.

그러면서도 칸트는 신이나 영혼과 같은 진리는 이론이성의 범주를 넘어서기에 개념화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인간의 감각 기관은 신이나 영혼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 재료의 확보가 불가능하니 구체적인 개념의 형성도 불가능하다. 개념의 형성은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현상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맥락에서 칸트의 ‘비판’은 이성의 잘못된 점을 지적한다는 의미가 아닌, 이성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밝힌다는 의미다. 비판 작업은 이성의 능력과 한계를 밝히는 작업인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윤리 혹은 도덕은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가. 신이나 영혼처럼 윤리 혹은 도덕도 인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인식론에서 다루기에는 부적합하다. 이 주제는 인식이 아닌 행동과 연관된다. 그래서 윤리 혹은 도덕이라는 바통은 『실천이성비판』에게 주어진다. 『실천이성비판』에서 칸트는 묻는다.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이 물음으로 칸트의 철학은 인식론을 넘어 윤리학으로 접어든다.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답은 뻔하다. 동물이나 식물 같은 다른 존재들과 다르게 이성을 가진 존재인 이상, 우리는 당연히 사람답게 행동해야 한다. 그럼 어떤 행동이 사람다운 행동인가.     


욕망과 윤리가 충돌할 때

행동은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의지로부터 촉발된다. 달리 말하면 무언가를 획득하거나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의지가 행동으로 구체화된다. 행동은 의지를 가진 인간이 목적으로 삼는 요소를 실현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활동이다.

그렇다면 관건은 의지가 무엇을 노리는가다. 의지가 어떤 요소를 추구하는지, 즉 의지의 주체인 인간이 무엇을 목적으로 삼고 행동하는지가 중요한 의제로 등장한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대의적 차원의 공익을 목적으로 삼고,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숭고하고 고귀한 행동만을 실천한다면 세상은 참으로 평화로울 것이다. 가히 유토피아에 상응하는 세상이리라.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우리 자신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은 숭고한 가치만을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욕망이 우리에게 내재된 의지의 고삐를 쥘 때가 더 많다. 욕망이 의지의 고삐를 쥐고 이끌기 때문에 의지는 고스란히 욕망을 따라간다. 자연스레 우리의 행동도 욕망 충족이라는 목적에 맞게 설계된다. 식욕을 충족하기 위해 밥을 먹고, 수면욕으로 인해 잠을 자고, 성욕에 의해 성관계를 하는 행동은 모두 의지가 욕망을 따라가서 발현되는 행동들이다.

그런데 칸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실천이성(praktische Vernunft)을 탑재하기 때문에 욕망의 간섭으로부터 의지의 주도권을 지켜 낼 수 있다고 말한다. 실천이성은 보편적으로 타당한 도덕법칙을 의식하는 이성이다. 도덕법칙은 누구에게나 그리고 어느 상황 어느 조건에서나 항상 윤리적으로 옳다. 실천이성은 절대적으로 옳은 도덕법칙을 의식해 우리의 의지가 욕망이 아닌 윤리로 향하도록 유도한다. 윤리에의 의지는 윤리적 그리고 도덕적 행동을 실천하려는 의지로 나타난다. 윤리 혹은 도덕에 부합하는 법칙을 의식하는 인간 고유의 능력. 이것 덕분에 우리는 어떤 사태 및 행동에서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판별하게 되는 것이다. 실천이성은 인간이 윤리적 가치를 의식하고 의지하며 실천하게 만드는 요체다. 이는 앞에서 말했듯이 인식론적 작업만이 가능한 우리의 이론이성은 다루지 못하는 영역이다. 칸트는 이러한 이론이성의 한계를 실천이성으로 보완한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우리의 의지가 욕망의 원리를 따르기 쉬운 동시에 실천이성과 맞물린다면, 욕망과 윤리의 충돌은 필연적이다. 실제로 우리는 종종 욕망과 윤리 사이에서 내적 갈등을 겪는다. 우리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성관계를 하는 행동들은 그 자체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훔친 음식을 먹고 근무 시간에 자고 성매매를 한다면? 욕망 충족을 위한 행동이 윤리적 기준과 어긋나는 순간이 찾아온다. 욕망과 윤리가 충돌하는 상황 속에서 욕망의 유혹에 굴복해 노예가 될 것인가? 칸트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안 돼.”

욕망과 윤리의 충돌로 겪는 내적 갈등에서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 칸트는 자유라는 동아줄을 내려준다. 자유는 우리가 욕망의 유혹에서 벗어나 도덕법칙을 따르도록 만든다. 여기서 자유의 개념은 욕망과 윤리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의 자유가 아니다. 도리어 칸트의 자유는 우리가 욕망을 배제할 수 있는 자유를 가리킨다. 동물들이 사는 자연이라는 세계에는 욕망의 원리가 불가항력처럼 작용한다. 자연의 지배 아래서 동물들은 욕망의 원리에 온순하게 복종해 행동한다. 동물들은 욕망의 원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동물들처럼 마냥 욕망의 원리에 복종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욕망의 원리에 저항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인간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예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다. 우리는 욕망의 원리와 분리된 독자적인 도덕법칙을 따를 권리를 갖는다.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로 말미암아 인간의 의지는 욕망 대신 윤리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윤리로 향한 인간의 의지는 자연히 그의 윤리적 행동으로 이어진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9, 91쪽)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실천이성의 원칙을 제시하며, 욕망이 아닌 윤리를 선택하는 인간의 의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의지와 도덕법칙의 일치. 그리고 그것을 현실화하는 실천 및 행동. 이것이 칸트가 풀어내는 실천이성의 원칙이다. 우리의 자유로운 의지는 실천이성의 사용을 가능케 만든다. 자유로운 의지가 도덕법칙을 따르고, 그 의지가 행동으로 표출되어 실천이성의 원칙이 지켜진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 말미에서 별이 빛나는 하늘과 자신 안의 도덕법칙에 감탄했다고 고백한다. 도덕법칙에 대한 그의 감탄은 인간의 의지와 보편적으로 타당한 도덕법칙의 일치를 재차 강조하는 것과 같다.

실천이성을 기준으로 욕망의 원리만을 따르는 동물의 의지와 도덕법칙을 따르는 인간의 의지가 구분된다. 인간의 의지는 무조건적으로 옳은 도덕법칙을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도덕법칙이 강제성을 내포한다는 뜻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 보편적으로 타당한 도덕법칙이 우리가 무조건 지켜야 하는 법칙임은 자명하지만, 도덕법칙은 강제성이 아닌 자율성을 함의한다. 인간은 실천이성을 통해 스스로 도덕법칙을 준수한다. 도덕법칙에 따라 실천되는 윤리적 행동은 외부로부터의 강제가 아닌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다. 도덕법칙에 따라 인간이 주체적으로 또 자율적으로 실천하는 행동이 바로 칸트가 제시하는 사람다운 행동의 참뜻이다. 이렇게 『실천이성비판』은 인간이 윤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사람은 도구가 아니야

도덕법칙에 따라 윤리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은 신의 경지에 가까워진다. 절대 불변의 존재인 신은 보편적으로 타당한 도덕법칙의 근거다. 칸트는 이론이성으로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밝혔지만 실천이성의 영역에서는 신의 존재를 상정한다. 이로써 이론 수립을 위한 지식의 차원이 아닌 윤리적 그리고 도덕적 행동을 위한 실천의 차원으로서 신의 존재가 확립된다. 비록 동물과 같이 욕망에 휘둘릴 때가 많을지라도, 인간은 도덕법칙을 의식하고 실천하는 권능을 지녔다는 점에서 신과 다르지 않다.     


이 원리는 한낱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성과 의지를 가진 모든 유한한 존재자들에게도, 아니 더 나아가서 최상의 예지자로서 무한한 존재자에게도 함께 유효하다.

(같은 책, 94쪽)     


최상의 예지자이자 무한한 존재자로 묘사되는 신은 이성과 의지를 내재한다. 도덕법칙을 의식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인간의 이성과 의지도 신의 그것과 같다. 이 지점에서 인간 고유의 존재 가치가 정립된다. 이 세상에서 욕망의 원리가 점철된 생물학적 메커니즘에 종속되지 않은 존재는 신을 제외하면 인간이 유일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여타의 피조물과는 다른 독자적인 존재임이 분명하다. 독자적인 존재로서 지위를 정립한 인간은 인격성이라는 인간 특유의 품격을 함양한다. 도덕법칙을 의식하는 이성에서 기인한 우리 인간의 인격성은 인간만이 갖출 수 있는 품격이자 자격이다. 인간은 인격성에 의거해 동물보다는 신에 가까운 존재, 즉 자유로우면서도 주체적인 존재로 거듭난다.

고로 인간은 도구가 아닌 목적 그 자체다. 사람은 도구가 아니라는 생각은 재고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당연해서 식상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사람이 왜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 대우받아야 하는지 숙고해 본 적 있는가. 너무도 당연한 생각이라 사람이 목적으로 대우받아야 하는 이유를 물으면 대다수는 대답하지 못한다. 칸트는 이 물음에 대답한다. 신과 같은 우리의 이성, 그리고 이성으로부터 확증된 인격성이 인간을 도구가 아닌 목적 그 자체로 격상시킨다고. 그렇기에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목적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아울러 우리는 상대방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을 도구로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상대방도 이성을 가진 인간이다. 우리가 인격성을 보유한 인간이기에 목적으로 존중받아야 하듯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격성을 보유한 다른 사람들도 목적으로 존중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오로지 인간만은, 그리고 그와 더불어 모든 이성적 피조물은 목적 그 자체이다.

(같은 책, 172쪽)     


칸트는 이성이라는 능력을 품은 인간의 독자적인 가치를 굳건히 다진다. 근대의 인간 이성은 많은 철학자들의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다른 쪽으로는 회의주의적인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렇듯 자리를 박탈당한 위기에 처한 이성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지지대로 삼아 힘을 가다듬는다. 인간은 이성을 토대로 행동하는 존재다. 최종적으로 칸트는 이성적 존재인 인간의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그의 존재 지위를 보다 위쪽으로 들어 올린다.          


앞에서 밝혔듯이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이성과 경험의 조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다. 인간은 이성과 경험 중 특정한 한 요소를 고집해서는 진리에 다가갈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정확히 파악한다. 칸트는 이 두 요소를 조화시킴으로써 데카르트와 흄으로 대표되는 근대 서양철학의 거대한 두 흐름을 하나로 묶는다. 더불어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윤리적, 형이상학적 문제를 고찰해 인식론의 한계를 보완한다. 첫 번째 비판에서는 손대지 못했던 윤리 혹은 도덕에 관한 의문이 두 번째 비판에서 비로소 해명된다. 『판단력비판』까지 포함한 칸트의 3대 비판서는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목소리를 내는 철학의 여러 갈래를 종합해 체계화한다.

혹자는 칸트 철학을 호수에 비유한다. 호수는 수많은 강줄기가 흘러들어 모이고, 또 수많은 강줄기가 다시 뻗어 나가는 곳이다. 호수는 서양의 철학사에서 칸트 철학이 담당하는 역할을 상징하는 메타포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전에는 여러 갈래로 나뉘었던 철학은 칸트라는 호수로 모여 합쳐진다. 또한 칸트의 독특한 철학은 이후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호수에서 다시 여러 갈래의 학문이 파생된다. 독일 관념론의 헤겔, 현상학의 후설(E. Husserl) 외에도 해석학, 분석철학, 과학철학의 사상가들 다수는 칸트의 사상적 후손들이나 다름없다. 서양철학의 흐름은 칸트를 기점으로 완전히 달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서양의 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칸트 철학은 윤리적 행동의 중요성을 새롭게 조명했다는 측면에서 우리네 삶에도 의의를 지닌다. 윤리를 따르지 않고 욕망에 굴복하는 모습. 나의 욕망 충족을 위해 주위 사람을 도구로 이용하는 모습. 이런 모습들이 초과 근무를 가장해 수당을 챙기거나 같이 일하는 사람을 이용해 귀찮은 일을 처리하는 차원의 사소한 것일지라도, 도덕법칙에 위배되는 한 우리는 이와 같은 행동을 바로잡아야 한다. 윤리 혹은 도덕을 실천하지 않는 인간은 자연에 순응하는 동물들과 다를 바 없다. 윤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사람답게 행동한다는 것과 같다. 우리는 과연 윤리적으로 행동하며 살고 있는가? 부끄럽게도 일상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 전반적으로 욕망이 윤리를 이기는 경우가 늘어나는 중이다. 칸트는 우리가 사람인 이상 사람답게 행동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욕망이 아닌 윤리를 따라 행동하라! 그것이 곧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갖춘 행동이니.          



□ 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1724~1804)

칸트는 1724년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난다. 칸트는 죽을 때까지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했으며, 한 번도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철학, 수학, 자연과학 등 다양한 학문을 두루 공부한 칸트는 졸업 후 여러 직업을 전전한다. 그는 가정 교사, 강사,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 이후 46세에 비로소 모교인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교수로 임용된다. 칸트는 대학에서 윤리학, 논리학, 물리학을 가르치며 집필 활동에도 매진해 『윤리형이상학 정초』와 3대 비판서를 출간한다. 3대 비판서 중 제일 먼저 출간된 『순수이성비판』은 많은 독자들의 오해와 비판을 사기도 했다. 그럼에도 칸트는 점차 학계의 인정을 받고,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자리매김한다.

칸트는 말년까지도 활발하게 학술적 활동을 이어가지만 1800년 무렵에는 건강이 악화된다. 결국 1804년에 8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 추천 도서

임마누엘 칸트, 『실천이성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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