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례 1.
성진이는 오늘도 입시 공부에 열중한다. 상위권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에 매진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진이는 고등학생이라면 응당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등학생은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왜? 상위권 대학으로 진학하기 위해. 상위권 대학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설정되었기에 성진이는 오늘도 공부를 게을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비단 성진이만의 생각이 아니다. 성진이 주변의 친구들도 모두 상위권 대학을 노리며 공부한다. 상위권 대학으로의 진학은 많은 고등학생의 목표이자 그들이 공부를 하는 목적인 셈이다. 모두가 같은 목적을 가지니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공부를 아무리 많이 해도 부족하다. 성진이가 입시 공부에서 손을 뗄 수 없는 이유다. 상위권 대학 진학이라는 목적은 고등학교 생활 내내 성진이를 압박한다. 성진이는 부담감을 느끼면서도 꾸역꾸역 공부에 힘쓴다. 그에게 학창 시절의 즐거움이란 사치다. 성진이는 오늘도 입시 공부에 열중한다.
사례 2.
대학에 들어오면 부담감과 의무감에서 해방될 줄 알았다. 하지만 대학 입학은 성진이에게 또 다른 부담감을 부여한다. 고등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한 결과 성진이는 원하던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학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상위권 대학 진학이라는 목적이 달성되자마자 취업이라는 새로운 목적이 생성된다. 대학생은 취업 준비를 해야 한다. 왜? 취업을 해서 돈을 벌기 위해. 새롭게 부여된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성진이는 취업 준비에 열중한다. 이제는 취업에 대한 부담감이 그를 짓누른다. 어느 순간 성진이는 의문을 품는다. “취업을 하면 부담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까?” 대답은 부정적이다. 취업을 해서 직장인이 되면 다시 또 다른 목적이 생길 것이다. 직장인은 열심히 일해야 한다. 왜? 재산을 모으기 위해. 혹여나 대출을 받아 집을 산다 해도 열심히 일해야 한다. 왜? 대출금을 갚기 위해. 삶은 목적의 연속이다. 성진이의 삶에 즐거움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네버 엔딩 미션
삶은 끝나지 않는 미션(never-ending mission)이다. 할리우드 영화 속 액션 배우의 삶을 말하는 게 아니다. 미션은 모든 평범한 현대인들에게도 주어진다. 우리는 항상 완료해야 하는 미션을 가지고 산다. 게다가 지금 여기 나에게 부여된 미션을 완료했다고 해서 모두 끝나는 것도 아니다. 미션을 완료하면 새로운 미션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래서 성진이도 삶 속에서 끊임없이 미션을 마주하는 것이다. 고등학생 성진이는 상위권 대학 진학이라는 미션을 완료해야 한다. 대학생 성진이는 취업이라는 미션을 완료해야 한다. 직장인 성진이는 재산 증식이라는 미션을 완료해야 한다. 우리의 삶은 미션으로 버무려졌다고 말해도 무리가 아니다.
미션이 부여된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목적이 생긴다는 것과 같다. 상위권 대학 진학, 취업, 재산 증식은 모두 미션이자 달성해야 할 목적이다. 목적은 “~해야 한다”라는 당위성을 수반한다.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한다. 대학을 졸업하면 취업을 해야 한다. 직장인은 재산을 불려야 한다……. 이처럼 목적이 생기는 순간 우리 삶은 당위성을 띠게 된다.
그런데 삶이 당위성이라는 색깔을 띠면서 우리에게는 부담감이 찾아온다. 삶은 끝나지 않는 미션, 즉 목적의 연속이므로 우리는 일생 동안 부담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돌이켜 보면 부담감은 아주 어릴 때부터 생겨나 지금까지 우리의 감정선과 궤를 같이해 왔다. 학생 때에는 성적의 부담감이 우리를 옥죄었다. 대학생 때에는 취업의 부담감이 우리를 둘러쌌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는 재산의 부담감이 증폭되었다.
문제는 부담감이 우리의 삶에서 즐거움을 박탈한다는 점이다. 마땅히 삶의 한가운데를 차지할 자격이 있는 즐거움이라는 감정은 부담감에게 그 자리를 빼앗긴다. 주인공의 자리를 갈취한 부담감은 우리의 삶을 괴로움으로 변질시킨다. 물론 우리는 학교에서 높은 성적을 받거나 직장에서 업무 성과를 올리는 등 목적 달성에 가까워지면 환희에 차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데 지나지 않는다. 환희의 유통기한이 끝나면 삶은 다시 목적에서 파생되는 부담감으로 버무려진다.
우스운 것은 우리에게 미션을 부여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스스로에게 미션을 강요하고 있다. 즉 나는 내가 나에게 부여하는 미션 때문에 괴로워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부담감을 어깨에 짊어지고 즐거움이라는 날개를 잘라낸 꼴이다. 우리는 미래에 달성해야 할 목적을 정하고 거기에 삶의 모든 초점을 맞춘다. 그렇게 현재의 삶은 미래의 목적을 위해 재편성된다. 요컨대 우리는 현재의 즐거움을 썩은 거름으로 삼아 미래의 꽃을 피우고 싶어 하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러한 삶의 형태를 목적론적 삶이라고 부른다. 니체는 수많은 철학자 중에서도 목적론적 삶에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즐거움으로 가득 찰 자격이 있는 인간의 삶이 목적론적 형태를 띰으로써 부담감으로 점철되는 현상을 보고 탄식을 금치 못했다. 끝나지 않는 미션 때문에 즐거움을 박탈당한 우리의 삶에, 니체는 즐거움을 되찾아 주고 싶어 한다. 미래의 목적을 위해 희생한 현재의 즐거움을 부활시키려는 것이다. 현재의 즐거움이 썩은 거름으로 부패해서는 곤란하다. 니체는 현재의 삶이 그 자체로 꽃을 피우길 소망한다.
목적론적 삶에 대한 진단서
니체는 미래의 목적이 아닌 현재의 즐거움을 추구한다. 그리고 목적론적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현재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길 바란다. 우리가 목적론적 삶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기원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의 삶은 목적론적 삶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인간은 스스로 목적론적 삶을 선택한 걸까?
니체는 목적론적 삶이라는 삶의 질병적 형태를 진단한 일종의 진단서를 발부한다. 니체가 남긴 다양한 저서 중에서도 그의 사상을 집약했다고 평가받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그것이다. 니체는 책의 등장인물이자 주인공인 현자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린다. 차라투스트라는 목적론적 삶의 기원은 종교와 이성, 두 가지라고 주장한다.
목적론적 삶의 첫 번째 기원인 종교, 특히 기독교는 중세부터 현대, 심지어 니체가 죽은 지금까지도 인간의 세계관과 사고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왔다. 그런데 기독교는 선량한 종교가 아니던가? 가난한 자와 불쌍한 자, 병든 자를 구원하는 선량한 기독교가 어째서 즐거움을 앗아 간 목적론적 삶의 기원이라는 말인가!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는 기독교에 대해 니체는 강박적일 만큼 적대감을 표출한다. 니체에 의하면 영혼의 구원을 표방하는 기독교의 이면에는 영혼의 퇴화가 자리한다. 기독교는 가난한 자와 불쌍한 자, 병든 자를 구원하는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가난한 자를 더욱 허덕이게 만들고 불쌍한 자의 처량함을 심화시키며 병든 자의 아픔을 쑤시는 종교다.
기독교의 테마는 구원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구원이라는 미래의 목적을 설정한다. 현재의 삶에 구원이라는 미션이 부여되는 것이다. 그는 구원이라는 미래의 목적에 현재의 삶을 재단한다.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순결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영혼과 대비되는 육체의 감각적 즐거움은 삶에서 가급적 지양해야 할 요소다. 육체적 쾌락은 영혼의 구원을 방해할 뿐이다. 하나님의 자식이자 종은 기도와 금식, 고행과 같은 괴로움을 통해 영혼의 순결함을 고양한다. 그는 사후라는 미래에 맞이할 구원을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한다. 그렇게 그의 영혼은 지금 이 순간을 즐겁게 만드는 육체적 쾌락을 철저히 배제한 채, 순수와 순결만으로 가득 채워진다.
결과적으로 기독교는 인간에게 목적론적 삶을 강요한다. 기독교에서 방점을 찍는 부분은 지상에 발을 딛고 선 현재의 인간이 아닌, 하늘에서 구원을 받아야 하는 미래의 영혼이다. 현재의 삶은 그저 미래의 구원을 위한 보조적 수단에 불과하다. 가난한 자와 불쌍한 자, 병든 자를 구원하겠다는 기독교의 모토는 그들을 부유한 자와 위대한 자, 건강한 자로 탈바꿈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영혼이 구원받으려면 그들의 삶은 가난하고 불쌍하며 병든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아니 그 상태를 더욱 심화시켜야 한다. 잔인하게도 하나님의 품속에서 가난한 자와 불쌍한 자, 병든 자는 갈수록 허덕이고 처량해지고 몸부림친다. 그들이야말로 현재의 즐거움을 썩은 거름으로 삼아 미래의 꽃을 피우려는 전형적인 인간 군상이다. 결국 영혼의 구원을 내건 기독교의 약속과는 다르게 그들의 영혼은 점차 퇴화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어서 목적론적 삶의 두 번째 기원으로 인간 이성을 지적한다. 여기서도 수긍보다는 의문이 앞선다. 이성은 인류 문명과 문화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가? 앞선 철학자들이 위대하다고 칭송한 인간 이성을, 차라투스트라는 왜 현재의 즐거움을 박탈하는 요소라고 비난하는 거지? 우리는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헤겔을 포함한 철학의 거장들이 인간 이성을 예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니체는 이들에게 반문한다. 과연 이성이 인간의 존재 가치를 드높이는 능력인가?
인간 이성이 지닌 위대함의 근거는 자연을 통제하고 지배하고 개발하는 능력이라는 데 있다. 인간은 이성을 가진 피조물이기에 다른 피조물을 지배하는 권능을 누린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이성이 계산하고 예측하고 발명하는 힘을 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성의 힘으로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고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킨다. 그런데 계산과 예측과 발명이라는 작업은 그 자체로 미래 지향적이다. 그러므로 이성을 활용한 문명과 문화의 발전도 그 자체로 미래 지향적이다. 이성의 시선은 현재에 머물지 않고 미래에 실현될 발전적 가치를 향한다. 이성은 미래를 건설하기 위한 계획과 법칙을 수립한다. 인간은 이성만이 수립할 수 있는 고유한 콘텐츠인 계획과 법칙을 활용해 미래를 닦아 세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목적을 설정하는 인간의 성향은 이성에 기인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일정한 계획과 법칙을 준수하면 목적은 자연스레 달성된다. 반대로 우리를 현재에 얽매이게 하는 감각과 감정은 미래의 목적 달성에 방해 요인으로 작용할 뿐이다. 그것들은 발전에 하등 쓸모가 없다. 따라서 이성은 감각과 감정을 억누르고 짓밟는다. 그리고 감각과 감정을 탄압하기 위해 윤리적 규율과 도덕법칙을 꺼내 든다. 이성의 폭정은 윤리 혹은 도덕이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포장된다. 윤리는 육체의 감각에 충실한 사람을 비윤리적이라고 힐난한다. 도덕은 생동하는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는 사람을 비도덕적이라고 비방한다. 현재에 충실하게끔 하는 감각과 감정이 통제되면서, 인간은 현재의 즐거움을 도외시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인간은 오직 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만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감각과 감정은 억제된다.
사람이 존재한 이래, 사람은 너무나도 즐기지를 못했다. 형제들이여, 이것만이 우리의 원죄렷다!
(정동호 옮김, 책세상, 2007, 146쪽)
이렇게 니체는 인간의 병명을 밝힌다. 목적론적 삶. 질병이 우리의 건강을 해치듯이 목적론적 삶은 우리의 즐거움을 해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인간이 즐기지 못하고 살아간다며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니체가 우리에게 발부한 진단서에는 병의 유발 인자도 표기되어 있다. 종교와 이성. 종교와 이성은 인간에게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하라고 종용하는 동시에 미래의 목적을 추구하라는 압력을 행사한다.
삶의 주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처방전
목적론적 삶을 강제하는 종교와 이성에 세뇌된 우리는 스스로 노예를 자처한 꼴이 되어 버렸다. 구원을 약속한 종교와 인간이 가진 최고의 능력인 이성이 실은 인간을 목적에 귀속된 노예로 격하시킨 셈이다. 니체는 이러한 현상에 반발하며 인간이 자신의 삶을 주도하는 주인이길 바란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우리는 우리 삶의 주인으로서 즐거움을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고백하고 자발적으로 이성의 통제를 받는다. 노예에게 즐거움은 어울리지 않는다. 목줄을 둘러맨 노예는 현재의 즐거움을 참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한다. 현재의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 노예는 미션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휩싸인다. 이 목적론적 삶이라는 난치병은 아직까지도 완치되지 않고 고스란히 전해 내려왔다. 이 연유로 현대인들도 즐거운 순간을 보내면 시간을 낭비했다는 죄책감에 휩싸이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활동에 자신의 모든 시간을 내던진다.
다행히 니체는 진단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처방전도 같이 첨부한다. 우선 그는 현재의 즐거움을 희생시키는 종교와 이성에 종말을 고한다. “신은 죽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니체의 이 한 마디는 기독교적 가치와의 결별을 선언하는 명언이다. 이어서 니체는 인간은 옭아매는 이성을 거부하고 우리 안에 요동치는 감각과 감정을 찬양한다. 사슬에서 해방된 감각과 감정은 인간의 삶을 지배했던 종교와 이성의 역할을 대체한다.
니체는 종교와 이성에 앞서 감각과 감정에 충실하라고 강조한다. 그는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라는 표현으로 이를 구체화한다. 여기서 니체가 말하는 힘은 감각과 감정을 포함한 육체적 활력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삶의 주도권을 잡는 힘과 자신만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힘을 아우른다. 한마디로 힘에의 의지에서의 힘은 주체성의 힘이다. 고로 힘에의 의지는 일차적으로는 감각과 감정을 포함한 순수한 육체적 활력을 추구하는 의지이고, 이차적으로는 강력한 주체성을 표방하고자 하는 의지다. 종교와 이성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한 이 시점에서 이제 힘에의 의지가 인간의 삶을 이끌어 나간다.
인간은 본래 힘에의 의지를 마음껏 발산하는 존재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힘에의 의지를 가진다. 억눌렸던 힘에의 의지를 발산함으로써 인간은 노예의 지위를 벗어나 자기 삶의 주인으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힘에의 의지를 자각하고 표출하는 인간은 종교와 이성이라는 기존의 가치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낸다. 새로운 가치의 기준이 되는 것은 현재의 자기 자신이다. 그는 현재 자신의 감각과 감정이 동조하는 가치를 일직선으로 고수한다. 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주변의 이성적인 조언은 더 이상 그의 귓속에 머물지 않는다. 미래의 목적에 현재의 삶을 끼워 맞추지 않고 오로지 현재의 삶에 집중함으로써 상실했던 삶의 주도권이 되살아난다. 니체의 처방전을 따른 결과 목적론적 삶에서 탈피하게 되는 것이다. 힘에의 의지를 표출하는 인간은 지금 살고 있는 이 순간만을 긍정한다. 미래의 목적에 대한 부담감으로부터 파생된 괴로움은 자취를 감춘다. 괴로움이 사라진 빈자리를 현재의 즐거움이 다시 채운다.
힘에의 의지에 따라 자기 삶의 주도권을 잡은 사람을 니체는 위버멘쉬(Übermensch)라고 칭한다. 위버멘쉬는 니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위버멘쉬는 힘에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며 삶의 주인으로 존립한 강인한 인간을 가리킨다. 독일어 ‘Übermensch’의 뜻을 풀어보면 그 의미는 더욱 선명해진다. ‘Übermensch’는 상승의 뜻을 나타내는 ‘über’와 인간을 의미하는 ‘Mensch’의 합성어다. 굳이 영어로 직역하면 ‘Overman’이다. 뜻풀이로 미루어 짐작하면 위버멘쉬는 무궁무진하게 자신의 가치를 드높이는 인간이다. 그는 순간순간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며 자신의 지위를 상승시킨다. 차라투스트라는 우리에게 외친다.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 주인의 신분으로 발돋움하라! 이로써 우리는 생명력 넘치는 삶의 주인인 위버멘쉬로 자리매김한다.
새로운 소란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세계는 돈다. 소리 없이 그렇게 돈다.
(같은 책, 222쪽)
니체는 자신만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세계가 구성된다고 서술한다. 세계의 중심에는 주인공이 자리 잡는다. 니체 철학에서, 세계의 주인공은 신도 지성인도 아닌 현재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인간이다. 종교와 이성이 말살시킨 힘에의 의지를 되살린 우리는 드디어 주인으로서의 자유를 쟁취한다. 우리는 더 이상 감각과 감정을 따르는 데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또 현재의 즐거움을 부정할 필요도 없다. 기존에 강요되던 이성과 종교라는 가치에 순응할 필요 또한 없다. 목적론적 삶에서 벗어나 삶의 주인으로 거듭난 인간은 강력한 주체성을 발휘한다. 주체성을 바탕으로 내가 창조한 새로운 가치에 따라 나를 둘러싼 세계도 재구성된다.
목적론적 삶을 살아가던 인간의 표정은 음울했다. 그의 삶은 “~해야 한다”라는 당위성으로부터 비롯된 부담감의 연속이었다. 부담감을 느끼니 삶은 즐겁지 않다. 삶이 즐겁지 않으니 기분은 우울하다. 그러나 이제 즐거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표정은 명랑하다. “~할 것이다”라는 주체성으로부터 생명력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생명력 넘치는 삶은 즐겁다. 즐거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표정은 명랑할 수밖에 없다. 무한한 자유로움을 향유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자인 위버멘쉬는 즐겁게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해야 한다”라는 의무의 당위성에서 벗어나 “~할 것이다”라는 의지의 주체성으로의 진입이 이루어진다.
종교와 이성은 서양철학의 뿌리를 구성하는 핵심 가치였다. 절대 불변의 신이 선사한 위대한 능력인 이성은 인간 고유의 가치를 정립하는 근거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니체 이전의 철학자들은 모두 종교와 이성이라는 두 가지 가치를 포기하지 못했다. 하지만 니체는 종교와 이성을 핵심 가치로 여기지 않는다. 심지어 두 요소가 오히려 인간에게 노예의 신분을 강제했다고 비판한다. 이로써 플라톤-데카르트-칸트-헤겔로 이어지는 이성주의 철학의 전통이 참혹하게 부서진다. 수천 년의 명맥을 이어 가던 서양철학의 핵심 줄기는 니체에 이르러 그 흐름이 끊겨 버리는 것이다. 니체가 기존의 거대한 흐름을 해체시킨 덕에, 니체 이후의 철학은 정해진 하나의 가치가 아닌 다양한 독자적인 가치를 내세우며 등장하게 된다.
니체 철학의 파급력은 비단 철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니체 철학이 확산되자 사람들의 사고방식에도 대전환이 일어난다. 종교를 통한 구원과 이성을 통한 진보는 근대인들의 목적이었다. 미래의 구원과 진보를 향해 현재를 희생시키는 것은 근대적 삶의 전형이었다. 그런데 니체로 인해 전통적 사고방식이 박살 나면서 당연시되었던 미래 지향적 사고방식도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다. 니체 철학은 사람들로 하여금 오랜 세월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종교와 이성이라는 중심적 가치가 사실은 오답일 수도 있겠다는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이 말인즉슨 감각과 감정처럼 오답이었던 주변적 가치가 새로운 정답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때부터 시대는 본격적으로 현대로 진입한다. 근대를 지난 현대에서는 중심적 가치라는 하나의 큰 덩어리가 분해되고, 뒷전으로 밀려났던 주변적 가치가 재조명된다. 미래가 아닌 현재를 중시하는 현대인들의 일부 성향도 이러한 변화에 기인한다. 절대적으로 옳은 중심적 가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근대와는 다른 현대의 새로운 사고방식이다. 니체 철학은 철학이라는 분야를 넘어 사람들의 사고방식 자체를 뒤바꾼 혁명적인 철학이다.
니체는 현대의 문을 연다. 사람들의 외면을 받았던 비주류 문화가 새로운 문화적 가능성으로 여겨지는 현상도 현대에 이르러 나타났다. 이렇게 니체가 촉발한 시대적 물결을 근대 이후 새로운 경향을 띤다는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고 부른다. 니체 철학은 하이데거, 데리다(J. Derrida), 푸코(M. Foucault)를 비롯한 다수의 현대 철학자에게는 물론,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포스트모던 문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경제나 경영, 행정을 포함한 실용적인 분야에도 응용되는 등 니체 철학은 현재까지도 현대인들의 일상 곳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얼마 전부터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현재에 충실하라”고 번역되는 이 말은 흥청망청 유흥을 즐기라는 소비적인 뉘앙스로 곡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니체에 의하면 현재에 충실한 삶은 방탕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 현재에 충실하라는 메시지는 미래의 목적만을 바라보는 목적론적 삶이 아닌 현재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주체적인 삶을 살라는 말이다. 주변 사람들이 상위권 대학 진학, 취업, 재산 증식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의 목적을 똑같이 자신의 삶에 투영할 필요는 없다. 왜 타인에게 삶의 주도권을 넘기는가?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어 현재 마음이 이끌리는 가치를 고수한다면 우리네 삶은 보다 즐거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니체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찬미한다. 술은 향유자를 도취시킨다. 술에 취하듯 현재에 도취되어 즐거워하는 삶. 이러한 삶에서 위버멘쉬의 새로운 가치가 창조된다. 자신이 창조한 가치로 채워진 삶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나 다름없다. 이제부터라도 삶의 즐거움을 위해 다 같이 건배하자!
□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 1844~1900)
니체는 1844년 독일 뢰켄에서 태어난다. 어릴 때부터 학문, 언어,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드러내지만, 아버지가 일찍 죽어 불안정한 환경에서 자란다.
그럼에도 본 대학에 입학해 학업을 이어 나가던 니체는 스승인 리츨(F. W. Ritschl)을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적을 옮긴다. 이때 그는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 철학에 이끌림과 동시에 작곡가 바그너(W. R. Wagner)와 어울리며 많은 영향을 받는다.
이후 니체는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교수로 일한다. 그러나 두통과 위장병, 심지어는 시력 감퇴까지 겪어 건강이 악화된다. 결국 35세에 교수직에서 물러난 니체는 집필 활동에 집중한다. 니체는 죽기 직전까지 활발한 집필 활동을 펼치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등 유명한 저서를 출간한다.
정신 질환까지 앓아 더욱 건강이 악화된 니체는 1900년 죽음을 맞는다.
※ 추천 도서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옮김, 책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