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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필은 Nov 02. 2022

<고전정신> 문학3. 마음껏 방황해도 괜찮아

괴테의 『파우스트』

사례 1.

요즘 지수 씨는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회사에서의 생활이 즐겁지 않아서다. 상사가 괴롭히거나 동료와의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의 직장 내 대인 관계는 원만한 편이다. 게다가 지수 씨는 회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사원이다. 아직 주니어 연차밖에 되지 않았지만 주변에서는 이미 그녀가 팀 내 핵심 인재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기까지 한다. 결점이라고는 없는 그녀인데 대체 왜 회사에서의 생활이 즐겁지 않을까? 지수 씨는 맡은 업무가 자신의 적성이나 성격과 맞지 않는다고 느낀다. 일을 잘하는 것과 일이 잘 맞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인 것이다. 자신에게 보다 적합한 분야를 찾기 위해 지수 씨는 틈틈이 다양한 영역을 공부한다. 난생처음 학원에서 코딩을 배워 보기도 하고 디자인 툴에도 도전해 본다. 아예 퇴사를 하고 카페를 차릴까 해서 바리스타 자격증도 준비한다. 그러나 이 모든 활동들도 지수 씨의 결핍감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지수 씨의 우울한 방황은 끝나지 않는다.     


사례 2.

수환 씨는 최근에 정년퇴직했다. 30년 넘게 한 직장을 다닌 수환 씨는 퇴직하며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의 청춘과 온 에너지를 바쳐 직장에 헌신했던 수환 씨다. 그만큼 열심히 다녔던 직장이기에 수환 씨는 퇴직하는 순간 그 어떤 후회도 남기지 않았다. 시원섭섭함과 뿌듯함, 그리고 자부심까지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후에 생겼다. 퇴직 후 직면한 무한한 시간의 공백 앞에서 수환 씨는 아득한 기분에 휩싸인 것이다. 여태까지는 언제나 직장에서 할 일이 있었는데 지금은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갑작스럽게 주어진 자유를 수환 씨는 감당하기가 힘들다. 그는 무한한 시간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아무 활동이나 닥치는 대로 시도한다. 사소하게 동네 골목을 청소하는 일부터 새로운 직장에 이력서를 내는 일까지. 이 모든 활동에도 수환 씨의 막막함은 이어진다. 수환 씨의 아득한 방황은 끝나지 않는다.          



어른들도 방황한다

방황은 비단 비행 청소년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비록 표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지는 않더라도, 사춘기를 겪는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내면에서 마음의 방황을 겪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방황이라는 상태는 학교와 가정이라는 안전장치를 갖춘 청소년만의 특권인가? 꼭 그렇지도 않다. 어른들도 방황한다. 성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방황하지 말란 법은 없다. 오히려 안전장치 없이 사회에 내던져진 어른들은 방황의 범위가 청소년보다 넓다. 청소년들의 방황은 주로 친구와의 관계나 진로에 대한 고민, 학업에서의 성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면 성인은 어떠한가. 그들의 방황은 인간관계와 직업에 대한 고민, 업무 성취도는 물론이고 경제, 사회, 정치 등 거시적인 영역까지 뻗어 있다. 청소년도 어른도 방황한다. 말하자면 방황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상태이자 전 생애를 관통하는 하나의 실존적 문제인 셈이다.

방황하는 인간은 묻는다. “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표준적인 질문은 각 개인의 상황에 맞게 구체화된다. “대학을 졸업하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혹은 지수 씨처럼 이렇게 묻기도 한다. “내가 이 직업을 잘 선택한 건지 모르겠어요.” 수환 씨는 아마 이렇게 토로할 것이다. “퇴직한 이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합니다.”

이들의 모습은 마치 삶이라는 배의 방향키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며 괴로워하는 조타수의 모습이다. 방황하는 인간은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거니와, 만약 어떤 일에 착수하더라도 잘하고 있는 것인지 몰라 끝없는 의문에 빠진다. 방황하는 우리의 삶은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배와 같다. 방황은 방황의 주체에게 삶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연속해서 부여한다. 그 결과 방황하는 인간은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앞서 카뮈는 『페스트』를 통해 우리에게, 자신의 할 일을 꾸준히 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빛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 자신이 어떤 일을 해야 할지도 몰라 방황하는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는 것인가? 방황은 인간이라면 반드시 벗어나야 할 비정상적인 상태인가? 이러한 의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그런데 머릿속 의문을 명쾌하게 풀어 주는 해답이 있다. 우리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독일의 대문호 괴테(J. W. von Goethe)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괴테는 방황이 비정상적인 상태라는 견해에 단호하게 반대를 표한다.

개인의 방황은 시대가 어지러울수록 심해진다. 따라서 혼돈의 시대인 현대를 사는 현대인들의 방황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방황이 청소년만의 특권이 아니듯이 혼돈도 현대만의 특징이 아니다. 괴테가 살았던 시대 또한 우리가 사는 현대 못지않게 어지러웠다. 그가 살았던 18세기, 19세기 독일은 사회와 문화를 아우르는 모든 면에서 혼돈의 지배 아래 놓인 시대였다. 어떤 측면에서는 지금 우리를 뒤흔드는 현대의 혼돈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다. 7년 전쟁,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Napoléon I)의 등장 등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자취를 남긴 역사적 사건이 모두 괴테가 살았던 시대에 일어났다. 세계사적 혼돈은 괴테의 나라인 독일에도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시간이 흐를수록 독일의 혼란이 만연해져 갔다. 시대의 혼돈은 예술의 변화도 촉발하는 법이다. 사회적 혼란과 더불어 독일의 문예 사조도 다변화되는 경향을 띠었다. 르네상스 이후 확산된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인간의 타고난 천재성을 맹신하는 질풍노도(Sturm und Drang) 운동, 고대 그리스의 아름다움을 재현하려는 고전주의, 자아의 추상적인 내면세계를 그리는 낭만주의가 뒤섞였다. 괴테는 사회의 혼란과 문화의 혼재가 공존하는 혼돈의 시대를 겪은 것이다. 혼돈의 시대 속에서 괴테도 우리처럼 몸부림치고 방황했으리라. 추측하건대 아마도 괴테는 혼돈의 시대를 살았던 대표적인 방황의 아이콘일 것이다.

그렇다면 방황이 초래하는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상태가 괴테에게도 찾아왔을 것은 분명하다. 혼돈의 시대 속에서 인간의 방황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는 괴테가 『파우스트』라는 대작을 집필하는 60년 동안 끈질기게 파고들었던 문제였다. 청년이었던 시절 처음 쓰기 시작해 죽기 직전에 완성한 『파우스트』에는 괴테의 삶 전반이 녹아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괴테 문학의 정수인 『파우스트』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겪는 방황의 의미를 고찰할 수 있다.     


세상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의 자화상

세상이 우리를 방황의 한복판에 두고, 혼돈의 시대가 괴테를 시대의 한가운데에 놓은 것처럼,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는 세상 속에서 방황하는 인물인 학자 파우스트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천국의 하나님에게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악마가 찾아오면서 이야기의 막이 오른다. 절대선(絶對善)인 하나님과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그 존재에서부터 극명하게 대조된다. 그래서인지 둘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극단적인 차이를 나타낸다. 하나님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설사 방황하더라도 타락하지 않고 옳은 방향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메피스토펠레스는 다르다. 그는 악마답게 인간은 방황하면 타락할 수밖에 없는 추한 존재라고 떠든다. 인간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 팽팽하게 대립한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발칙하게도 하나님에게 내기를 제안한다. 지상에 살고 있는 파우스트를 꾀어내 타락시켜 보겠다는 제안이다. 하나님은 흔쾌히 불청객의 제안을 수락한다. 온갖 유혹 속에서 파우스트는 과연 옳은 방향을 찾을 것인가 아니면 타락하고 말 것인가. 하나님과 악마는 파우스트의 타락 여부를 두고 내기에 돌입한다.

그들이 내기 대상으로 삼은 가련한 파우스트는 평생 동안 학문의 진리를 탐구한 노인이다. 그는 진리를 찾기 위해 백발이 될 때까지 학문에 매진했으나, 인간은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결론만을 얻은 채 좌절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메피스토펠레스가 접근한다. 지금껏 책벌레의 삶만을 살아온 파우스트에게 메피스토펠레스는 세상의 즐거움을 맛보게 해 주겠다며 유혹의 말을 건넨다. 하나님에게 내기를 제안한 것처럼, 악마는 노인에게 계약서를 내밀며 계약을 제안한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가 책과 학문이 아닌 삶과 세상을 체험하도록 젊음, 부, 능력을 양도함.” 충격적이게도 계약의 담보는 파우스트의 영혼이다. 그럼에도 파우스트는 하나님이 그랬듯이 일말의 주저도 없이 계약서에 서명한다.


내가 순간을 향해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말한다면, 그땐 자네가 날 결박해도 좋아. 나는 기꺼이 파멸의 길을 걷겠다!

(정서웅 옮김, 민음사, 1999, 1권 95쪽)     


파우스트가 세상을 체험하다가 세속에 집착해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외치면, 그 즉시 파우스트의 영혼은 메피스토펠레스의 차지가 된다. 무시무시하고 소름 끼치는 계약이지만 생각해 보면 파우스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유리한 계약이다. 그는 어차피 곧 세상을 떠날 노인이다. 즉 이미 잃을 게 없는 처지다. 그런 그에게 젊음과 부와 능력을 활용해 겪어 보지 못한 일들을 경험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더군다나 욕망에 휩쓸려 그 순간에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영혼을 털릴 위험도 없다. 조금만 주의한다면 세상만사의 즐거움은 모두 파우스트의 차지나 마찬가지다.

이로써 채권자 메피스토펠레스와 채무자 파우스트 간의 영혼을 건 계약도 성립한다. 젊음과 부와 능력을 모두 갖추게 된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을 받아 학문의 세계를 벗어난다. 악마와 계약한 인간 파우스트는 이제 지난한 학문을 떨치고 즐거운 세상으로 나아간다. 『파우스트』의 제1부는 파우스트가 일반 서민들의 삶을 체험하는 이야기다. 제2부는 궁정 안으로 들어간 파우스트의 행보를 그린다. 제1부와 제2부를 거치면서 파우스트는 서민들의 삶과 귀족들의 삶을 모두 경험한다. 기나긴 여정 속에서 그는 다양한 사건을 겪는다. 순결한 그레트헨과 유부녀 헬레나라는 여인과 만나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실수로 애인의 친오빠를 죽이기도 하며, 궁정에 채용돼 업무를 처리하고, 능력을 인정받아 해안가의 영토를 관리하는 영주로 발령받기도 한다. 이렇듯 『파우스트』 이야기의 줄기는 세상을 체험하는 파우스트의 여정으로 구성된다.

이야기 내내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서 양도받은 젊음과 부와 능력을 활용해 세상의 즐거움을 누린다. 그러면서도 일과 사랑, 준법과 범법, 권력과 윤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하고 갈등한다. 즐거움을 누리는 동시에 이런 자신의 삶에 혼란스러워하는 파우스트의 모습은 우리에게 특별히 다가온다. 젊음과 부와 능력을 갖춘 인간 파우스트도 삶 속에서 방황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삶을 살아가면서 방황하는 우리를 닮았다.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살면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 파우스트는 세상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는 단연 파우스트가 최후를 맞는 장면이다. 해안가의 영토를 관리하는 영주로 발령받은 파우스트는 영토를 넓히기 위해 간척 사업을 벌인다. 파도를 막는 둑을 건설하고 물로 가득한 바다를 땅으로 메우면서 파우스트는 자신의 권력에 한껏 도취된다. 자연을 마음대로 통제하고 개발하는 자신의 힘, 영토를 넓혀 백성들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자신의 원대함. 마침내 파우스트는 잔뜩 취해 외친다.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내가 세상에 남겨 놓은 흔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같이 드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 지금 최고의 순간을 맛보고 있노라.

(같은 책, 2권 364쪽)     


드디어 파우스트가 외쳤다.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그렇게 메피스토펠레스와의 계약에 따라 파우스트는 쓰러진다. 세상 속에서 방황하던 파우스트의 영혼은 곧 육신을 떠난다. 이 장면은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계약이 종료되는 순간이자 악마가 하나님에게 판정승을 거두는 찰나다. 방황하는 우리의 자화상인 파우스트가 방황 끝에 타락해 죽는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식을 금치 못하게 한다. 결국 우리 인간은 방황 끝에 욕망에 굴복하고 마는 박약한 존재에 불과한가! 인간은 필연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는 추악한 존재인가!

파우스트의 육신이 땅으로 쓰러지자 메피스토펠레스는 계약서에 적힌 대로 담보로 잡았던 그의 영혼을 거두려 한다. 그는 파우스트의 시체 옆에서 시체의 배꼽을 주시한다. 인간의 복부는 전통적으로 욕망을 상징하는 신체 부위다. 인간의 대표적인 욕망인 식욕과 성욕은 모두 배와 그 주변부를 중심으로 활성화된다. 그래서 메피스토펠레스도 욕망의 상징인 배의 정중앙, 배꼽을 통해 욕망에 집착해 타락한 파우스트의 영혼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런데 메피스토펠레스의 예상과는 다른 놀라운 일이 펼쳐진다.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 타락한 줄만 알았던 파우스트의 영혼을 천국으로 데려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사태에 악마는 어안이 벙벙해진다. 분명 파우스트의 영혼이 타락한 줄 알고 배꼽을 유심히 지키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천사들이 나타나 그의 영혼을 구원하다니?

파우스트 구원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앞서 등장한 하나님과 악마의 내기 장면을 복기해 보자. 하나님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설사 방황하더라도 타락하지 않고 옳은 방향을 찾는 존재라고 말한 바 있다. 반면 메피스토펠레스는 인간은 방황하면 타락할 수밖에 없는 추한 존재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견해의 차이가 생기는 지점은 인간의 방황이다. 한쪽은 인간의 방황을 옳은 방향을 찾는 과정으로 간주한다. 다른 한쪽은 인간의 방황을 타락의 시발점으로 취급한다. 이 두 관점의 차이가 파우스트의 영혼이 구원받게 된 경위를 설명해 준다. 악마와 내기를 하는 장면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까.

(같은 책, 1권 24쪽)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하나님의 말은 『파우스트』를 관통하는 중심 명제이자 인간이 겪는 방황의 의미를 밝히는 괴테의 핵심 메시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메피스토펠레스가 확신한 것과 같이 방황은 인간이 가진 내재적 한계이자 약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삶을 살면서 수없이 방황하며 수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른다. 메피스토펠레스도 이 점을 놓치지 않았기에 자신만만하게 하나님에게 내기를 제안하고 파우스트에게 계약서를 내민 것이다. 그러나 악마의 생각과는 다르게, 하나님은 인간의 방황을 인간의 한계가 아닌 고유한 가치로, 약점이 아닌 뛰어난 강점으로 파악한다. 방황은 인간의 입장에서 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만 또한 그것은 인간이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인간은 노력하기 때문에 방황한다. 달리 말해서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은 방황할 일도 없다. 방황의 부재는 평온과 안정의 상태가 아니라 미완과 안일의 상태다. 이와는 반대로 자신을 극복하고 성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는 어쩔 수 없이 방황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는 방황으로 인해 괴로워할지언정 현실에 안주하지는 않는다. 달콤한 나태보다 쓰디쓴 노력을 선택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바로 방황이라는 위대한 상태다.

따라서 파우스트의 영혼은 구원받았다. 파우스트가 세상을 체험하면서 겪은 일들을 메피스토펠레스는 단순히 파우스트의 욕망에서 비롯된 결과물로만 치부했다. 악마의 눈에는 파우스트가 여인들과 나누는 사랑이 성욕에 눈먼 남녀의 일탈로, 궁정에서 열심히 업무를 처리하는 모습이 권력욕에 미친 야심가의 폭주로 비쳤다. 파우스트의 방황은 노력이 아닌 욕망에 기원을 둔다고 착각했기 때문에 메피스토펠레스는 그의 영혼이 타락할 줄만 알았으리라. 어느 정도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예상이 맞았다. 악마의 바람대로 파우스트는 방황하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예상대로 파우스트는 노력하는 인간이기도 했다. 그의 방황은 욕망이 아닌 노력에서 파생되었다. 하나님은 파우스트에게서 노력의 방증으로서의 방황을 보았기에 그의 영혼을 구원했다. 파우스트는 여인들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맡은 업무를 열과 성을 다해 처리했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성욕, 권력욕, 욕망이라고 해석했던 파우스트의 방황은 사실 사랑, 성실, 노력이었던 것이다. 그는 충분히 노력하는 삶을 살았다. 노력이라는 이 숭고한 행위가 순결한 그레트헨과 육체적 관계를 맺고 유부녀 헬레나와 결혼했으며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죄인 파우스트를 파멸 대신 구원으로 이끈 열쇠다.          



우리는 파우스트의 방황에 공감한다. 그 이유는 파우스트가 겪는 방황이 형태만 다를 뿐 우리가 살면서 겪는 방황과 굉장히 유사하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내가 이 직업을 잘 선택한 건지 모르겠어요.” “퇴직한 이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합니다.” 지수 씨와 수환 씨의 경우에서 보듯이, 스스로에게서 그리고 주변에서 듣게 되는 고민들은 모두 방황의 흔적이다. 이토록 방황하는 우리들에게 괴테는 말한다. 방황은 곧 노력을 의미한다고. 그러니까 너무 불안해하지 말라고. 우리의 방황은 우리의 나약함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의 방황은 확실하게 우리의 노력을 가리킨다. 방황이라는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해 힘겨워하는 모습 자체가 우리가 삶 속에서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말이다.

현실에 안주하고 나태한 일상을 보내는 사람은 방황하지 않는다. 하루하루 자족하며 사는 삶은 그것만으로 행복한 삶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러한 삶이 노력하는 삶은 아니다. 노력하는 삶은 방황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의 삶이다. 그렇기에 설사 방황의 불안정과 불완전으로 점철된 삶이라고 해도 그 삶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노력의 산물로서의 우리의 방황은 죄가 아닌 축복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방황하는 상태라고 해서 좌절하거나 자책하지 말자. 이는 곧 자신이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이니. 모두 마음껏 방황하라.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괴테는 174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다. 그는 어릴 때부터 문학과 미술을 비롯한 예술에 관심을 보였으나 법률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다. 이후 괴테는 변호사가 되지만 예술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예술을 포기하지 못한 괴테는 진지하게 작품 집필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도중에 바이마르 공국의 초청을 받아 정무를 담당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괴테는 1786년 갑자기 르네상스의 탄생지인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예술 작품을 통해 많은 영감을 받은 그는, 귀국 후 더욱 활발한 창작 활동을 펼친다.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친화력』, 『파우스트』와 같은 걸작을 남긴다. 그는 희곡은 물론 시와 소설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작품을 출간한다. 문학 외에도 생물학, 지질학을 포함해 다른 학문에서도 족적을 남긴 괴테는 1832년 삶을 마감한다.          



※ 추천 도서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1·2』, 정서웅 옮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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