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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필은 Nov 03. 2022

<고전정신> 사회2. 착한 사람 콤플렉스 벗어던지기

니체의 『도덕의 계보』

사례 1.

혁진 씨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들은 칭찬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착하다.” 혁진 씨는 어릴 때부터 고분고분한 아이였다. 워낙 성격이 차분하고 조용했기에 혁진 씨의 부모님은 혁진 씨를 키우면서 특별한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어린 혁진 씨는 어른들의 말을 잘 들었다. 부모님은 그런 혁진 씨에게 말하곤 했다. “말 잘 들어서 착하네.” 학교에서 선생님도 혁진 씨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혁진이를 봐라. 얼마나 착하고 말을 잘 듣니?” 주변의 어른들은 어린 혁진 씨를 보면서 그의 부모님에게 말했다. “아이가 참 얌전하고 착하네요.” 어린 혁진 씨는 착한 아이였다. 혁진 씨는 어른이 되어서도 어릴 때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한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부탁을 들어주고 고집을 부리지 않는 모습은 혁진 씨만이 갖는 착한 품성이다. 회사에서도 웬만하면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는 팀장이나 팀원들의 의견에 점잖게 따르는 경우가 많다. 혁진 씨가 회사에서 사람들과 갈등을 빚는 일은 없다. 팀원들은 그런 혁진 씨를 좋아한다. 확실히 착한 혁진 씨와 같이 일하면 편하기 때문이다.     


사례 2.

지하철을 타고 퇴근하는 혁진 씨는 피곤해서 저절로 눈이 감긴다. 목적지까지 아직 한참 남았기에 혁진 씨는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존다. 그런 혁진 씨의 눈에 지하철 안 풍경이 언뜻언뜻 스친다. 그러다 갑자기 혁진 씨는 눈을 번쩍 뜬다. 혁진 씨의 눈에 구걸하는 사람이 들어온 것이다. 더군다나 그 사람은 한쪽 다리를 절며 걷는다. 그는 힘겹게 혁진 씨가 앉은 자리를 지나간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 혁진 씨는 돈을 확인하려고 지갑을 꺼낸다. 다행히 지폐가 여러 장 들어 있다. 착한 혁진 씨는 주저하지 않고 지갑에서 지폐를 모두 빼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구걸하는 사람에게 달려간다. 그는 혁진 씨가 내미는 돈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뜬다. 이어 돈을 손에 꼭 쥔 그는 혁진 씨에게 연신 허리를 굽힌다. “괜찮아요. 힘내세요!” 혁진 씨는 손사래를 치며 인사하고는 자리로 돌아온다. 불쌍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뿌듯함이 혁진 씨의 마음을 감싼다. 뿌듯한 마음을 간직한 착한 혁진 씨는 다시 눈을 감는다.          



도덕적인 사람들의 사회에는

우리는 무의식중에 인간은 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듣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착한 행동은 인간이라면 마땅히 실천해야 할 도리다. 그런데 막상 사회에서 인간의 도리를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매우 적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듣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혁진 씨의 행동은 주변의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혁진 씨는 착하다. 착하다는 말은 곧 도덕적이라는 말이다. 혁진 씨는 도덕적이다. 그리고 그의 행동은 도덕적인 행동이다. 우리 사회에 혁진 씨 같이 도덕적인 사람들만 모여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 모든 아이가 혁진 씨처럼 순하다면 육아는 그렇게 힘들지 않을 수도 있다. 회사의 모든 직원들이 혁진 씨처럼 단정하다면 직원들끼리 싸우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혁진 씨처럼 남을 돕는다면 우리 사회는 관용과 배려가 넘치는 사회로 거듭나리라. 도덕적인 사람들의 사회는 우리가 꿈꾸는 낭만적인 유토피아다.

도덕적인 사람들의 사회에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칠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질문에 무조건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을 것이다. 갈등과 다툼이 완전히 제거된 사회는 평화로울 것이 분명하다. 도덕적인 사람들의 사회에서는 그 어떤 억압이나 걱정도 인간을 괴롭히지 못한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우리는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있다. 역사에서만 보던 태평성대의 실현을 기대해도 좋다. 도덕적인 사람들의 사회에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도덕적인 사람들의 사회에 대한 우리의 동경에 찬물을 끼얹는 자가 등장하니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다. 도덕적인 사람들의 사회에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친다고? 과연 그러할까? 니체는 낭만적인 유토피아를 꿈꾸는 우리에게 반문한다.

도덕적인 사람들의 사회에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우리는 인간의 도덕적인 행동인 선행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덕은 사회 속에서 선행이라는 형태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선행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내가 외부 세계를 대면하면서 스스로 취하는 도덕적 행동이고, 둘째는 다른 사람을 대하면서 실천하는 도덕적 행동이다. 전자는 순종이요, 후자는 자선(慈善)이다. 어른들의 말을 잘 듣고 다른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욕심이나 주장을 내려놓는 혁진 씨의 행동은 순종적인 행동이므로 도덕적인 행동이다. 또한 주저하지 않고 불쌍한 사람을 돕는 혁진 씨의 행동은 자선적인 행동이기에 역시 도덕적인 행동이다. 그렇다면 도덕적인 사람들의 사회에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지를 알아보려면 이 두 가지 선행이 각각 자신에게 또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를 생각하면 된다. 얼핏 생각해 보면 순종은 자신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자선은 타인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산출한다. 우리는 외부 세계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평안을 유지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타인의 기쁨을 유발할 수 있다. 선행으로 말미암아 우리 사회에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흐르게 된다. 도덕적인 사람들의 사회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사회인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논리를 니체는 어떻게 생각할까. 니체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우리들의 생각과 다르게 그는 도덕적인 사람들의 사회에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친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오히려 니체는 도덕적인 사람들의 사회에는 부정적인 에너지가 넘친다고 비판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우리가 도덕이라고 부르는 요소를 계보학적으로 탐구한다. 계보학은 어떤 것의 기원을 추적하는 학문이다. 니체는 도덕의 기원을 추적해 우리가 지금 긍정적으로 여기는 도덕이 과연 긍정적인 도덕인지 분석한다. 정말로 지금의 도덕이 인간, 즉 나 자신과 타인을 위해 생겨난 도덕인가? 『도덕의 계보』는 이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 도덕에 정교한 계보학적 분석을 가한다.     


좋음과 나쁨이 선과 악으로

도덕은 일종의 판단 기준이다. 인간이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을 지양해야 하는가. 도덕은 인간이 지향해야 할 것과 지양해야 할 것을 지시한다. 우리는 도덕을 기준으로 삼아 지향해야 할 것과 지양해야 할 것을 구분한다.

니체에 따르면 먼 옛날, 가령 고대 그리스에서의 도덕은 지금의 도덕과는 판이했다. 원래의 도덕은 좋음을 지향하고 나쁨을 지양했다. 여기서 좋음과 나쁨은 추상적인 느낌의 표현이 아니다. 좋음과 나쁨은 다분히 구체적인 개념이다. 먼저 좋음은 주체성을 의미한다. 원래의 도덕에서 인간이 지향해야 할 것은 주체성이었다. 주체성을 바탕으로 진취적인 자기실현을 꾀하고 강인한 인간으로 존립하는 태도가 도덕적이라고 평가받았다. 강한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었고 곧 도덕적인 사람이었다. 원래의 도덕을 따라 좋음을 지향하는 사람은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해 내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목숨을 건 싸움도 불사했다. 무사안일은 그에게 수치였다. 자연히 자기실현을 꾀하는 도전적인 사람에게는 활기가 넘쳤다. 니체는 이미 좋음을 지향하는 사람을 힘에의 의지를 실현한 위버멘쉬라고 명명한 바 있다. 이처럼 과거에는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도덕적이었다. 도덕적인 사람은 사회에서도 다수의 노예를 거느린 주인으로 군림했다.

반대로 인간이 지양해야 할 나쁨은 안일성을 함의한다. 좋음이 주체성을 표방한 자기실현을 꾀한다면 나쁨은 안일성에 구속된 자기방어를 바란다. 매사에 미온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는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비도덕적인 사람은 약한 사람, 또 시원찮은 사람을 가리켰다. 그는 자신만의 가치 창조는커녕 신변의 안전에 급급해 갈등을 피하기만 했다. 평화와 평안은 그에게 훈장이었다. 당연하게도 축 처진 그의 어깨에서는 그 어떤 활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힘에의 의지를 발현할 의지조차 갖지 않은 것이다. 인간이 지양해야 할 나쁨의 상태에 머문 채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비도덕적이었다. 그는 사회에서 좋음을 지향하는 주인의 지배를 받는 노예였다.

이렇게 원래의 도덕은 좋음을 지향하고 나쁨을 지양했다. 좋음과 나쁨은 주인과 노예를 결정하는 자질이기도 했다. 강한 주인이 약한 노예를 지배하는 사회 구조는 합당한 형태로 여겨졌다. 그러나 원래의 도덕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았다. 기독교가 등장해 도덕의 판단 기준을 역전시킨 것이다. 주인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노예들은 기독교의 등장에 쌍수를 들었다. 니체는 기독교의 도덕 역전 작업이 노예들의 지지를 얻어 수월하게 진행되었음을 지적한다.     


비참한 자만이 오직 착한 자다. 가난한 자, 무력한 자, 비천한 자만이 오직 착한 자다. 고통받는 자, 궁핍한 자, 병든 자, 추한 자 또한 유일하게 경건한 자이며 신에 귀의한 자이고, 오직 그들에게만 축복이 있다.

(김정현 옮김, 책세상, 2002, 363쪽)     


비참한 자, 가난한 자, 무력한 자, 비천한 자, 그리고 고통받는 자, 궁핍한 자, 병든 자, 추한 자……. 기독교는 이들만이 착하고 경건하다고 칭찬했다. 원래의 도덕이 지양한 나쁨의 요소를 기독교는 지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비도덕적인 평가를 받았던 나쁨의 자질에 도덕적인 평가를 내린 것이다. 여기서부터 나쁨은 선(善)이라는 새로운 명찰을 달게 된다. 안전을 추구하고 평화를 바라며 평안에 만족하는 노예의 태도는 기독교 아래서 도덕적인 태도로 둔갑했다. 거꾸로 싸움을 불사하고 도전을 이어 나가며 의지를 표출하는 주인의 태도는 비도덕적인 태도라고 비난받았다. 좋음의 자질은 선한 사람, 즉 나약하고 불쌍한 사람을 괴롭히는 비도덕적인 자질로 변질되었다. 좋음에는 악(惡)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좋음을 지향하고 나쁨을 지양했던 도덕은 선이라는 이름으로 재단장한 나쁨을 지향하고 악이라는 이름으로 폄하된 좋음을 지양하는 도덕으로 뒤바뀌었다. 이렇게 좋음과 나쁨의 도덕은 선과 악의 도덕에 밀려 뒤안길로 사라졌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는 새로운 도덕의 출현 과정을 서술한다. 이제 원래의 도덕은 몰락하고 새로운 도덕이 탄생했다. 새로운 도덕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지금 우리가 도덕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를 형성하고 있다. 좋음과 나쁨을 구분하던 원래의 도덕과 반대되는 도덕이 우리의 도덕관을 지배하는 실정이다. 새로운 도덕은 우리에게 선을 강요한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우리는 인간이라면 응당 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혁진 씨처럼 착한 사람은 도덕적이라고 여겨진다. 사람은 착해야 한다. 사람은 사회 속에서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갇힌 것이다.     


선행의 부정적인 에너지 제거하기

새로운 도덕의 영향으로 우리는 사회에서 선행을 실천한다. 선행은 외부 세계를 대면하면서 나타나는 순종이라는 행동과 다른 사람을 대하면서 나타나는 자선이라는 행동으로 구체화된다. 그럼 니체의 시각에서 도덕적인 사람들의 사회에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지 다시 살펴보자. 이를 위해서는 역시 순종과 자선이라는 선행이 각각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산출하는지 고찰해야 한다.

순종은 자신에게 긍정적인가. 새로운 도덕에서의 순종은 안일성의 표본이다. 순종은 외부 세계와의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외부 세계와 갈등이 일어나지 않으면 내면의 평화는 깨질 일이 없다. 그러나 또는 그럼으로써 순종이라는 행동에서는 주체성의 발현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주체성은 자기실현을 꾀하는 도전적인 모습을 통해 발현된다. 그런데 새로운 도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해 내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목숨을 건 싸움도 불사하는 사람은 평화를 깨뜨리는 사악한 사람으로 치부된다. 주체성의 발현은 악이다. 비도덕적이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자기 자신을 위한 욕망을 제거하고 자기주장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렇게 우리는 순종을 실천한다. 순종을 실천하는 사람은 사회에서 도덕적이라고 인정받는다. 하지만 그에게서 자기 힘으로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하는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오늘날 우리는 좀 더 위대해지려는 그 어떤 것도 보지 못한다.

(같은 책, 376쪽)     


순종하는 사람은 오직 자기방어에만 관심을 둔다. 그는 마치 가축화되어 고양이 신세로 전락한 사자와 같이 행동한다. 사회에 그저 “네!”라고 대답하며 기꺼이 순종하는 것이다. 이미 그의 힘에의 의지는 말살된 지 오래다.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갈등이라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자기를 실현하려는 야망이 없다. 그의 어깨는 축 처진 상태다. 하루하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그의 유일한 위안이다.

그렇다면 자선은 타인에게 긍정적인가. 순종이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말살하고 자기실현을 억압하는 선행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선은 타인의 힘에의 의지를 제거하고 자기실현을 방해하는 요인이다. 주체성은 자기 손으로 무언가를 쟁취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표출된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힘에의 의지는 극대화된다. 자선은 이러한 주체성의 표출을 막아 버린다. 자선이라는 선행은 타인으로 하여금 안일성의 늪에 침잠하게 만든다. 자선의 수혜를 입은 사람은 안일성의 늪으로 점점 깊게 빠져든다. 불쌍한 처지에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자선을 받을 수 있으니 늪에서 탈출하려는 의지를 가질 필요가 없다. 심지어 그는 더 많은 자선을 받기 위해 불쌍한 처지를 자처한다. 순종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의 어깨 또한 축 처진다.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하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주체적인 인간과 자선의 수혜에 의존해 끊임없이 비참해지는 안일한 인간 중에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다. 자선은 타인을 일시적으로 기쁘게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그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리하자면 도덕적인 사람들의 사회는 어깨가 축 처진 사람들의 사회다. 그들이 실천하는 순종과 자선이라는 선행은 자신과 타인에게 전혀 긍정적이지 않다. 순종으로 인해 자신은 고분고분한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고 자선으로 인해 타인은 비참한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회에서 순종과 자선이 반복된다면, 말을 잘 듣는 사람들은 평생 자신의 주장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할 것이고 구걸하는 사람들은 평생 구걸하는 처지를 면치 못할 것이다. 일반적인 기대와 다르게 도덕적인 사람들의 사회에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흐르지 않는다. 사회에 착한 사람들만 모여 있다면 그 사회는 안일성으로 점철된 사회일 것이 뻔하다. 그 어떤 의지도 활기도 나타나지 않는 사회에는 부정적인 에너지가 폭증한다. 도덕적인 사람들의 사회에는 부정적인 에너지가 넘친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선행의 부정적인 에너지 제거하기다. 이 작업이 성공하려면 새로운 도덕이 지향하는 선이 아닌 원래의 도덕이 지향하는 좋음에 따라 행동을 달리해야 한다. 선행을 좋음의 행위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선행이 외부 세계를 대면하면서 스스로 취하는 도덕적 행동과 다른 사람을 대하면서 실천하는 도덕적 행동으로 나뉘듯이, 좋음의 행위도 똑같은 두 행위로 나뉜다. 원래의 도덕에서, 외부 세계를 대면하면서 스스로 취하는 도덕적 행위는 순종이 아닌 자기실현이고 다른 사람을 대하면서 실천하는 도덕적 행위는 동기 부여다. 우리는 외부 세계의 간섭과 견제에 맞서 부단히 자기를 실현해야 한다. 동시에 타인 또한 그렇게 행동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어야 한다. 자기실현과 동기 부여라는 도덕적 행위는 나를 포함한 우리 사회의 사람들이 주체성을 표출하는 원동력이다. 이 두 가지 행위가 순종과 자선이라는 선행을 대체하는 순간 우리 사회에는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사람들로 가득 찰 것이다. 어깨가 축 처진 사람들이 내뿜는 부정적인 에너지는 제거된다. 어깨를 펴고 당당한 사람들이 내뿜는 활기로 인해 사회에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쳐 흐를 것이다. 



여태껏 우리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지금의 도덕이 강요하는 선행을 실천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아 왔다. 스트레스를 받으면서까지 착한 사람이 되려고 애쓴 꼴이다. 그러나 지금 착한 사람 콤플렉스는 우리의 내면을 갉아먹는 해충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도덕의 민낯을 공개하면서 우리는 더 이상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시달릴 필요가 없어졌다. 지금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는 스스로를 노예로 전락시키는 굴레다. 결국 착한 사람 콤플렉스 벗어던지기는 노예의 굴레 벗어던지기다.

앞서 언급한 질문을 상기해 보자. 정말로 지금의 도덕이 인간, 즉 나 자신과 타인을 위해서 생겨났는가? 우리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변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분명히 정해진다. 나는 착한 사람인가 좋은 사람인가? 더불어 나는 타인에게 착한 사람이 될 것인가 좋은 사람이 될 것인가? 선과 좋음 중에 무엇을 선택할지 답은 정해져 있다.

덧붙이자면 니체의 『도덕의 계보』는 국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복지 제도에 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복지 제도가 자선을 목적으로 하는가 동기 부여를 목적으로 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국민에게 무작정 퍼 주기만 하는 복지 제도는 오히려 국민의 힘에의 의지를 감소시킬 위험을 내포한다. 자선을 목적으로 한 복지 제도는 사회에 복지병을 야기할 것이다. 복지 제도는 국민의 힘에의 의지 독려를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국민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가꾸도록 의지를 자극하고, 자기를 실현하려고 노력할 수 있게 도와준다면 복지 제도는 성공적으로 시행될 수 있다. 주체적인 국민의 국가로 나아갈지 안일한 국민의 국가로 머무를지는 복지 제도의 방향에 달렸다. 이와 함께 사회에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칠지 부정적인 에너지가 넘칠지가 판가름 날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 1844~1900)

니체는 1844년 독일 뢰켄에서 태어난다. 어릴 때부터 학문, 언어,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드러내지만, 아버지가 일찍 죽어 불안정한 환경에서 자란다.

그럼에도 본 대학에 입학해 학업을 이어 나가던 니체는 스승인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적을 옮긴다. 이때 그는 쇼펜하우어 철학에 이끌림과 동시에 작곡가 바그너와 어울리며 많은 영향을 받는다.

이후 니체는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교수로 일한다. 그러나 두통과 위장병, 심지어는 시력 감퇴까지 겪어 건강이 악화된다. 결국 35세에 교수직에서 물러난 니체는 집필 활동에 집중한다. 니체는 죽기 직전까지 활발한 집필 활동을 펼치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등 유명한 저서를 출간한다.

정신 질환까지 앓아 더욱 건강이 악화된 니체는 1900년 죽음을 맞는다.          



※ 추천 도서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김정현 옮김,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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