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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필은 Nov 03. 2022

<고전정신> 사회4. 이대로만 자라 다오

루소의 『에밀』

사례 1.

세 살 난 아들을 키우는 희재 씨는 하루하루를 노심초사하며 보낸다. 활발하게 뛰어다니는 아들이 혹여나 다칠까 걱정하는 것이다. 아들은 자라면 자랄수록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뛰어다닌다. 집에서도 놀이터에서도 마트에서도 뛰어다니는 아들 때문에 희재 씨는 진땀을 뺀다. 아들을 쫓아다니는 일 자체는 힘들지 않다. 그보다도 천둥벌거숭이처럼 뛰어다니는 아들을 다치지 않도록 보살피는 일이 희재 씨를 고되게 만든다. 결국 희재 씨는 아들에게 뛰어다니면 안 된다고 가르친다. 그는 아들에게 함부로 뛰어다니다가 크게 다칠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겁을 준다. 아들이 말을 듣지 않고 마구잡이로 뛰어다니면 혼을 내기도 한다. 희재 씨의 계속되는 훈육에 아들은 차츰 얌전해진다. 이제 아들은 다칠 일이 없을 것이다. 희재 씨는 얌전해진 아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교육에 만족한다. 그런데 왜 아들의 몸이 예전에 비해 허약해진 느낌이 들지? 아들이 점점 아빠의 눈치를 보고 위축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례 2.

재성 씨는 곧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딸 때문에 고민이 많다. 슬슬 딸의 교육에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은 강박 관념이 재성 씨를 억누른다. 딸이 유치원에 다닐 때까지는 교육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던 재성 씨다. 그런데 주위의 친한 학부모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니, 재성 씨만 빼고 다들 유치원 때부터 자식 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딸과 친한 친구 중 한 명은 이미 중학교 수준의 수학을 배우기까지 한다. 조급해진 재성 씨는 여기저기 학원을 수소문한다. 다른 아이들은 다들 앞서가는데 딸은 제자리걸음만 걷는다는 생각이 그를 괴롭힌다. 결국 재성 씨는 딸을 여러 학원에 보낸다. 딸의 스케줄에 국어, 영어, 수학 학원은 물론이고 코딩 학원도 포함되기 시작한다. 모두 선행 학습을 위주로 하는 학원들이라 그런지 날이 갈수록 딸이 배우는 과목의 진도는 빨라진다. 이제 딸은 다른 아이들에게 뒤처지지 않을 것이다. 드디어 재성 씨는 한시름 놓는다. 그런데 왜 딸의 표정이 예전과 달리 어두워진 느낌이 들지? 딸이 점점 공부하기 싫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연스러운 교육과 인위적인 교육 중에서

우리는 자식 교육에 온갖 노력을 쏟아붓는다. 이 세상 모든 부모에게 교육은 제일 큰 관심사 중 하나다. 학부모들이 모이면 교육에 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학교는 어디로 진학해야 하는지, 어느 학원이 잘 가르치는지, 어떤 과목을 얼마나 공부해야 하는지. 학부모들이 나누는 교육의 주제도 다양하다. 부모는 아이가 건강하고 똑똑하게 자랐으면 하는 바람에, 자식 교육에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한다.

부모의 관심 아래 아이는 다양한 교육을 받는다. 아이가 받는 교육은 여러 형태가 있겠지만, 다소 진부하더라도 신체에 대한 교육과 정신에 대한 교육으로 나눌 수 있다. 교육의 목표는 아이를 신체적으로 건강하게 만드는 동시에 정신적으로 똑똑하게 발달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운동, 식습관, 위생을 포함한 다방면의 교육으로 아이의 건강을 챙긴다. 아울러 독서, 공교육, 사교육을 비롯한 다각도의 교육으로 아이에게 지식을 학습시킨다.

그러다 아이가 건강하고 똑똑하게 자랐으면 하는 부모의 바람이 과도해지는 때가 생긴다. 이런 경우에 교육의 형태는 달라진다. 먼저 건강한 아이를 바라는 부모의 교육은 과잉보호의 형태를 띤다. 우리는 아이의 신체에 위협이 될 만한 요소를 멀리하기 시작한다. 아이를 다치게 할 수도 있는, 날카롭거나 무겁고 단단한 물건은 아이의 주변에서 제거된다. 이른 나이에 입은 신체의 상처는 비가역적인 손상으로 남을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만약 다쳐서 장애가 생긴다면 아이는 평생 동안 불편한 몸을 이끌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뛰어다니는 아들을 혼내는 희재 씨의 교육도 같은 맥락에 속한다. 활발하게 움직이는 아이는 넘어지거나 어딘가에 부딪혀 다치기 십상이다. 그래서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우리는 아이의 움직임에 제한을 가한다. 아이의 움직임을 억제해 신체가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똑똑한 아이를 바라는 부모의 교육은 조기 교육의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는 아이가 또래 친구들보다 더 빨리 똑똑해지기를 원한다. 최소한 아이가 다른 친구들에게 뒤처져서는 안 된다. 아이를 똑똑하게 키우기 위해 우리는 아이의 학습에 아이보다 더한 열정을 표출한다. 딸을 여러 학원에 보내 선행 학습을 시키는 재성 씨의 모습은 이러한 조기 교육의 대표적인 사례다. 부모의 열정으로 인해 아이의 정신에는 이른 시기부터 어려운 지식이 주입된다. 그 결과 아이는 어른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를 후딱후딱 풀어내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과잉보호와 조기 교육이 아이를 건강하고 똑똑하게 할까? 과잉보호와 조기 교육의 실체를 파헤치려는 사람들에게, 프랑스의 사상가 루소(J.-J. Rousseau)가 쓴 『에밀』은 참고할 만한 책이다. 『에밀』은 에밀이라는 이름의 아이가 루소의 교육법에 따라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교육서다. 루소는 가상의 아이 에밀을 설정해, 에밀이 유년기-아동기-소년기-청년기를 거치는 동안 각 단계에 알맞은 교육법을 적용한다. 루소의 교육을 받은 에밀은 종국적으로 건강하고 똑똑하게 성장한다. 당시 『에밀』을 읽은 부모들이 루소에게 교육법을 물어봤을 정도로 그의 교육법은 꽤 효과적이었다. 심지어 『에밀』이 출간된 지 200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교육학계에서는 이 책을 주요한 교육서로 꼽는다.

루소가 에밀을 건강하고 똑똑하게 키워 낸 비결은 무엇일까. 루소의 교육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자연스러움’이다. 루소에 의하면 교육은 인간의 자연적 성향을 자유롭게 발현시키는 일이다. 루소는 인간이 타고나는 자연적 성향에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이는 『에밀』의 첫 부분에서부터 노골적으로 부각된다.     


모든 것은 창조자의 수중에서 나올 때는 선한데 인간의 수중에서 모두 타락한다.

(김중현 옮김, 한길사, 2003, 61쪽)     


루소에 눈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의 자연적 성향은 선하게 다가온다. 인간의 자연적 성향도 예외는 아니다. 여타의 존재가 그러하듯 인간 또한 선한 자연적 성향을 품은 채 태어난다. 아이는 타고난 자연적 성향을 자유롭게 발현함으로써 선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자연적 성향을 보존한 그는 신체적으로 건강하며 정신적으로 똑똑하다. 그러므로 교육은 아이가 가진 자연적 성향의 자유로운 발현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교육은 한결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아이에게 어느 하나라도 억지로 강요되면 곤란하다. 자연스러움을 상실하는 순간, 교육을 받는 아이의 자연적 성향은 자유롭게 발현되지 못할 것이다. 최고의 교육은 아이의 자연적 성향을 자유롭게 발현시키는 교육임을 명심해야 한다. 루소는 에밀에게 속삭인다. “이대로만 자라 다오!” 그는 에밀의 자연적 성향에만 집중한다. 이것이 루소의 교육법인 자연스러운 교육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교육이 루소가 강조한 자연스러움을 역행한다는 점이다. 이는 루소가 인간의 선한 자연적 성향이 똑같은 인간에 의해 타락한다고 주장한 이유기도 하다. 우리 사회는 이미 자연스러운 교육에 반하는 인위적인 교육을 시행한 지 오래다. 인위적인 교육은 끊임없이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억지로 시킨다. 그 과정에서 아이의 자연적 성향은 극도로 억제되거나 지나치게 자극된다. 당연하게도 아이의 자연적 성향은 자유롭게 발현되지 않는다. 자유롭게 발현되기는커녕 치명적으로 훼손된다. 인위적인 교육은 명목상으로는 아이를 건강하고 똑똑하게 키운다고 주장하지만, 오히려 아이를 허약하고 편협하게 만들 뿐이다. 루소는 인위적인 교육은 아이를 사회의 입맛에 맞게 개조하는 작업이라며 맹렬히 비판한다.

자연스러운 교육과 인위적인 교육 중에서 어떤 교육을 선택해야 하는가. 루소의 논의를 살펴본 우리는 당연히 자연스러운 교육을 선택할 것이다. 자연스러운 교육을 받은 아이가 건강하고 똑똑하게 자라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아이에게 행하고 있는 과잉보호와 조기 교육은 자연스러운 교육과 인위적인 교육 중 어디에 해당할까? 과잉보호와 조기 교육은 아이를 건강하고 똑똑하게 만드는 교육이 맞을까?     


움직이지 못하는 죄수

인간의 신체가 내재한 자연적 성향은 분출이다. 인간의 신체는 본능적으로 에너지를 내뿜고 싶어 한다. 신체에는 분출의 의지가 탑재되어 있다. 그리고 분출의 의지는 나이가 어릴수록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그리하여 가만히 앉아 있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어른에 비해 아이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아이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아이의 신체가 내재한 자연적 성향이 그로 하여금 몸을 움직이게 유도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몸을 움직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를 교육하면서 아이의 신체가 내재한 자연적 성향을 무시한다. 아이의 건강을 과도하게 신경 쓴 나머지 과잉보호의 교육을 가하는 것이다.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려면 다치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이것이 우리의 머릿속을 지배한 생각이다. 신체의 자연적 성향에 대한 관심은 머릿속을 지배한 생각에 떠밀려 사라진다. 과잉보호의 교육에 매몰된 우리는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한다. 우리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포대기로 싸매서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아이의 몸을 보호한다. 이렇게 아이의 신체는 삶의 출발점에서부터 구속을 당한다. 아이가 조금 자라서 걷거나 뛰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에게 다치지 않게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다. 이를 어기고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다치는 아이는 야단을 맞는다. 아이의 건강에 대한 우리의 과도한 관심은 아이의 신체에 끝없이 부여되는 제약으로 이어진다.

과잉보호의 교육으로 아이는 희재 씨의 아들처럼 얌전해진다. 우리의 의도대로 아이는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자랄 수 있다. 하지만 과잉보호의 교육을 받은 아이는 신체의 자연적 성향을 충분히 발현하지 못한다. 결국 아이의 신체는 허약해진다. 더불어 자신의 의지에 따라 몸을 움직이지 못한 아이는 성격까지 소심해진다. 어릴 때부터 사소한 신체의 움직임도 구속을 당했기에 부모의 눈치를 보는 성향이 생겨 버리는 것이다. 루소는 과잉보호의 교육을 받고 위축된 아이의 모습을 보며 죄수의 모습을 연상한다. 아이의 건강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 오히려 아이의 건강을 해치는 결과를 낳은 셈이다.

결론적으로 과잉보호는 신체에 가하는 인위적인 교육임이 밝혀진다. 과잉보호는 아이의 신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교육이 아니다. 반대로 허약하게 만드는 교육이다. 그렇다면 과잉보호가 아닌 자연스러운 교육이 아이의 신체에 행해져야 한다. 루소의 교육법을 참고해 보자. 루소는 절대로 에밀을 과잉보호하지 않는다. 그는 에밀의 신체에 가해지는 일체의 구속을 없앤다. 신체에 관한 교육에서 루소가 가장 중시하는 요소는 단연 자연적 성향의 발현이다. 에너지를 분출하려는 에밀의 신체는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만약 에밀이 끊임없이 움직이려고 하면 그냥 움직이게 놔둬야 한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교육의 전부다. 몸을 싸매는 도구와 움직이지 말라는 어른의 훈육은 자연스러움을 가로막는 방해물에 불과하다. 자연스러운 교육을 받는 에밀은 마음껏 움직이고 자신의 감각을 활용해 다채로운 세상을 체험한다. 에밀의 신체는 자연적 성향을 자유롭게 발현한다. 심지어 루소는 에밀이 다치는 것도 걱정하지 않는다. 도리어 엽기적이게도 에밀이 다치지 않는 것을 걱정한다.     


에밀이 다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기는커녕 오히려 나는 그가 단 한 번도 다치지 않아서 아픔을 모르고 자란다면 매우 유감스러울 것이다.

(같은 책, 134쪽)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 같으니! 그러나 루소의 설명을 들으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루소는 에밀이 고통을 겪는 인간으로 자라는 것보다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는 인간으로 자라는 것을 경계한다. 고통을 겪은 아이만이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을 체득할 수 있다. 아이의 성장에는 고통의 회피보다 고통의 경험이 훨씬 귀중하다. 마구 움직이다가 다쳐서 실컷 고통스러워해 본 아이만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고통을 무난히 극복한다. 반면에 고통을 모르고 자란 아이는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다. 고통에 대해 면역을 갖추지 못한 그는 어른이 되고 나서 찾아오는 자그마한 고통에도 힘들어할 것이 분명하다. 설사 에밀이 다치더라도 과잉보호를 지양하고 자연스러운 교육을 추구한 루소의 선택은 여기에 근거한다.

자연스러운 교육을 받아 자연적 성향을 자유롭게 발현한 에밀의 신체는 건강해진다. 에밀의 몸에서는 에너지가 넘친다. 넘어지거나 부딪혀서 다쳐도 그는 고통을 털고 금방 일어난다. 건강한 신체는 에밀의 성격에도 영향을 미친다. 소심한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에밀은 주체적인 성격을 함양한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몸을 움직이는 습관을 들인 탓이다. 그는 어른의 눈치를 보거나 위축되는 법이 없다. 에밀은 스스로 행동하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거듭난다.     


과열되어 화끈거리는 두뇌

신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도 자연적 성향을 내재한다. 정신이 내재한 자연적 성향은 점진적 발달이다. 정신은 인간이 나이를 먹으면서 발달한다. 다만 발달의 과정이 매우 점진적이다. 루소의 서술에 따르면, 상대적으로 이르게 성장하는 신체와 달리 인간 이성과 같은 정신적 능력은 아이가 자라면서 천천히 성숙한다. 이와 함께 정신은 아이의 나이에 걸맞은 지식을 스스로 형성한다. 점진적으로 발달하고 스스로 지식을 형성함으로써 아이의 정신은 자연적 성향을 자유롭게 발현시킨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래 친구들보다 더 빨리 똑똑해지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우리의 바람이 자연적 성향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교육의 의무를 압도하는 것이다. 아이를 똑똑하게 만들려는 우리의 바람은 조기 교육으로 투영된다. 조기 교육은 선행 학습으로 구체화되어 아이의 정신에 어려운 지식을 주입한다. 아이는 선행 학습을 통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어려운 지식을 접하게 된다. 아직 완전히 발달하지 않은 정신은 지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지식은 아이의 여린 정신에 닥치는 대로 침투한다. 우리의 바람이 교육의 의무를 압도한 것처럼, 어려운 지식이 아이의 여린 정신을 압도하는 양상이 펼쳐진다.

그 결과 점진적으로 발달하는 정신의 자연적 성향은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앞서 말했듯이 아이의 정신은 점진적인 발달 단계에 걸맞은 지식을 스스로 형성한다. 그런데 조기 교육은 정신이 스스로 형성해야 할 지식을 미리 제공한다. 지식에 압도된 아이의 정신은 지식 형성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어려운 지식을 저장한 아이의 두뇌는 과열되어 화끈거린다. 아이의 정신은 점점 고장난다. 그렇게 아이의 정신은 스스로 지식을 형성하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아이는 자신에게 주입된 지식만이 옳다고 믿는 독단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힌다. 똑똑한 아이를 희망하며 행했던 조기 교육이, 우리의 기대를 어기고 편협한 아이를 탄생시킨 것이다. 조기 교육으로 인한 두뇌의 과열은 또 다른 부작용을 야기하기도 한다. 바로 아이가 공부를 기피한다는 부작용이다. 자연적 성향을 억압당한 아이의 정신은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스트레스는 우울을 낳는다. 결국 아이의 무의식에는 공부는 곧 우울이라는 등식이 자리 잡는다. 조기 교육을 받는 아이는 어쩔 수 없이 공부에 매진하지만 그의 정신은 점진적으로 피폐해진다. 공부는 아이의 마음속에서 멀어진다.

이제 우리는 조기 교육이 자연스러운 교육인지 인위적인 교육인지 판단할 수 있다. 똑똑한 아이가 아닌 편협한 아이를 만드는 조기 교육은 인위적인 교육이다. 고로 조기 교육을 대신할 자연스러운 교육이 고안되어야 한다. 다시 루소의 교육을 참고하자. 에밀의 성장 단계에 맞춰 적절한 교육법을 적용하는 루소의 방법론은 정신에 대한 교육에도 고스란히 통용된다. 루소의 교육 사전에 선행 학습이라는 말은 없다. 루소는 어린 에밀에게 지식을 억지로 주입하지 않는다.     


그의 능력 범위 안에서 문제를 내고, 그것을 그 스스로 풀게 하라.

(같은 책, 300쪽)     


핵심은 지식의 수준이 아니고 지식의 습득이다. 아이가 어려운 지식을 억지로 외우는 일보다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이 월등히 중요하다. 지식이 필요한 시기가 되면 에밀은 스스로 학습해 지식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루소가 할 일은 에밀이 자신의 힘으로 직접 지식을 습득하도록 돕는 데 그친다. 그저 학습에 필요한 도구를 제공해 주거나 적당한 환경을 조성해 주면 그만이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교육의 전부다. 루소의 도움 속에서 에밀의 정신은 점진적으로 발달한다. 동시에 에밀은 자신의 정신에 알맞은 지식을 조금씩 형성해 낸다. 스스로 형성한 지식은 에밀의 머릿속에 확실히 박힌다. 그것은 온전히 에밀의 지식이다. 이런 식으로 에밀의 정신은 자연적 성향을 자유롭게 발현한다.

정신의 발달 속도에 맞춰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교육은 에밀을 똑똑한 아이로 키운다. 스스로 지식을 형성하는 일에 익숙한 에밀은 맞닥뜨린 문제도 스스로 해결한다. 또한 지식의 주입으로부터 보호된 그의 정신은 독단적인 사고방식에도 물들지 않는다. 자연스러운 교육이 에밀에게 문제 해결력과 열린 사고력을 선물한 것이다. 편협한 다른 아이들과 달리 에밀은 영리하고 창의적이다. 그는 공부를 기피하지 않는다. 정신의 자연적 성향을 자유롭게 발현한 에밀에게 공부는 흥미로운 활동이다. 에밀은 스스로 공부하는 똑똑한 아이로 자라난다.



루소의 『에밀』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교육을 제시한다. 루소는 아이의 신체에 대한 교육과 정신에 대한 교육 모두 인위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외친다. 인위적인 교육과 대조되는 자연스러운 교육이 아이를 건강하고 똑똑하게 만든다. 자연스러운 교육의 틀 안에서 루소는 아이의 거짓말, 언어 교육, 식습관, 성교육 등 다양한 항목을 다룬다. 『에밀』은 자연스러운 교육에 관한 총론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교육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교육은 아이가 어떤 어른으로 자랄지를 결정하는 중대한 요소다. 이는 아이 개인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을뿐더러 그렇다고 부모를 포함한 가정의 문제에 한정되지도 않는다. 아이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활동하는 주체가 된다는 의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교육은 개인과 가정을 넘어 사회 전체의 문제다. 부모가 자식 교육에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처럼, 우리 사회도 시종일관 교육에 관심을 기울인다. 어쩌면 아이에게 그토록 인위적인 교육을 강요하는 실태는 교육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지대하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인위적인 교육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어찌 됐든 인위적인 교육은 아이를 허약하고 편협한 어른으로 만드는 병폐다. 과잉보호로 빚어진 허약한 신체와 조기 교육으로 탄생한 편협한 정신은 우리 사회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인위적인 교육은 우리 사회가 질병에 취약하고 창의성이 결여된 사회로 부패한 원인의 상당한 지분을 차지한다. 이를 타개하고 밝은 미래로 나아가려면 인위적인 교육이 판치는 현상을 떨쳐 내야 한다. “이대로만 자라 다오!” 우리가 아이에게 이렇게 외칠 수만 있다면 미래의 우리 사회는 보다 건강하고 똑똑해질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자연스러운 교육을 시행해 아이들을 건강하고 똑똑하게 성장시킬 때다.          



□ 장 자크 루소 (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루소는 1712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난다. 루소는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이별한다. 그의 어머니는 루소가 태어나자마자 죽고 아버지는 어린 루소를 친척에게 위탁한다. 부모님과 떨어진 루소는 직공에게 도제 교육을 받으며 살다가 제네바를 떠나 방랑의 길을 걷는다.

방랑의 길에 들어선 그는 여러 지역을 전전한 관계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문학과 철학을 꾸준히 독학해 폭넓은 학식을 갖춘다. 이후 프랑스에서 디드로(D. Diderot)를 포함해 여러 사상가들과 교류한다. 이 시기에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 『사회계약론』, 『에밀』을 집필한다. 그러나 『에밀』이 당시의 종교를 비판한다는 이유로 고발당하자, 체포될 위기에 처한 그는 스위스와 영국으로 탈출해 도피 생활을 한다.

루소는 시간이 흐른 뒤 다시 프랑스로 귀환한다. 말년에 집필 활동에 매진해 여러 권의 저서를 추가로 쓴 그는 1778년 눈을 감는다.          



※ 추천 도서

장 자크 루소, 『에밀』, 김중현 옮김,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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