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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필은 Nov 02. 2022

<고전정신> 사회1. 남에게 피해만 주지 말고

밀의 『자유론』

사례 1.

부모님은 은혁이에게 항상 당부한다. “성공하거나 유명해지지 않아도 되니까, 남에게 피해만 주지 말고 살아라.” 그럴 때마다 은혁이는 열심히 듣는 척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부모님의 조언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사춘기에 접어든 시기여서 그런지 은혁이는 남이 피해를 입든 말든 자신의 자유를 가장 우선시한다. 자기중심적 태도와 이유 없는 반항심이 사춘기 소년을 지배한 것이다. 그런 은혁이에게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남이 입는 피해는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은혁이는 학교에서 잦은 문제를 일으킨다.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무작정 때리고, 쉬는 시간에 심심함을 이기지 못해 시끄럽게 굴고,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 먹기 위해 친구들에게서 돈을 빼앗는 등 그가 일으키는 문제는 셀 수 없다. 선생님의 꾸중을 들으면서도 그는 생각한다. “내 자유인데 뭐 어때?” 은혁이는 안하무인으로 설치기로 학교에서 유명하다. 부모님의 조언과는 완전히 반대로 남에게 피해를 주고 살아서 유명해진 셈이다.    

 

사례 2.

은혁이의 악행은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된다. 은혁이에게는 여전히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자유가 가장 중요하다. 이제 은혁이는 대놓고 남을 때리고 소란을 일으키고 돈을 빼앗으면 무거운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성인이 된 은혁이는 교활해진다. 더 이상 남을 때리고 소란을 일으키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돈은 어릴 때보다 훨씬 많이 필요하다. 은혁이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틈틈이 카운터의 돈을 얼마씩 훔친다. 실제 시재와 오차가 발생해도 아르바이트생이 메꿀 의무는 없기에 점장에게 걸리지만 않으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소액이라도 매일 오차가 발생하면 의심을 받을 것이 뻔하다. 그래서 은혁이는 일정한 주기를 두고 돈을 훔치는 치밀함까지 보인다. “내 자유인데 뭐 어때?” 돈을 훔치면서 그는 생각한다. “성공하거나 유명해지지 않아도 되니까, 남에게 피해만 주지 말고 살아라.” 어린 시절부터 들어 왔던 부모님의 조언은 이미 무의식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지 오래다.          



나의 자유는 어디까지

“남에게 피해만 주지 말고 살아라.” 우리가 자라면서 부모님에게 자주 듣는 말이다. 돈을 많이 벌거나 명성을 얻거나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이 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최소한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어른들의 조언이다. 이 조언은 법적 차원에서도 도덕적 차원에서도 통용된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자세는 사회인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기본 태도다.

남에게 피해만 주지 말고 살라는 조언은 달리 말하면 나의 자유를 제한하라는 의미다. 개인이 모인 집단인 사회 속에서, 모든 사람이 조르바와 같이 마음 가는 대로 살면 어떻게 될까. 개인이 각자 무제한적인 자유를 추구한 결과는 사회의 갈등과 혼란으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때리고, 단지 심심하다는 이유만으로 소란을 일으키고, 다른 사람의 돈을 갈취하는, 은혁이와 같은 사람만 모여 있다면 그 사회는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없으리라. 모든 사람이 무제한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사회에서는 극단적인 경우 살인과 방화, 테러가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개인의 권리는 당연히 보장될 수 없다. 무제한적인 자유는 사회의 유지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개인의 권리도 불안한 상태로 내몬다. 조르바의 자유는 사회 속에서 실현되기 힘들다.

그러므로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무제한적인 자유에 제한을 두어야 한다. 본래 자유는 무언가에 제한을 받지 않는 상태를 일컫는다. 자유라는 단어 자체에는 이미 무제한성이 내포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사전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사회라는 현실에 비추어 보면 제한을 받지 않는, 즉 무제한적인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방종이다. 방종은 사회의 혼란과 개인의 불안을 초래하는 씨앗과 같다. 사회에서 자유가 방종으로 변질되지 않고 정당하게 실현되려면 적절한 제한이 필수다. 곧 자유의 허용 범위를 정해야 한다.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J. S. Mill)은 저서 『자유론』을 통해 자유의 허용 범위를 논한다. 밀이 살았던 19세기는 세계적으로 자유의 개념이 확산되는 시기였다. 18세기 후반 자유의 나라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성취해 냈고, 프랑스에는 프랑스 혁명으로 한때 자유의 바람이 불었다.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세계사적 사건으로 인해 세계 속에서 자유라는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급진적 경향을 띠었던 미국이나 프랑스의 경우와는 다르게, 영국에서는 자유의 가치가 점진적으로 실현되는 중이었다. 일찍부터 로크의 철학에 영향을 받고 명예혁명과 같은 굵직한 사건이 일어난 영국은 자유주의 사상에 어느 정도 눈을 뜬 상태였다. 19세기에 이르러 영국의 자유주의는 적극적으로 제도화된다. 선거법 개정과 차티스트 운동으로 정치적 자유가 현실화되었고, 곡물법 폐지를 비롯한 여러 정책이 시행되어 경제적 자유가 구체화되었다. 영국의 정치적, 경제적 자유주의는 서서히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시기에 밀은 자유라는 가치를 고찰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개인의 자유는 누구든 존중받아야 할 인간 고유의 자산이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가 방종 수준으로 남용된다면 사회의 안정적인 유지는 어렵다. 개인의 권리도 위협을 받는다. 밀은 자문한다. 그렇다면 자유에 제한을 두어야 할 텐데, 사회 속에서 개인의 자유는 얼마나 허용되어야 하는가? 사회 속에서 개인은 얼마나 마음 가는 대로 생활할 수 있는가? 즉 나의 자유는 어디까지인가?     


남에게 피해만 주지 말고의 원조

밀은 기본적으로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국가를 지배하는 군주도 개인의 자유를 부당하게 침해해서는 안 된다. 그럼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군주가 없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가 온전히 보장될까? 밀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수의 횡포를 경계해야 한다.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한 대중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군주와 다수로부터 개인은 자유로워야 한다.

단, 조건이 붙는다. 자유의 향유는 타인의 행복을 유린하지 않는 수준에서만 가능하다. 밀은 『자유론』 서두에서부터 자유의 대원칙을 확정한다.     


자유라고 불릴 수 있는 유일한 자유는, 우리가 타인에게 행복을 뺏으려 하지 않는 한, 또는 타인이 행복을 얻고자 노력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한, 우리 자신의 방법으로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유다.

(박홍규 옮김, 문예출판사, 2009, 47~48쪽)     


나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받을 수 있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다시 말해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나는 얼마든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내가 어떤 음식을 먹든 어떤 일을 하든 어디서 살든 누구랑 만나든 타인의 행복과 연관되지 않는 한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자유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라는 밀의 대원칙은 사회에서 자유를 정당하게 실현하는 방법론이다. 이로써 우리는 자유를 향유하는 동시에,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개인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자유는 어디까지인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정도까지. 밀의 전언은 부모님의 조언을 연상시킨다. 『자유론』은 “남에게 피해만 주지 말고”의 원조 격이다.

피해는 행동과 결부된다. 나의 특정한 행동은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수준에서 행사하는 개인의 자유는 주로 행동과 관련된다. 따라서 자유의 허용 범위를 제한하는 밀의 대원칙은 행동의 자유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여기서 행동은 다층적인 형태를 포함한다. 신체의 단순한 움직임, 의식주와 같은 일상적인 생활 양식, 집회나 시위 등의 집단적 운동 모두 행동의 범주에 해당한다.

나의 행동이 남에게 피해를 주면 곤란하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신체의 단순한 움직임은 제한을 받는다. 매일같이 새벽 한 시에 노래를 부르는 일상적인 생활 양식도 제한을 받는다. 시위를 하기 위해 차도를 점령해 교통을 마비시키는 집단적 운동도 제한을 받는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함으로써 남이 피해를 입는다면 행동의 자유는 제한되어야 마땅하다.

밀은 이 부분에서 더 나아가 내가 어떤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남이 피해를 입는 경우까지 고려한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기준을 행동하는 차원을 넘어 행동하지 않는 차원까지 확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병역의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사람이 의무를 다하지 않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단 한 사람이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지극히 미미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병역의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사람 모두가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국방이 미흡한 나라에는 외세의 침략이 이루어지는 법이다.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국민들의 피해는 극대화된다. 병역의 의무를 다하지 않음으로써, 즉 어떤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결과가 일어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개인의 행동하지 않을 자유는 제한되어야 한다. 국가가 국민에게 부과하는 국방과 납세와 같은 의무는 밀의 자유에 대한 견해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렇듯 행동함과 행동하지 않음의 자유에는 일정한 제한이 가해진다. 그러면 생각의 자유는 어떨까? 밀에게서 행동은 다층적인 형태를 포함하듯이 생각도 포괄적인 범주를 지닌다. 생각은 모든 영역을 망라한다. 정치, 종교, 경제, 역사 등 여러 분야에서의 사상은 물론 머릿속으로 쉽게 떠올리고 휘발되는 사소한 잡념과, 일상 속에서의 다채로운 감정도 생각의 범주에 들어간다. 이런 요소들의 자유는 어디까지 가능할까. 생각해 보면 내가 어떤 사상을 따르든 어떤 잡념을 품든 어떤 감정을 느끼든 남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다. 행동의 자유와 다르게 생각의 자유는 “남에게 피해만 주지 말고”라는 조언에 들어맞지 않는 셈이다. 따라서 밀은 생각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호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생각의 절대적인 자유는 표현의 자유로 이어진다. 마찬가지로 표현도 다양한 형태를 아우른다. 연설이나 발표, 토론, 인터뷰처럼 말을 이용하는 방법, 기고나 출판처럼 글을 이용하는 방법은 모두 표현의 일환이다. 밀에 따르면 나는 나만의 사상, 잡념, 감정을 다양한 표현 방법을 활용해 발현할 수 있다. 이는 온전히 나의 자유다.     


남의 자유도 소중히

나의 자유는 이렇게나 소중하다. 그런데 나의 자유 못지않게 소중한 자유가 존재하니 바로 남의 자유다. 우리는 특정한 행동을 통해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타인에게 특정한 행동을 강요해서 피해를 주기도 한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억지로 술을 강요하거나, 진로를 뚜렷이 정한 사람에게 오지랖 넓게 참견하며 다른 직업을 추천하는 모습이 이에 속한다. 나의 자유를 발휘해 피해를 입히는 것과 달리 남의 자유를 제한해 피해를 입히는 경우다. 밀의 대원칙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타인이 행복을 얻고자 노력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한”이라는 조건이 눈에 띈다. 내가 나의 행복을 추구할 자유를 가지듯이 타인도 타인의 행복을 추구할 자유를 갖는다. 그렇기에 나는 타인에게 특정한 행동을 강요하는 식으로 그가 행복을 추구하는 행동을 가로막지 말아야 한다. 내가 강요하는 행동이 좋은 행동일지라도 그렇다. 내가 좋다고 평가하는 행동이 타인에게는 좋지 않은 행동일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 있다. 우리에게 타인의 행동의 자유를 손상할 자유는 없다.

모름지기 사람은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하며 행동한다. 그 누구에게도 행복을 좇는 타인의 행동을 억압할 권리는 없다. 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물리력을 동원해 직접적으로 억압하지도 말아야 하고, 대중을 선동하거나 여론을 이용하는 간접적인 전략을 써서 억압하지도 말아야 한다. 타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그 행동은 존중되어야 옳다. 타인의 행동을 존중할 때 사회 속에서 행동의 다양화가 나타난다. 자유가 존중된 사회에서는 개인이 취하는 신체의 단순한 움직임, 일상적인 생활 양식, 집단적 운동이 다양하게 표출된다. 밀은 행동의 자유에 기반한 행동의 다양화가 사회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고 주장한다. 행동의 다양화는 다양한 문화의 공존으로 이어지고 결과적으로 인류에게 풍성한 문화를 선사한다는 입장이다.

타인이 누리는 생각의 자유도 예외가 아니다. 나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것처럼 타인의 생각도 절대적으로 자유롭다. 나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남이 나와 다른 사상, 다른 잡념, 다른 감정을 가지고 표현한다고 해서 그를 억압할 수는 없다. 행동에서와 같이 생각에서도 직간접적 억압은 부당하다. 그 생각이 대세를 거스르는 생각이어도 마찬가지다.     


설령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동일한 의견이고, 그 한 사람만이 반대 의견을 갖는다고 해도, 인류에게는 그 한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

(같은 책, 59쪽)     


심지어 밀은 논리적 또는 학문적 근거가 부족한 생각도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모든 생각은 진리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진리로 여겨지지 않는 생각도 시대가 바뀌면 얼마든지 진리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우리는 지동설이라는 대표적인 예를 아주 잘 알고 있다. 설사 어떤 생각이 시대를 막론하고 무조건 오류라고 쳐도, 이 생각마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과정에 필수적인 요소이기에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의 생각에 내재된 오류를 밝히는 작업은 진리에 다가가는 방법 중 하나이기에 그렇다.

타인의 생각의 자유를 존중한다면 이로 말미암아 사회에서 활발한 담론이 펼쳐진다. 밀은 다양한 생각이 담론의 장으로 침투하는 현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다양한 생각이 자유롭게 충돌하고 대립하고 서로 조정하는 일이 잦아질수록 인류는 그만큼 진리에 가까워진다. 특정 생각이 억압된다는 것은 진리를 발견하기 힘들어진다는 것이고 사회의 전반적인 지적 수준이 정체 상태에 빠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앞에서 플라톤에서부터 니체까지 이르는 철학의 변천사를 뜯어보았다. 만약 사람들이 플라톤 철학 외에 다른 철학을 억압했다면 철학은 여전히 고대 그리스 시대에서 멈추었을 것이다. 다양한 철학이 자유롭게 충돌하고 대립하고 조정하면서 인류에게 풍요로운 사상적 밑천을 마련해 주었다. 이처럼 생각의 다양화는 사회에 정신적 풍요로움을 가져다준다. 행동의 다양화와 함께 생각의 다양화 또한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나의 자유도 소중하지만 타인의 자유도 소중하다. 이는 자연스레 소수자의 자유를 대하는 문제로 연결된다. 현대 사회에서 소수자의 행동과 생각을 억압하는 군주의 절대적인 권력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다만 민주주의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다수의 권력은 아직까지도 막대하다. 다수는 소수자의 행동과 생각을 비난하고 제재하는 방식으로 다수의 원리를 따르게 만든다. 자유에 대한 밀의 대원칙을 상기하면 불합리한 병폐가 아닐 수 없다. 소수자의 행동과 생각을 억압하는 다수의 횡포는 풍성한 문화와 정신적 풍요로움의 억제로 귀결된다. 소수자가 아무리 유별난 행동을 해도 그리고 아무리 이질적인 생각을 해도, 그들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들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 『자유론』은 아직까지 종교에 따른 차별이 만연하고 성적 소수자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들의 자유도 존중하는 사회가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회다.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밀의 주장은 그의 공리주의 사상과 무관하지 않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모토로 삼아 쾌락의 양적인 측면에만 집중한 벤담(J. Bentham)의 공리주의와 상이하게, 밀은 사회의 발전을 이룩하는 데 주요한 가치로 개인의 자유를 꼽으며 쾌락의 질적인 측면도 중시했다. 우리가 다 함께 질 높은 쾌락을 느끼려면 사회 속에서 자유를 정당하게 실현해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국가에서 자유의 법적 허용 범위를 정하는 문제를 다루며 밀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자유론』에서 제시된 자유의 원칙을 현실에 고스란히 적용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피해의 유무를 판별하는 일은 주관성이 개입되는 영역이기 때문에 사회 속에서 객관적으로 규정하기가 힘든 실정이다. 피해란 정확히 무엇인지, 또 누군가에게 피해로 다가오는 행동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피해가 아닐 수도 있는데 이는 누가 판단하는지에 대해 밀은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않는다. 결국에는 상황별로 사안별로 유연하게 자유의 원칙을 적용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속한 가정, 학교, 회사, 동호회를 포함해 수없이 많은 사회의 환경에 맞게 자유의 원칙을 적용해야 할 것이다.

자유의 원칙을 내가 속한 사회에 맞게 적용해야 하겠지만,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명심할 말은 이것이다. “남에게 피해만 주지 말고 살아라.” 우리는 밀의 조언을 가슴 깊이 새기고 나의 행동이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고 있지는 않은지 되짚어야 한다. 아울러 상대방의 행동과 생각을 무시하고, 상대방에게 나의 행동과 생각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봐야 한다. 남에게 피해만 주지 말고 살라는 조언은 타인과 조화롭게 어울리며 진정한 자유를 실현하는 사회에 빠져서는 안 될 명언이다.          



□ 존 스튜어트 밀 (John Stuart Mill, 1806~1873)

1806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밀은 어릴 때부터 영재 교육을 받고 자란다. 지식인이었던 밀의 아버지는 어린 밀을 직접 교육한다. 밀은 그리스어, 논리학, 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는데 그중에서도 벤담의 공리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는다.

영재 교육과 동시에 아버지의 엄격한 통제 아래서 자란 밀은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대신 이른 나이부터 학회에 참여하고 언론에 글을 기고하며 지적으로 성숙한다. 밀은 아버지가 일하는 동인도 회사에 들어가 같이 일하면서 꾸준히 책을 집필한다. 그 결과 『정치경제학 원리』, 『자유론』, 『공리주의』를 비롯한 명저를 출간한다.

말년에는 하원 의원으로 당선돼 정계에 진출한 밀은 노동자와 여성의 권익 보호에 앞장서기도 한다. 그는 정계에서 물러난 후인 1873년 숨을 거둔다.          



※ 추천 도서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박홍규 옮김, 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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