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잔자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사례 1.
소개팅을 하는 오늘은 주성 씨에게 나름 중요한 날이다. 오랜 솔로 생활을 청산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학창 시절에는 심심치 않게 연애했던 주성 씨다. 그때에는 오로지 좋아하는 마음 하나만으로 누군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한 이후에는 연애를 하는 데 조건이 붙기 시작했다. 주성 씨는 상대방에게 마음이 동해도 어느 순간 성격, 취미, 직업, 소득, 재산 등 여러 조건을 계산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학창 시절과는 달리 연애하기가 쉽지 않았다. 길고 긴 외로움의 시간 끝에 주성 씨는 드디어 오늘 소개팅을 나간다. 약속 장소인 카페에 도착한 주성 씨는 상대방과 차분히 대화를 나눈다. 외모도 아름답고 말도 잘 통해 그녀에게 마음이 이끌리지만, 그녀에 대해 알면 알수록 주성 씨는 점점 주저하게 된다. 그녀의 성격과 취미와 직업을 따져 봤을 때 과연 그녀가 자신과 잘 맞을지 의문이 든다. 주성 씨는 머릿속으로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린다. 계산기를 두드려 본 결과 주성 씨는 그녀와 만나지 말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사례 2.
성은이는 전과를 할까 고민 중이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던 성은이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있다. 그림을 그릴 때면 성은이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녀의 마음은 언제나 그림을 향한다. 미술은 그녀가 예전부터 몰두했던 영역이자 지금도 몰두하는 영역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 앞으로도 미술을 계속해야 할지 의구심이 든다. 미술 전공자의 처참한 취업률을 슬슬 실감하기 때문이다. 졸업한 선배들은 하나같이 몇 년째 취업 준비만 한다. 취업이 안 돼서 소식이 뚝 끊긴 선배들도 많다. 예술을 하면 배고프게 산다는 말은 예전부터 들어왔어도 이 정도인지는 몰랐다. 성은이의 마음은 아직도 그림을 향하지만, 그녀는 취업을 위해 다른 공부를 해야 하나 고민한다. 디자인이나 프로그래밍과 관련된 학과로 적을 옮기면 취업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렇지만 그림을 포기하기는 싫다. 그런데 만약 그림만 그린 결과 취업을 하지 못한다면? 성은이는 머릿속으로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린다. 그럴수록 계산의 결론은 전과에 가까워진다.
구속된 죄수의 계산기 두드리기
살면서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삶은 판단과 결정의 연속인 만큼 우리는 항상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야 한다. 우리는 매번 어떤 결정이 더 이익을 가져다주는지, 즉 어떤 결정이 미래에 더 큰 호재로 작용할지를 판단해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다.
계산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다양하다. 우선 계산이라는 단어에 충실하게 경제적인 손익이 영향을 미친다. 가령 우리는 직업을 구할 때 어느 정도의 연봉을 받아야 이익인지를 끊임없이 계산한다. 법과 제도도 계산에 영향을 주는 대표적인 요인이다. 빵이 먹고 싶다고 해서 남의 빵을 허락도 없이 먹으면 안 된다. 자칫하면 법적인 처벌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계산해 보라. 남의 빵을 허락도 없이 먹음으로써 느끼는 포만감보다 법적인 처벌을 받음으로써 얻는 고통이 당연히 더 크다. 이 외에도 도덕, 자존심, 상식이 계산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스스로가 내리는 판단과 결정이 도덕이나 자존심, 상식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지 계산한다.
평소라면 계산기 두드리기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오히려 충실히 계산기를 두드린 사람에게 이득을 가져다주어 그의 만족감을 유발한다. 그런데 만족감의 자리를 괴로움이 차지하는 순간이 생긴다. 마음이 계산의 결과를 역행하는 순간이다. 내 마음은 오른쪽을 향하는데 계산의 결과는 왼쪽을 가리킨다. 이런 순간에 마음과 계산기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만 계산기를 두드린 결과 애프터를 신청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한 주성 씨, 마음은 그림을 향하지만 계산기를 두드린 결론은 전과로 도출된 성은이. 모두 마음과 계산기가 충돌한 경우다. 마음과 계산기가 갈등을 일으킨 탓에 두 사람은 일말의 괴로움을 겪는다.
그렇다면 머릿속의 계산기는 우리가 마음 가는 대로 살지 못하게 만드는 기제다. 우리는 계산기라는 감옥에 구속된 존재다. 계산기는 손익 계산, 법, 제도, 도덕, 자존심, 상식이라는 다양한 수갑으로 우리의 두 손을 꽁꽁 묶는다. 격리된 두 손은 마음과 멀어진다. 계산기를 파괴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마음 가는 대로 살 수 없다. 항시 자유를 박탈당한 죄수나 다름없는 셈이다.
그리스 소설가 카잔자키스(N. Kazantzakis)는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로 우리 머릿속의 계산기를 부순다. 그는 모든 인간이 계산기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쟁취하기를 바란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로 신음하는 고향 크레타 섬의 참상을 목격하며 자란 카잔자키스에게 자유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치였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도 그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찬가를 멈추지 않는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줄거리는 평이하다. 작품의 화자인 ‘나’는 탄광을 운영하기 위해 크레타 섬으로 향한다. 도중에 알렉시스 조르바라는 이름의 기이한 노인과 만난다. 조르바는 화자를 만나자마자 밑도 끝도 없이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요구한다. 조르바에게 알 수 없는 매력을 느낀 화자는 그와 함께 크레타 섬으로 가 탄광을 운영한다.
줄거리만 보면 소설가의 대표작치고는 다소 심심한 내용일 수도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원제를 직역하면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행적’인데, 정말로 줄거리 자체가 조르바의 삶과 행적으로 이루어진다. 이토록 줄거리에 충실한 제목도 얼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작품의 제목에 주인공의 이름이 삽입된다는 말은 곧 매력적인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말과 같다. 『오이디푸스 왕』이 그렇고 『파우스트』도 그렇다. 마찬가지로 카잔자키스의 작품에도 조르바라는 특이하고 매력적인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조르바라는 인물은 줄거리의 평이함에서 비롯되는 심심함을 상쇄할 정도로 파격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카잔자키스는 조르바를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지를 알린다.
자유로운 미친놈, 조르바
작품 속 주인공인 조르바는 마음 가는 대로 사는 사람이다. 그는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는 법이 없다. 그는 연봉도 계산하지 않고 그냥 마음이 이끌리면 직업을 선택한다. 빵이 먹고 싶으면 법과 제도도 신경 쓰지 않고 눈앞의 빵을 그냥 먹는다. 다른 사람은 모두 계산기의 구속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그는 다르다. 조르바는 자신을 속박하는 그 어떤 구속도 허용하지 않는다. 만약 조르바가 주성 씨와 성은이를 만났다면 이렇게 소리쳤을 것이 분명하다. “마음 가는 대로 연애해!” “마음 가는 대로 그림 그려!”
그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 조르바는 그야말로 자유의 화신이다. 조르바 스스로도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여긴다. 이는 화자가 조르바와 처음 만나는 대목에서부터 두드러진다. 조르바는 뜬금없이 화자에게 자신이 인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무슨 말이냐고 반문하는 화자에게 조르바는 말한다.
보쇼, 자유인이란 거요.
(유재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8, 37쪽)
자유인. 조르바는 자신을 인간으로 칭한다. 그에게 인간은 곧 자유다.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인간은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아니다. 조르바는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기에 계산기를 따르지 않고 마음을 따른다. 마음 가는 대로 사는 조르바의 삶은 자유의 극한을 실현하는 삶이다. 조르바가 크레타 섬으로 향하는 화자에게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요구한 이유도 그저 마음이 그렇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마음이 여행을 향한다. 마음이 크레타 섬을 향한다. 마음이 탄광 운영을 향한다. 조르바의 판단과 결정의 근거는 단지 마음뿐이다.
작품이 전개되는 내내 마음 가는 대로 사는 조르바의 기행은 계속된다. 크레타 섬에서 탄광을 운영하던 중 조르바는 운영에 필요한 물품을 사러 출장을 나선다. 그리고 출장을 간 지역에서 경비의 상당량을 유흥비로 탕진한다. 화자랑 같이 탄광을 운영하는 조르바의 이러한 행동은 관리자로서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다. 게다가 경비는 온전히 화자의 주머니에서 지출된 돈이다. 그런데도 마음이 술과 여자를 향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조르바는 마음껏 유흥을 즐긴다.
이 에피소드는 조르바의 다른 기행에 비하면 그나마 귀여운 축에 속한다. 조르바가 화자에게 들려준 자신의 과거 이력은 더욱 화려하다. 조르바는 예전에 일했던 탄광에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사람을 구타했고, 가정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무작정 여행을 떠났으며, 자신에게 애인이 있건 없건 끌리는 여자를 만나면 무조건 접근부터 했다. 또 저금한 돈을 탈탈 털어 즉흥적으로 산투리라는 악기를 산 후, 연주법을 배우기 위해 산투리의 거장에게 납작 엎드린 적도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엽기적인 이력은 조르바 스스로 자신의 오른손 검지를 자른 일이다. 조르바는 화자에게, 도자기를 만들 때 오른손 검지가 성가시게 느껴져서 잘라 버렸다고 설명한다. 이게 말이 되는가!
이렇듯 조르바의 행동에는 합리적인 이유 따위는 없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는다. 마음이 가면 하고 마음이 안 가면 안 한다. 그는 유흥을 즐기고 싶어서 경제적인 손익을 계산하지 않고 그냥 즐겼다. 사람을 때리고 싶어서 법도 무시하고 그냥 구타했다. 마음 가는 대로 그냥 떠나는 그를 결혼이라는 제도도 구속하지 못했다. 여자를 유혹하는 데 있어 도덕성을 계산하는 것도 조르바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산투리 연주법을 배우기 위해 자존심도 버렸다. 심지어 오른손 검지가 성가셔서 스스로 자르는 몰상식한 결단까지! 손익 계산, 법, 제도, 도덕, 자존심, 상식이라는 다양한 수갑으로 사람들의 두 손을 묶는 계산기가 조르바의 손까지 묶을 수는 없었다.
이쯤 되면 조르바는 속된 말로 미친놈이다. 그냥 미친놈이 아니라 자유로운 미친놈이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조르바의 행동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이해는커녕 비난을 받아 마땅한 행동들이다. 그럼에도 카잔자키스는 조르바의 행동을 지적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라면 응당 조르바처럼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작품 속에 담는다. 카잔자키스는 왜 그토록 조르바를 찬양하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조르바의 남다른 활력에서 찾을 수 있다. 조르바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이지만, 그의 모습은 고된 삶에 지친 노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반대로 여느 젊은이 못지않은 활력을 내뿜는다. 카잔자키스는 조르바가 이렇게 활력을 내뿜을 수 있는 비결을 자유에서 찾는다. 항상 마음 가는 대로 사는 조르바는 자유롭다. 조르바의 자유로운 행동이 그의 삶에 열정과 활기를 불어넣는다. 또한 마음 가는 대로 살기에 조르바는 시종일관 즐거움을 만끽한다. 이러한 모습을 단순히 미친놈의 모습으로 치부하기에는 조르바에게서 위대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화자도 조르바의 알 수 없는 매력에 홀려 그를 데리고 크레타 섬으로 향하지 않았던가.
그런 점에서 조르바는 니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 위버멘쉬를 닮았다. 실제로 카잔자키스도 니체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작가 중 한 명이다. 카잔자키스 작품의 대표적 캐릭터인 조르바가 니체의 이상적인 인간인 위버멘쉬와 비슷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삶의 주인으로 존립하는 강인한 인간인 위버멘쉬처럼, 조르바는 그 어떤 것도 아닌 자신의 마음을 삶의 주인으로 삼는다. 위버멘쉬가 종교와 이성의 속박을 거부하듯이 조르바도 자신을 구속하는 일체의 계산기를 거부한다. 그는 자유를 방해하는 요소라면 설사 그것이 자신의 신체라도 과감하게 끊어 낸다. 이렇게 삶의 주도권을 확보함으로써 주체성의 자유를 누리는 조르바는 열정과 활기로 가득한 인간이다. 현재의 즐거움만이 그의 삶을 지배한다. 조르바는 생명력 넘치는 삶의 주인 위버멘쉬를 똑 닮은 것이다.
땅을 딛고 춤을 춰요
조르바의 진면목은 화자인 ‘나’와 비교할 때 더더욱 뚜렷해진다. 대조되는 인물인 조르바와 화자는 각각 땅과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간다. 조르바는 땅 위의 삶에 충실한 사람이다. 그는 열렬한 태도로 삶에 부딪히며 직접적인 경험을 한다. 이미 서술했듯이 조르바를 이끄는 삶의 원동력은 마음이다. 따라서 그는 아무 제한 없이 쾌락을 누린다. 조르바의 눈은 음식과 여자를 마주할 때 반짝인다. 반면 화자는 다르다. 화자는 하늘 위 이상을 추구한다. 고루하게도 그는 삶에 부딪히는 직접적인 경험이 아닌 독서를 통한 간접적인 경험을 선호한다. 조르바와는 상반되게 화자를 이끄는 삶의 원동력은 마음이 아닌 형이상학이다. 그래서 쾌락을 향유할 기회가 찾아와도 절제하는 모습을 보인다. 화자의 눈은 음식과 여자를 마주해도 반짝이지 않는다. 그의 눈은 평화와 평등과 같은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가치를 떠올릴 때 반짝인다.
형이상학은 화자에게 일종의 계산기다. 그는 판단과 결정을 순전히 마음에 맡기지 않는다. 화자가 탄광을 운영하는 이유도 탄광을 운영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가 아니라, 탄광에서 일하는 인부들과 다 같이 더불어 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서다. 그에게 탄광은 마음이 좇는 목적이라기보다는 형이상학적 가치를 실현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탄광을 수단으로 삼아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현실에 구현하길 소망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화자는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사는 조르바를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 알 수 없는 매력을 느끼면서도 그와 동행하기를 망설였다. 그런 화자에게 조르바는 계산은 그만 멈추고 빨리 결정이나 하라며 역정을 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저울질하고 있소? 한 푼 한 푼 계산하고 있는 거요? 여보쇼, 결정을 하쇼. 계산 따위는 집어치우고!
(같은 책, 29쪽)
남들과 같이 계산기를 두드리는 화자와 동행하면서 조르바는 화자의 샌님 같은 모습에 답답해한다. 땅 위에 당당히 발걸음을 내딛고 사는 조르바와 하늘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화자는 서로 맞으려야 맞을 수가 없다. 한쪽은 자유로운 삶을 살고 한쪽은 구속된 삶을 산다. 한쪽은 마음에 충실하고 한쪽은 계산기를 두드린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같이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결국 조르바의 열정과 활기가 화자의 이상과 추상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부터 화자는 조르바의 자유로운 모습을 보며 자신을 서서히 변화시키기에 이른다.
모든 형이상학적인 낱말들을 내려놓고 자유로워지기.
(같은 책, 106쪽)
입으로만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외치는 자신과 달리 자유라는 위대한 가치를 몸소 실천하는 조르바의 모습은 화자에게 큰 깨달음을 준다. 하늘을 바라보았던 화자의 눈은 점차 땅을 향한다. 그는 조르바처럼 자유롭게 살기 위해 형이상학을 내려놓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면서 점점 조르바의 모습에 가까워진다. 이러한 화자의 변화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게 되는 우리의 변화와 같다. 계산기를 두드리던 화자가 마음 가는 대로 살겠다고 다짐하듯이 계산기를 두드리던 우리 또한 마음 가는 대로 살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화자의 변화에 몰입한다. 이야기가 취하는 1인칭 시점은 읽는 이로 하여금 화자의 변화에 보다 쉽게 동참하게 만든다.
화자의 변화는 작품 말미에서 절정으로 치닫는다. 조르바와 화자는 사업의 일환으로 산 정상과 땅을 잇는 케이블을 설치한다. 탄광의 갱도를 만드는 데 쓸 목재를 산에서 땅으로 신속하게 옮기기 위해서다. 케이블 설치 공사가 끝나고 대망의 준공식이 열린다. 조르바와 화자는 마을 사람들을 초대하고 양고기와 술을 대접한다. 그리고 드디어 완공된 케이블을 처음으로 가동하는 순간, 뜻밖에도 케이블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산에서 케이블을 타고 내려오는 목재가 너무 빠르게 내려오는 것이다. 더군다나 내려오면서 속도가 붙은 목재는 땅에서 사방팔방 튀어 오르며 준공식에 참여한 마을 사람들을 위협한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펼쳐진다. 대망의 준공식은 보기 좋게 망하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도망간다. 조르바와 화자만이 덩그러니 남는다.
화자가 여전히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람이었다면 사업 실패에 절규했을 것이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절규하지도 하늘을 바라보지도 않는다. 화자의 눈은 여전히 땅에 머무른다. 그는 덩그러니 남은 그 자리에서 조르바와 태연히 양고기를 뜯고 술을 마신다. 음식을 마주할 때 눈을 반짝이는 조르바처럼 화자도 땅 위의 삶을 즐기는 사람으로 변화한다.
실컷 양고기를 뜯고 술을 마신 조르바와 화자는 이어서 춤을 춘다. 아수라장이 된 행사장에서 두 사람이 춤을 추는 이 장면은 인간의 무한한 자유로움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중요한 장면이다. 춤을 추는 순간은 오롯이 현재의 리듬에 집중하며 마음 가는 대로 몸을 움직이는 순간이다. 우리는 팔다리의 각도를 계산하면서 춤을 추지 않는다. 이때만큼은 머릿속으로 계산하지 않고 오직 마음을 따르게 된다. 말하자면 춤을 추는 순간은 자유에 나 자신을 내던지는 순간이다. 춤을 추면서 우리가 느끼는 즐거움도 바로 자유에 기인한다. 춤은 자유의 표현이고 마음 가는 대로 사는 삶을 상징하며 즐거움을 형상화하는 의식인 것이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대신 땅을 딛고 즐겁게 춤을 추는 화자의 모습에서, 그리고 자신이 오랜 기간 준비했던 준공식이 쫄딱 망한 것도 신경 쓰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가 드디어 조르바에 필적하는 자유의 화신으로 거듭났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계산기를 두드리며 살게 되었을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마음이 아닌 계산기를 따라 살고 있다. 주성 씨처럼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도 여러 가지 조건을 잰다. 성은이처럼 몰두하고 싶은 분야가 있어도 취업 가능성을 따진다. 마음 가는 대로 살지 못하니 삶은 그만큼 자유에서 멀어진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의 삶을 계산기에 구속한 셈이다. 이와 같은 삶에서 열정과 활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삶이 즐겁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그럼에도 계산기를 두드리며 사는 사람이 정상인 사회가 되어 버렸다. 사회에서 마음 가는 대로 사는 사람은 비정상으로 여겨진다. 우리가 자유로운 조르바를 보며 처음에 당혹스러워하는 원인도, 그의 모습이 계산기를 두드리며 사는 사람의 모습과 크게 어긋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조르바처럼 사는 사람은 미친놈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자. 인간은 곧 자유이거늘 자유가 제거된 채 계산기에 의존하는 사람이 과연 정상일까? 아니면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사는 사람이 정상인가. 자유와 구속 중 무엇이 더 비정상인가? 만약 자유로운 조르바가 비정상이라면 우리는 왜 그의 열정과 활기, 그가 느끼는 즐거움을 동경하는가? 질문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마음 가는 대로 살지 못하는 구속된 삶이 오히려 비정상에 가깝다는 결론이 난다. 열정과 활기를 기대하고 즐거운 삶을 바라는 우리에게, 계산기에 구속된 삶은 우리의 기대와 바람에 완전히 반하는 삶인 것이다.
조르바는 말한다. 한 번쯤은 마음 가는 대로 살아 보라. 머릿속의 계산기를 내려놓고 나를 속박하는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에 도취되어 보라! 삶에 열정과 활기가 흘러넘치리라. 마음 가는 대로 산다면 우리는 그토록 바라던 즐거운 삶을 맛볼 수 있다. 자유를 누리는 진정한 인간은 이렇게 외친다. “마음 가는 대로 살래!”
□ 니코스 카잔자키스 (Nikos Kazantzakis, 1883~1957)
카잔자키스는 1883년 크레타 섬에서 태어난다. 당시 크레타 섬은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는 중이었기에, 어린 카잔자키스는 크레타 섬의 독립운동에 가해지는 핍박과 학살의 현장을 여과 없이 목격하고 자란다.
카잔자키스는 아테네 대학에 입학해 법학을 전공한다. 이후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간다.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H. Bergson) 밑에서 공부한 그는 이 시절에 니체 철학에 매료된다. 카잔자키스는 발칸 전쟁에 참전하고 정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현실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삶의 대부분을 여행으로 보낸 카잔자키스는 유럽과 아시아를 포함해 세계 곳곳을 돌아다닌다. 여행 도중 그는 잠깐 동안 친구 조르바스(G. Zorbas)와 탄광을 운영한다. 이 경험은 그의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에 온전히 투영된다. 이 외에도 『오디세이아』, 『미할리스 대장』을 비롯해 시, 소설, 희곡, 기행문 등 다양한 작품을 남긴다.
탁월한 작품성으로 세계에 이름을 알리며 노벨 문학상 후보에도 여러 번 오른 카잔자키스는 1957년 백혈병으로 사망한다.
※ 추천 도서
니코스 카잔자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유재원 옮김,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