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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필은 Nov 02. 2022

<고전정신> 문학4. 인간관계에 회의감이 들 때

괴테의 『친화력』

사례 1.

환주 씨는 취업에 성공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둔 결실이다. 드디어 첫 직장을 가지게 된 환주 씨에게 주변의 축하가 쏟아진다. 환주 씨의 부모님을 제외하면, 그의 첫 취업을 가장 반기는 사람은 단연 여자 친구다. 같은 학과 동기인 둘은 처음 만난 날부터 사랑에 빠졌다. 신입생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환주 씨와 여자 친구는 알콩달콩 지냈다. 가끔 싸우는 날도 있었지만 그들의 탄탄한 애정 전선이 무너질 정도로 위기가 닥친 적은 없었다. 그런데 환주 씨가 직장을 다니면서 관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회사가 지방에 위치했기에 환주 씨는 어쩔 수 없이 지방에 집을 얻었는데 이로 인해 여자 친구와 멀리 떨어지게 된 것이다. 자연스레 여자 친구와 만나는 빈도수도 줄어든다. 처음에는 오히려 둘 사이가 더욱 애틋해지는 듯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환주 씨는 여자 친구에 대한 관심이 점차 떨어진다. 둘의 관계는 시들해진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그는 적잖이 당황한다. “우리 관계가 왜 이렇게 됐지?” 사랑의 강력한 힘을 믿어 왔던 환주 씨는 조금씩 관계에 회의감이 든다.     


사례 2.

회의감이 드는 관계는 비단 여자 친구와의 관계뿐만이 아니다. 환주 씨는 친구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졌음을 실감한다. 여자 친구를 만나는 빈도수가 줄어든 만큼 친구들을 만나는 빈도수도 확연히 줄어든다. 환주 씨도 친구들도 직장을 다니느라 바쁘다. 그래서인지 예전에는 적어도 한 주에 한 번은 성사되었던 모임이 이제 한 달에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친구들과 의리를 외치며 서로 죽고 못 살았던 환주 씨는 어느새 친구들에 대한 관심이 희미해진다. 심지어 한 달이 넘게 친구들을 못 만났는데도 그들을 보고 싶은 생각이 별로 안 든다. 어쩌다 모임 약속이 잡혀도 막상 당일이 되면 귀찮기만 하다. 환주 씨는 그런 자신의 모습이 낯설다. 어릴 땐 서로가 없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친구들과의 결속력이 느슨해진 기분이다. “우리 관계가 왜 이렇게 됐지?” 우정의 견고한 힘을 믿어 왔던 환주 씨는 조금씩 관계에 회의감이 든다.          



막장 드라마의 대가가 보여 주는 인간관계

우리의 일상에서 타인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수없이 많은 타인과 수없이 다양한 관계를 형성한다. 우리는 태어나는 즉시 부모님과 마주한다. 어느 정도 자라면 가정을 넘어 친구들과의 교제가 시작된다. 더 나이를 먹으면 이성에게 끌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사회에 나와서는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하고도 부딪혀야 한다. 이렇게 타인과의 관계 형성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끊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인간관계는 인간의 생애 전반에 걸쳐 있다. 그런 만큼 인간관계는 삶의 행복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행복은 원만한 인간관계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타인의 중요성은 여기에 기인한다. 어떤 타인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타인과 관계에 관한 이 문제는 삶의 행복도를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모든 인간관계가 원만하게 유지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괴로움을 불러일으킨다. 아무리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려 노력하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써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부모님과의 불화, 친구들과의 다툼, 애인과의 싸움, 그 외 타인과의 마찰은 인간관계에서 피할 수 없는 요소다. 인간관계가 삐거덕거리면 우리는 괴로움에 휩싸인다.

인간관계에서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은 주로 갈등 상황 속에 발생한다. 그래도 이러한 문제는 가역적인 문제라는 점에서 위안을 준다. 갈등은 당사자들이 노력한다면 해결될 가능성이 높다. 부모님과의 불화, 친구들과의 다툼, 애인과의 싸움, 그 외 타인과의 마찰은 화해를 통해 갈등을 빚기 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괴로움의 인간관계는 얼마든지 회복이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에게 진정 문제시되는 감정은 괴로움보다는 회의감이다. 회복이 가능한 괴로움의 인간관계와는 달리 회의감에 빠진 인간관계는 회복이 힘들다. 인간관계에서의 회의감은 어떤 특정한 상황이나 계기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괴로움은 갈등 상황에 의해 촉발되지만 회의감은 그 기원을 알 수 없으니 괴로움보다 답답하다. 인간관계에서의 회의감은 갑작스레 찾아온다. 환주 씨가 여자 친구 및 친구들과의 관계에 회의감을 느낀 것처럼 말이다. 기원을 알 수 없으니 회복 또한 힘들다. 회의감의 인간관계는 비가역성을 띤다.

환주 씨는 술자리에서 자신의 깊은 고민을 털어놓을 것이다. “그 사람이 싫은 건 아닌데 보고 싶은 마음도 크지 않아.” 환주 씨가 말하는 그 사람이 여자 친구든 친구들이든 중요한 것은 그가 인간관계에 회의감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인간관계에서의 회의감은 상대방에 대한 친밀감 역시 감소시킨다. 별다른 사건을 겪지 않았음에도 튼튼했던 관계가 헐거워진다. 회의감 앞에 사랑의 언약과 우정의 맹세는 무색해진다. 인간관계는 이리도 가변적인 것이었던가!

이토록 우리를 고민에 빠뜨리는 인간관계의 본질은 도대체 무엇일까?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인간관계는 끊이지 않지만 그 본질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너무도 많은 타인과 너무도 다양한 관계를 형성한 탓에 우리는 인간관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인간관계의 정체는 무엇이기에 우리에게 행복, 괴로움, 심지어 회의감까지 쥐여 주는 건지!

인간관계에 회의감이 드는 우리에게 막장 드라마의 대가 괴테가 쓴 소설 『친화력』은 신선하게 다가온다. 괴테는 적지 않은 작품에 자극적인 소재를 차용해 막장 드라마의 냄새를 풀풀 풍긴다. 그의 초기작이자 인기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부터가 그렇다.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을 약속한 여인에게 연모의 감정을 품은 베르테르는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자살한다. 불륜과 자살이라니. 얼마나 자극적인가. 더군다나 당시에 이 소설을 읽고 베르테르의 자살을 따라 하는 청년들까지 생겨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라는 용어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파우스트』는 어떠한가. 우리가 미리 훑어본 것처럼 파우스트는 순결한 그레트헨과 육체적 관계를 맺고 유부녀 헬레나와 결혼하지 않았던가. 더욱이 그는 살인까지 저질렀다. 밀애(密愛)와 살인이라니. 역시 자극적이다.

괴테는 『친화력』에서도 어김없이 불륜과 자살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차용한다. 이야기는 두 남자와 두 여자, 이렇게 네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교차를 묘사한다. 괴테의 작품은 자극적인 소재를 앞세우지만 이면에는 보다 심오한 주제가 숨어 있다. 『친화력』도 예외는 아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불륜과 자살을 소재로 사랑을 표현하고, 『파우스트』가 밀애와 살인을 소재로 인간의 노력과 방황을 나타냈듯이, 『친화력』은 작품의 깊은 곳에 인간관계의 본질이라는 주제를 머금는다. 괴테는 네 사람 사이에서 요동치는 감정의 다변화를 통해 인간관계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보여 준다.     


아내의 친구의 딸을 사랑했소

폭풍 전야는 고요한 법이다. 불륜과 자살이 벌어지는 이야기의 시작치고는 의외로 차분하다. 파격적인 사건의 폭풍이 불어닥치기 전 이야기는 훈훈한 분위기로 흘러간다. 먼저 신혼부부인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가 등장한다. 부와 능력을 갖춘 남작 에두아르트와 그의 아내 샤를로테는 정원과 호수가 딸린 성(城)에 살고 있다. 한적한 일상을 보내던 중 에두아르트는 쭈뼛거리며 샤를로테에게 묻는다. “여보……. 집에 친구 좀 데려와 당분간 묵게 하면 안 될까요?” 훈훈한 분위기는 금세 뒤바뀐다. “왜요?” 샤를로테의 목소리에서는 냉기가 흘러나온다. 에두아르트는 자신의 친구 대위(大尉)의 어려운 처지를 설명하며 샤를로테를 설득한다. 남편의 친구가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는 말을 들은 샤를로테는 잠시 고민하지만 무언가 불길함을 직감한 듯 주저한다. 그러다 불현듯 친한 친구의 딸 오틸리에를 떠올린다. 안 그래도 자신이 딸처럼 끔찍이 여기는 오틸리에가 기숙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신경이 쓰이던 차였다. 마침 그녀는 딱한 오틸리에에게 보다 나은 환경을 조성해 주고 싶어 했다. 결국 오틸리에를 부부의 성으로 데리고 오는 조건으로 에두아르트의 친구인 대위도 그들의 성에서 같이 지내게 된다.

이제 네 사람이 모이면서 본격적으로 파격적인 사건이 펼쳐진다. 서로를 향하던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의 감정이 조금씩 각도를 재조정하는 것이다. 에두아르트의 감정은 오틸리에에게, 샤를로테의 감정은 대위에게 향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멈추면 좋으련만 오틸리에와 대위도 자신에게 향하는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의 감정에 동조한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새로운 두 쌍의 감정은 고조된다. 동시에 인간관계의 민낯이 여실히 드러난다. 새로운 관계 앞에서 기존의 관계는 한없이 고꾸라진다. 부부의 정으로 결합된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의 관계, 우애로 다져진 에두아르트와 대위의 관계, 인연으로 맺어진 샤를로테와 오틸리에의 관계는 불륜이라는 새로운 관계로 인해 산산이 부서진다. 인간이라면 응당 인간관계에서 최우선시해야 할 사랑, 우정, 인연이라는 고귀한 가치는 그렇게 파탄이 난다.

그나마 샤를로테와 대위는 양반이다. 둘은 서로에게 감정적으로 이끌리면서도 최대한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 쌍은 반대다.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는 미쳤다고 해도 될 정도로 노골적으로 행동한다. 에두아르트는 아내의 친구의 딸에게 불도저 같이 직진한다. 둘은 서로 연애편지를 주고받고 사랑을 속삭이며 관계를 진전시킨다. 게다가 성 안에서 대놓고 스킨십하는 대담함까지 보인다. 막장의 정석이라고 표현할 만하다.

그러나 불륜을 저지른다는 것은 비단 행위에 국한되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일단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감정적으로 이끌렸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샤를로테의 행태는 불륜이나 다름없다. 행위로 표면화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륜을 정당화시키면 안 된다. 괴테도 똑같은 생각이었는지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의 성관계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램프 빛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속마음에 품고 있던 열정이 즉각 본색을 드러냈고, 상상력이 현실적인 것보다 우월한 위치를 점유하기 시작했다. 에두아르트는 자기의 팔로 오틸리에만을 안고 있었고, 샤를로테의 영혼 앞에는 대위가 휘휘 떠돌며 때로는 좀 더 가까이 왔다가 때로는 좀 더 멀리 떨어지곤 했다.

(오순희 옮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 117쪽)     


에두아르트는 샤를로테를 안으면서 오틸리에를 상상하고, 샤를로테는 에두아르트의 움직임에서 대위를 상상한다. 둘은 부부끼리의 정을 나누는 순간에도 각자 사랑하는 다른 사람을 떠올린다. 이 장면은 인간관계의 민낯을 극한까지 내보이는 충격적이고도 슬픈 장면이다. 이보다 더 기막힌 사건도 벌어진다. 에두아르트와 육체적 관계를 맺은 샤를로테는 임신하는데, 이후에 엉뚱하게도 두 사람이 아닌 오틸리에와 대위를 닮은 아기가 태어난 것이다. 극은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다.     


인간관계의 본질은 감정이다

괴테가 불륜이 판치는 성 안에서의 막장 드라마를 풀어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만 자극적인 소재를 차용했다면 괴테는 막장 드라마의 작가일지언정 대가는 아니었을 것이다. 앞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사랑을, 『파우스트』는 인간의 노력과 방황을, 『친화력』은 인간관계의 본질을 다룬다고 언급했다. 괴테는 자신의 작품에 자극적인 소재를 버무려,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를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친화력』은 지금 시대의 막장 드라마처럼 불륜과 자살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차용하지만, 괴테는 이 부분에서 인간관계의 본질을 끄집어낸다.

괴테가 제시하는 인간관계의 본질은 이야기의 서두에서부터 들추어진다. 오틸리에가 성에 도착하기 전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 그리고 대위는 모여서 수다를 떤다. 이들의 대화에서 흥미로운 용어가 등장하는데 이른바 ‘선택적 친화력(elective affinity)’이라는 화학 용어다. 선택적 친화력은 간단히 말해 원자와 원자가 만나 결합하는 힘을 일컫는다. 서로 다른 두 원자가 만났을 때 쉽게 결합하면 두 원자 사이의 친화력이 높다고 하고 결합하지 못하면 친화력이 낮다고 한다. 서로 친화력이 높은 두 원자가 만나 결합하면 평온한 상태가 유지된다. 세 번째 원자가 나타나 두 원자 사이에 끼어들려고 해도 틈은 벌어지지 않는다. 기존의 두 원자는 높은 친화력을 매개로 단단하게 결합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세 번째 원자가 두 원자 중 어느 한 원자와 높은 친화력을 갖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더 나아가 세 번째 원자와 어느 한 원자 사이의 친화력이 현재 결합 상태를 유지하는 두 원자의 친화력보다 월등히 높다면? 기존의 결합 상태는 깨지고 세 번째 원자와 친화력이 높은 원자가 새로운 결합을 형성할 것이 분명하다. 기존의 결합 상태를 평온하게 유지했던 남은 원자 하나는 쓸쓸하게 공간을 배회한다. 그 원자는 파트너를 세 번째 원자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괴테는 선택적 친화력에 따라 원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결합과 해체의 현상을 보며 인간관계의 본질을 포착한다. 그는 선택적 친화력의 개념을 『친화력』 속 네 사람의 인간관계에 적용한다.     


여기서 분리와 함께 또 하나의 새로운 결합이 나타나므로, 이제는 선택적 친화력이란 표현을 사용해도 된다고들 생각하는 거죠. 실제로 어떤 관계가 다른 관계보다 선호되고, 이 관계가 저 관계에 앞서 선택되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같은 책, 50쪽)     


실제로 이들의 대화는 그들 사이의 인간관계에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친화력이 높은 기존의 두 원자처럼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는 평온한 결합 상태를 유지하며 살았다. 이후 세 번째 원자인 대위, 그리고 또 다른 원자인 오틸리에가 그들 사이에 개입했다. 그들이 나타남으로써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의 친화력은 시험대에 오르는데, 우리는 이미 그 결과를 이야기를 통해 모두 알고 있다.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의 결합은 새로운 원자들이 등장하자마자 급속도로 약화된다.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의 친화력, 그리고 샤를로테와 대위의 친화력이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의 친화력을 압도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기존의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의 결합은 깨지고,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의 새로운 결합과 샤를로테와 대위의 새로운 결합이 이루어진다. 각자 자신과 친화력이 더 높은 사람에게 향하는 현상이 관찰된다.

원자 사이의 친화력은 각각 다르다. 이 말인즉슨 원자마다 자신이 더 선호하는 다른 원자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지금 결합한 원자보다 더 선호하는 원자가 나타나면, 원자는 기존의 결합을 깨고 새로운 원자와의 새로운 결합을 이룬다.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사람도 똑같다. 누군가에게 감정적으로 이끌리는 정도는 사람마다 분명 차이가 난다. 자신이 더 좋아하는 사람과 덜 좋아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더 좋아하는 사람과의 친화력이 덜 좋아하는 사람과의 친화력보다 높은 것은 당연하다. 어떤 사람을 더 좋아하느냐에 따라 어떤 관계를 더 좋아하느냐도 달라진다. 감정에 따른 관계의 우열은 필연적이라는 말이다.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의 관계가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의 관계에 비해 우위를 점한다는 사실은 여기에 연유한다.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의 감정이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의 감정보다 정열적이었기에 그들 사이에 형성된 인간관계의 서열도 그렇게 정해져 버렸다.

그렇다면 인간관계의 본질은 감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인간관계에서 친화력의 높낮이를 결정하는 요소는 무엇보다도 감정이다. 결혼이라는 제도도, 도덕이라는 기제도, 의무라는 당위도 감정과 맞서면 무력해진다. 감정이 바위라면 결혼과 도덕과 의무는 계란이다. 결혼과 도덕과 의무를 들먹이며 감정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불가능하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일례로 계란을 지키기 위해 대위와의 관계를 진전시키지 않은 샤를로테도 에두아르트와의 잠자리에서 대위를 상상했다! 감정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힘은 이토록 강력하다.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해체되고 새롭게 형성되는 현상 밑에는 끊임없이 소화하는 감정이라는 원료가 위치한다. 이는 연인 관계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감정을 바탕으로 형성된 모든 인간관계에 통용되는 원리다. 감정이 호르몬이라는 화학 물질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는 과학적 사실은 선택적 친화력이라는 용어와 결부될 때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괴테는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 오틸리에와 대위가 보여 주는 행동과 이로 인한 관계의 변화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이들의 모습에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지는 않는다. 그저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들 사이의 서사를 묘사할 뿐이다. 그렇다고 괴테가 인간관계에서 다른 요소는 모조리 무시하고 오직 감정만을 중시하라고 말하려는 의도는 아닐 것이다. 어찌 됐건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를 포함해 작품 속 인물들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 순전히 감정에 이끌려 행동한다면 가정 파괴나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단지 우리는 연인 관계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의 본질은 감정이라는 점을 되새기면 된다. 이와 같은 생각은 환주 씨의 고민 해결에 도움이 된다. 인간관계의 본질이 감정인 이상, 직장을 다니면서 여자 친구와 멀어지고 친구들과 소원해지는 느낌은 자연스럽게 드는 느낌이다. 새로운 원자가 개입하면 감정이 변화하는 것과 같이, 새로운 환경에 처하면 감정도 달라지는 것이다.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원동력인 사랑과 우정 또한 감정의 한 종류다. 사랑과 우정이라는 감정이 감소했다고 해서 고민할 필요도 없고 증폭한다고 해도 자제할 필요가 없다. 그저 감정에 충실하게 반응하면 그만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확실히 인간관계는 가변적이다. 그러나 인간관계의 가변성을 인정하고 수긍한다면 회의감은 극복된다.

인간관계에 회의감이 들 때 인간관계의 본질은 감정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곧장 회의감보다는 편안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앞으로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감정이 미미한데도 억지로 노력하기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 되살아날 때까지 느긋이 기다려 보는 것은 어떨까. 감정이 동해야 인간관계도 진전되니 말이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괴테는 174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다. 그는 어릴 때부터 문학과 미술을 비롯한 예술에 관심을 보였으나 법률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다. 이후 괴테는 변호사가 되지만 예술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예술을 포기하지 못한 괴테는 진지하게 작품 집필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도중에 바이마르 공국의 초청을 받아 정무를 담당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괴테는 1786년 갑자기 르네상스의 탄생지인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예술 작품을 통해 많은 영감을 받은 그는, 귀국 후 더욱 활발한 창작 활동을 펼친다.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친화력』, 『파우스트』와 같은 걸작을 남긴다. 그는 희곡은 물론 시와 소설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작품을 출간한다. 문학 외에도 생물학, 지질학을 포함해 다른 학문에서도 족적을 남긴 괴테는 1832년 삶을 마감한다.          



※ 추천 도서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친화력』, 오순희 옮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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