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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필은 Nov 01. 2022

<고전정신> 문학1.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사례 1.

진서 씨의 삶에는 원래 아무런 걱정도 없었다. 가정은 화목했고 직장에서의 커리어는 안정적이었다. 그러다 비극은 갑자기 닥쳤다. 가끔씩 찾아오던 빈혈이 잦아지더니 몸이 피로해지며 일상생활이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병원에 찾아간 진서 씨는 충격을 받았다. 검사 결과 백혈병 판정을 받은 것이다! 진서 씨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화목한 가정은 암울해졌고 일을 하지 못하니 직장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락으로 굴러떨어진 진서 씨는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우울해졌다. 병은 점차 심화되었다. 그러나 진서 씨는 한 가닥 희망마저 놓지는 않았다. 그녀는 끈기를 발휘해 기약 없는 투병 생활을 견뎌 냈다. 몇 년에 걸쳐 병마와 싸운 결과 드디어 그녀는 백혈병을 극복해 냈다. 이제 건강한 몸으로 되돌아왔다. 진서 씨는 비록 직장을 잃었지만, 투병 경험을 살려 강연을 하고 책을 출판하며 새로운 활동을 시작한다. 그녀의 사연은 널리 알려진다. 유명인이 된 진서 씨는 백혈병을 앓기 전보다 활기찬 삶을 산다. 비극이었던 백혈병은 시간이 지나 어느새 새로운 행복의 자양분이 되어 있었다.     


사례 2.

디자인팀에서 일하는 서영 씨는 어느 날 크나큰 행운을 맞는다. 마케팅팀 직원 중 한 명이 갑작스레 퇴사하는 바람에 내부채용 공고가 올라온 것이다. 입사할 때부터 마케팅 업무를 하고 싶었던 서영 씨다. 그녀는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해 디자인팀으로 입사했지만 호시탐탐 마케팅팀으로의 이동을 노리고 있었다.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그녀는 내부채용에 지원해 마케팅팀으로 이동하는 데 성공한다. 고대하던 마케팅 업무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서영 씨의 기대는 한껏 높아진다. 그런데 그게 비극의 시작일 줄 누가 알았을까! 마케팅 업무는 생각했던 것과 달라 서영 씨는 적응하기 힘들어한다. 자꾸만 업무에 누락이 생긴다. 서영 씨 때문에 업무에 차질이 발생하자 마케팅팀 동료들은 그녀에게 눈치를 주기 시작한다. 디자인팀에서는 말도 없이 다른 팀으로 이동한 서영 씨를 아니꼽게 생각한다. 서영 씨에게 크나큰 행운이었던 마케팅팀으로의 이동은 결과적으로 그녀의 직장 생활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친부 살인자 그리고 근친상간자

뜻하지 않게 일이 잘 풀리는 때가 생긴다. 그러다 삶은 갑작스레 머리를 돌려 반대로 향한다. 뜻하지 않게 일이 안 풀리는 때도 생긴다. 우리에게 길하게만 여겨졌던 사건이 흉한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반대로 흉하게만 다가왔던 사건이 길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행운은 갑자기 불행이 되고 불행은 또다시 행운이 된다. 비극은 희극으로 희극은 비극으로 뒤바뀐다.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더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이 결국 비극으로 이어질지 희극으로 이어질지는 그 어떤 이도 예측할 수가 없다. 그것은 순전히 신의 영역이다. 인간은 비극적 사건과 희극적 사건을 구분하지 못한다.

진서 씨와 서영 씨의 사례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지만, 한 길 사람 속보다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삶이다. 삶은 사람보다 파악하기 힘들다. 백혈병이 진서 씨 삶에 행복의 자양분이 될지, 그리고 고대하던 마케팅팀으로의 이동이 서영 씨에게 불행이 될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이렇듯 운명은 어느 순간 우리의 삶을 엄습한다. 우리의 삶에서 불행이 예기치 않은 선물을 선사하기도 하고, 행운이 갑자기 돌변해 나의 등에 비수를 꽂기도 한다. 역사 속 인물들의 일대기를 살펴보라. 두려울 것 없는 삶을 살다가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는 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천하를 호령하며 전성기를 누리던 위대한 권력자들이 초라한 마침표를 찍는 사례는 얼마든지 발견된다. 필시 인간의 삶은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서 짓눌리는 그 무엇일 것이다.

전성기를 누리다가 비극적 최후를 맞는 역사 속 위인은 셀 수 없을 정도다. 그중에서도 단연 오이디푸스(Oedipus)보다 비극적인 삶을 산 인물은 드물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누구보다도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서 철저히 갇혀 살았던 사람이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운명은 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Sophocles)가 쓴 『오이디푸스 왕』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오이디푸스 왕』은 그리스 도시국가 테바이의 왕인 오이디푸스가 비극적 최후를 맞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오이디푸스 비극은 오이디푸스 신화를 모티브로 삼으므로, 소포클레스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오이디푸스 신화를 알아야 한다.

오이디푸스 이전에 테바이의 왕은 원래 라이오스였다. 라이오스는 왕비 이오카스테와 함께 소름 끼치는 신탁을 듣는다.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태어날 아들이 후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이라는 신탁이다. 축복이자 선물인 아들이 친부 살인자이자 근친상간자가 된다니! 충격에 빠진 부부는 아기를 낳자마자 두 발에 꼬챙이를 꿰어 내다 버린다. 아들은 예비 친부 살인자 및 근친상간자고 부모는 영아 유기범이니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다행히 아기는 구조되어 인접한 도시국가 코린토스로 보내진다. 코린토스 왕과 왕비는 아기에게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그를 양아들로 삼는다.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오이디푸스는 우연히 자신에 관한 신탁을 알게 된다. 『오이디푸스 왕』에서도 그는 탄식한다.     


내가 어머니와 몸을 섞게 될 것이며, 인간들이 참고 볼 수 없는 자손을 낳게 될 것이고, 내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를 살해하리라는 거요.

(강대진 옮김, 민음사, 2009, 70~71쪽)     


오이디푸스는 부모인 코린토스 왕과 왕비를 해칠까 염려해 도시를 떠난다. 그러다 여정 중에 라이오스 왕과 그의 하인들을 만나 시비가 붙는다. 라이오스는 오이디푸스가 아기였을 때 죽었다고 확신했고, 오이디푸스 또한 아기 때의 기억이 남아 있을 리가 없으니 둘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 결과 오이디푸스는 다툼 끝에 친부 라이오스를 죽이고 만다. 비극적이게도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리라는 신탁은 현실화된다. 계속해서 길을 떠난 오이디푸스는 이번엔 괴물 스핑크스와 마주친다. 스핑크스는 지나가는 테바이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맞히지 못한 사람을 잡아먹기로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똑똑한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단번에 풀어낸다. 이에 수치심을 느낀 스핑크스는 자결한다. 라이오스의 죽음으로 왕을 잃은 테바이는 괴물을 처치한 오이디푸스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다. 라이오스의 부인이었던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와 재혼한다. 물론 두 사람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렇게 오이디푸스는 친부 살인자이자 근친상간자가 된다.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예지했던 신탁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다.     


운명의 손바닥 안에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들은 제각기 독특한 운명을 걸머지지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유달리 독특하다. 그래서인지 오이디푸스의 독특한 운명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정신분석학을 고안한 프로이트는 아버지에 적대하고 어머니에 애착하는 남자아이의 무의식적 충동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로 명명하기도 했다. 소포클레스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 3대 비극 작가로 일컬어지는 아이스킬로스(Aeschylos), 에우리피데스(Euripides)도 오이디푸스 신화를 바탕으로 작품을 쓴 바 있다. 그리스 비극 중에서도 빼어난 완성도를 자랑하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또한 이러한 신화적 맥락에서 시작한다.

『오이디푸스 왕』은 앞서 말한 대로 친부 살인자이자 근친상간자인 오이디푸스의 운명이 어떻게 삶을 비극으로 뒤바꾸는지를 묘사한다. 작품 속에서 오이디푸스가 통치하는 테바이는 암울한 상황에 처해 있다. 도시 안의 누군가가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러 테바이에 저주가 내려진 것이다. 테바이에는 전염병이 돌고 불행한 사건이 잇따라 일어난다. 주인공 오이디푸스에게는 과업이 주어진다. 도시의 저주를 풀기 위해 범죄를 저지른 이를 찾아 처단해야 한다. 그 범인은 오이디푸스 이전 테바이의 왕이었던 라이오스를 죽인 자다.

우리는 이미 오이디푸스 신화의 내용을 알기에 초반부인 이 시점에서부터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최후를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자신을 비롯한 작품 속 인물 대부분은 라이오스를 죽인 범인이 오이디푸스라는 사실도,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모르는 상태다. 살인은 도시 밖에서 일어났으며, 오이디푸스는 아기였을 때 버려졌으므로 생김새로 알아보기에는 세월이 많이 흘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미 운명의 변주는 시작되었다. 라이오스를 죽인 범인 오이디푸스는 역설적이게도 범인을 찾아 자신의 손으로 처단하겠다고 호언장담한다. 피의자가 판관으로서의 결의를 다지는 꼴이다.

한편 범인을 색출하기 위한 조사가 시행되는 내내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참말이면서 거짓말이다. 오이디푸스는 자기가 여정 중에 어떤 남자를 죽인 일만 기억할 뿐 그 남자가 라이오스였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한다. 이러한 점에서 오이디푸스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은 라이오스가 살아나지는 않는다.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를 죽였다는 진실은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사실 관계를 따지면 오이디푸스의 주장은 거짓말로 수렴한다.     


그대는 영원히 이어지는 밤 속을 헤매고 있구려.

(같은 책, 43쪽)     


비록 착각이지만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를 본 적이 없다고 굳게 믿는다. 그래서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를 죽인 살인자로 자신을 지목한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에게 매섭게 쏘아붙인다. 테이레시아스에게 영원히 이어지는 밤 속을 헤맨다고 비꼬는 오이디푸스의 말은 어딘가 우습다. 그는 저 한 문장으로 테이레시아스가 장님이라는 점과 예언자임에도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런데 진실은 완전히 정반대다. 오히려 오이디푸스가 앞을 못 보는 장님보다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런 그가 진실을 똑바로 바라보는 테이레시아스에게 밤 속을 헤맨다고 비아냥댔으니 얼마나 우스운가. 정작 밤 속을 헤매는 사람은 오이디푸스 자신인데 말이다.

분위기는 클라이맥스로 치달으면서 점점 고조된다. 극이 전개될수록 사건의 진상이 조금씩 밝혀진다. 라이오스 살인 사건을 목격한 라이오스의 하인과, 오이디푸스가 코린토스 왕의 양아들이라는 사실을 털어놓는 코린토스의 사자는 진실을 가리는 장막을 한 꺼풀씩 벗겨 낸다. 그들의 증언을 들으면 들을수록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얼굴을 내민다. 라이오스를 죽인 살인자가 오이디푸스라는 진실, 라이오스는 오이디푸스의 아버지라는 진실, 왕비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의 어머니라는 진실. 이렇게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운명은 처절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오이디푸스의 운명이 띠는 비극성은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파생되는 것이 아니다. 소포클레스가 비극적 사건만을 묘사해 오이디푸스의 비극성을 강조했다면 『오이디푸스 왕』은 그저 그런 비극에 그쳤으리라. 오이디푸스의 비극성은 사건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증폭된다. 오이디푸스의 운명이 특히나 비극적인 이유는, 라이오스 이오카스테 부부와 아들 오이디푸스가 신탁의 실현을 막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결국에는 비극적 사건이 벌어졌다는 데 있다.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는 자신들의 귀한 아기와 생이별할 수밖에 없었다. 오이디푸스도 사랑하는 양부모를 제 발로 떠났다. 그러나 그들이 별짓을 다 했음에도 운명은 무섭도록 다가와 일가족에게 비극을 선사했다.

빠져나가려면 빠져나갈수록 더 깊이 빠지는 늪처럼 오이디푸스의 운명도 피하면 피할수록 더욱 현실이 되었다. 그 어떤 노력으로도 친부 살인자이자 근친상간자로서의 정해진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오이디푸스의 운명이 띠는 비극성은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내재적 속성에 기인한다. 오이디푸스가 어디로 도망치든 그는 운명의 손바닥 안에서 맴돌 뿐이다.     


부은 발의 슬픔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서 짓눌린 삶은 오이디푸스 개인의 삶에 한정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운명에서 도망치지 못하는 존재다. 이는 인간이 태생적으로 짊어지는 존재적 한계다. 오이디푸스는 그저 운명을 피하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표본이다.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라도 인간은 인간이다. 특출한 능력을 발휘한다고 해서 인간이 신으로 거듭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코린토스의 왕자이자 스핑크스를 물리친 강력한 성군(聖君) 오이디푸스도 어찌 됐든 인간에 불과했다.     


지금 저나 이 아이들이 그대의 화덕 가에 앉은 것은 당신을 신들과 대등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당신이 인생에 늘 있는 재난들에서나 신적인 일들을 처리하는 데서나 인간들 중 으뜸이라고 판단해서입니다.

(같은 책, 21쪽)     


같은 맥락에서 오이디푸스에게 도시에 닥친 재난을 해결해 달라고 간청하는 사제들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오이디푸스를 인간들 중 가장 뛰어난 인간이라고 칭송한다. 그러면서도 그가 신과 대등한 존재는 아니라고 못을 박는다. 사제들의 말에서 추론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오이디푸스가 제아무리 인간 중에서 현명하고 지혜롭다 해도 숨겨진 진실 앞에서는 무지하다. 제아무리 뛰어나고 강하다 해도 닥쳐오는 운명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오이디푸스 왕』을 통해 운명 앞에서의 인간의 무기력함을 강조하려는 소포클레스의 의도는 인간을 뜻하는 상징인 ‘발’의 반복적인 등장에서도 포착된다. 발은 직립 보행을 하는 인간의 두드러지는 신체적 특징이다. 인간이 두 발을 이용해 직립 보행을 한다는 말은 두 손이 땅에서 떨어져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유로운 두 손을 활용해 도구를 창조하고 자연을 지배해 왔다. 직립 보행은 자연에 순응하기만 하는 동물과는 차별화된 인간 고유의 특징인 셈이다. 따라서 땅에 붙어 있는 동물의 네 발과 직립 보행을 하는 인간의 두 발은 애초에 성질이 다르다. 인간의 발은 창조의 기관인 손과 대비되는 기관이면서 손에 자유를 부여하는 전제 조건이다. 그렇기에 소포클레스가 작품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시키는 발은 곧 인간을 함의한다. 널리 알려진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인 “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오이디푸스의 해답도 “인간”이었다.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인간을 가리키는 상징인 발과 연결시킨다. ‘오이디푸스’라는 이름부터가 ‘부은 발’이라는 뜻을 지닌다. 오이디푸스의 이름은 일차적으로 그가 아기였을 때 두 발에 꼬챙이가 꿰어져 생긴 상처로 발이 부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그러나 소포클레스의 비극에서 오이디푸스의 이름이 지닌 의미는 상처의 후유증 이상이다.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의 이름으로 인간을 함의하는 상징인 발이 부었음을 나타냄으로써,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서 짓눌린 인간 오이디푸스의 한계를 암시한다. 나아가 직립 보행을 하는 존재인 인간 모두가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슬픈 진실을 드러낸다.

우리는 친부 살인자이자 근친상간자인 오이디푸스를 보며 혐오의 감정보다는 슬픔의 감정을 느낀다.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죄인 오이디푸스의 모습을 보고 우리가 슬픔에 매료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서 짓눌린 오이디푸스의 삶이 우리의 삶에 그대로 투영되기 때문일 것이다. 운명에 패배하는 그의 모습은 흡사 다가오는 운명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우리의 모습을 반영한 듯하다. 우리는 오이디푸스의 삶에서 우리 스스로의 삶을 목격한다.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의 삶을 통해 궁극적으로 운명 앞에서 보이는 인간의 한계를 표현한 것이다. 운명은 우리의 삶에 거부할 수 없는 힘을 미친다. 그 누구도 예외는 없다. 우리 인간은 수레바퀴 아래서 짓눌린 삶의 예측 불가능성을 피하지 못한다. 운명과의 대결에서 인간은 언제나 패배자로 남는다. 이는 거부할 수 없는 우리의 숙명이다.          



상술했듯이 소포클레스는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와 함께 고대 그리스 3대 비극 작가로 거론된다. 당시 비극 작가들 중에서도 소포클레스는 작품성이 월등한 작가로 손꼽혔다. 동시대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와 헤겔 등 여러 시대의 사람들이 소포클레스의 작품을 비극의 정수라고 평가했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 경연 대회에서 소포클레스 비극의 인기는 대단했다. 소포클레스는 요즘으로 따지면 드라마계의 스타 작가와 비슷했다.

스타 작가의 대표작인 『오이디푸스 왕』은 우리에게 삶이란 것의 민낯을 공개한다. 보통 우리는 삶은 통제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삶이란 온갖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주체적으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대상이다. 어려움을 물리치고 종국에는 행복한 삶을 사는 영웅 이야기는 우리 삶의 모범이다. 우리는 삶을 주도하는 자신에게 비극적 운명은 닥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왕』은 삶에 자만하는 우리에게 겸허함을 주문한다. 오이디푸스를 보라! 인간의 삶은 우리의 손아귀가 아닌 운명의 손바닥 안에 위치한다. 인간의 삶은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서 짓눌리는 삶이다. 받아들이기 힘들 만큼 슬프지만 그것이 진실이다.

우리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가 사소한 실수로 미끄러지는 유명인들의 소식을 흔히 접한다. 매스컴을 타는 유명인들의 삶은 뒤죽박죽인 경우가 많다. 황금기를 구가하던 톱스타가 스캔들 하나로 대중들에게 잊히는가 하면, 위세를 떨치던 정치인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국민들의 손가락질을 받는다. 우리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전성기를 누리는 한편 시간이 지나면 비루하고 우울한 시기가 찾아온다. 삶은 고저를 오르내린다. 이는 우리의 나약한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전적으로 운명의 뜻이다. 그러니 자신이 현재 꽃길을 걷는다고 해서 자만하지 말자. 인생사는 알 수 없다. 인간은 항상 운명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운명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다.          



□ 소포클레스 (Sophocles, BC 496~406 추정)

소포클레스는 기원전 496년 그리스 아테네 인근의 콜로노스 지역에서 태어난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덕에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그는 외모까지 아름다워 많은 인기를 얻는다.

소포클레스는 기원전 468년 비극 경연 대회에서 난생처음 우승을 거머쥔다. 이를 시작으로 꾸준한 창작 활동에 매진해 『아이아스』,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왕』 등 120여 편에 이르는 작품을 남긴다. 또한 이후의 비극 경연 대회에서도 20여 회에 이르는 우승을 차지한다. 많은 비극을 창작한 동시에 작품의 완성도까지 빼어난 소포클레스는 비극이라는 장르의 수준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계에서도 다양한 직책을 수행한 소포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의 신뢰를 받는다. 이렇듯 창작 활동과 정계 활동을 활발히 이어나간 그는 기원전 406년 아테네에서 눈을 감는다.        


  

※ 추천 도서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강대진 옮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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