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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필은 Nov 02. 2022

<고전정신> 문학2. 전염병의 시대에 우리는

카뮈의 『페스트』

사례 1.

대학 졸업 후 2년 동안 취업 준비에 매진한 영현 씨는 요즘 고민이 많다. 전 세계적으로 예고도 없이 불어닥친 전염병으로 취업을 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하기야 전염병이 선전 포고 후 유행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 영현 씨를 포함해 전 세계인들이 처한 상황은 너무나도 좋지 않다. 국제기구부터 한 나라의 개인까지, 전염병의 전파를 막으려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두 노력함에도 전염병은 물러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전염병의 유행이 장기화되니 소비 심리는 위축되고 자연스레 기업은 채용 규모를 줄이는 중이다. 전염병의 유행은 2년 동안 취업 준비에 열을 올렸던 영현 씨에게 크나큰 악재로 작용한 것이다. 조만간 슬슬 취업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전염병으로 인해 기약 없는 취업 준비는 지속된다. 시간이 갈수록 영현 씨의 머릿속에는 포기라는 단어가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전염병이 종식된다고 해서 곧바로 취업한다는 보장도 없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하는가. 기나긴 취업 준비 생활에 지친 영현 씨는 무기력증과 우울증에 빠지기 일보 직전이다.     


사례 2.

현지 씨도 비슷한 처지다. 국내에서만 전염병이 퍼졌다면 현지 씨의 경우는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곧장 프랑스의 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 한 학기를 다니는 중인 현지 씨는 틈틈이 대학원 진학을 준비해 왔다. 학사 학위 취득 후 공백기 없이 바로 대학원에 입학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해 놨는데 웬걸, 전 세계로 확산된 전염병은 국내는 물론 유럽까지 덮쳤다. 당연히 현지 씨의 계획에도 차질이 생겼다. 이번 학기가 끝나기 전까지 전염병이 정복되면 좋으련만. 뉴스에서는 연일 전염병의 유행이 길어질 것이라는 전망만 쏟아 낸다. 현지 씨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대학원 진학 준비를 계속한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이미 먹구름이 드리운다. 그녀 또한 전염병이 단기간에 퇴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다. 유학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점차 시든다. 모든 계획이 틀어진 현지 씨는 무기력증과 우울증에 빠지기 일보 직전이다.          



에서 어떻게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재난을 동반한다. 아니 재난의 발생이 역사적 사건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으니 오히려 재난이 사건들을 동반한다고 해야 옳겠다. 좌우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세상을 뒤흔든 재난들을 간접적으로 접한다. 그래서인지 재난이 역사 속에서만 발생한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재난은 역사 속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재난은 언제든지 현실로 진입해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를 출 준비를 하고 있다. 마치 곧 분화할 휴화산과 같다.

사실 우리는 최근에도 여러 재난을 겪었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는 채 100년이 되지 않았다. IMF 사태라고도 부르는 외환 위기와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쳤던 금융 위기도 터졌다. 전쟁과 경제 위기 역시 삶의 토대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재난이었다.

전염병은 어떠한가. 중세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는 말할 것도 없고, 현대의 스페인 독감, 에볼라 출혈열은 인류를 괴롭힌 대표적인 재난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신종 플루, 메르스가 연이어 찾아오더니 최근에는 코로나19라는 재난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다. 이렇게 전염병은 세계적으로 대유행하며 사람들을 패닉에 빠뜨려 왔다. 전파는 빠르고 회복은 느린 특성으로 인해 전염병은 한 번 유행하면 우리에게 감당하기 힘든 타격을 준다. 현대인들은 그 어떤 재난보다도 전염병에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지속적으로 노출된다. 전염병이야말로 재난 중에서도 특히 극복하기 힘든 재난일 것이다.

전염병을 포함한 재난은 항상 우리를 덮칠 기회를 노린다. 어느새 예고도 없이 찾아와 우리의 삶을 파괴한다. 재난으로 삶이 파괴되는 합리적인 이유 따위는 없다. 재난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해 닥치는 것도 아니다. 마구잡이로 범람하는 재난 앞에 노출된 삶을 구하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는 삶의 재난을 미리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 그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말하자면 재난은 우리 삶을 짓누르는 운명의 수레바퀴의 일종이다.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서 짓눌린 오이디푸스의 삶처럼, 우리의 삶도 재난이라는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서 신음한다. 인간의 삶은 그만큼 취약하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예상치 못한 재난에 울부짖어도 소용없다. 이미 말했듯이 삶이 망가지는 합리적인 이유는 없기에 그 누구도 “왜”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삶을 노린 운명의 습격이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듯이 재난의 발생도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 그 무엇이다.

이를 프랑스 소설가 카뮈(A. Camus)의 언어로 표현하면 부조리(absurdité)다. 문자 그대로 조리(條理)에 맞지 않는(不)다는 부조리의 원래 뜻이 암시하는 것처럼, 부조리는 이해할 수도 해석할 수도 없는 문제 앞에 놓인 인간의 상황을 표현하는 용어다. 그런 의미에서 삶 자체가 부조리다. 우리의 삶은 재난을 포함해 이해할 수도 해석할 수도 없는 요소로 가득하다. “왜 삶은 이따위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은 항상 이성이라는 도구로 삶의 변덕스러움을 해부하려 하지만 이는 헛수고다. 카뮈에 의하면 삶은 원체 이성적으로 파악하기 힘든 총체다. 삶은 인간 이성에게 쉽사리 맨몸을 드러내지 않는다. 삶이라는 불가지(不可知)의 문제와 이성이라는 인간의 능력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심연이 존재한다. 이것이 우리가 삶을 모순덩어리라고 느끼는 이유다. 이러한 심연으로부터 비롯되는 불일치성. 바로 카뮈가 제시하는 부조리다.

카뮈는 인간 이성이 삶을 투명하게 파악하지 못한다고 지적함으로써 이성주의와 대립한다. 예측하고 통제하는 능력인 이성은 인간에게 자연을 지배하는 지배자의 지위를 부여했다. 그러나 정작 인간은 자신의 삶은 지배하지 못한다. 지배자의 지위는 자연에 대해서만 유효하다. 삶이라는 전혀 상이한 차원으로 넘어오면 인간은 그 지위를 박탈당한다. 인간이 지배의 대상으로 대면하는 자연과, 인간이 직접 참여하는 삶은 확연히 다른 영역이다. 이 지점에서 대상의 문제는 당사자의 문제로 전환된다. 삶은 자연처럼 인간이 마음대로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는 유형이 아니다. 우리는 삶을 지배하기 위해 다양한 사항을 고려하고 철저한 계획을 세우는 등 노력을 기울이지만, 언제 어디서 변수가 나타나 훼방을 놓을지 모른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전쟁, 경제 위기, 전염병과 같은 재난은 모두 삶을 휘두르는 변수다. 이는 미래를 준비해 나가던 영현 씨와 현지 씨가 전염병의 유행으로 삶의 지배권을 상실한 모습에서도 알 수 있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삶의 문제 앞에서 무력하다. 삶이라는 총체를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이성의 힘은 미약하다. 따라서 삶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시도는 언제나 실패로 귀결된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삶을 살아가는 이상 부조리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배자의 지위를 박탈당한 인간은 수용자의 신세로 전락한다. 부조리라는 수용소에 갇힌 수용자(收容者)이기도 하고 삶이라는 부조리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수용자(受容者)이기도 하다. 카뮈에게 사실상 두 단어는 동의어다.

삶이란 부조리한 것이라는 진실이 드러났다. 삶이란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서 벗어날 수 없다는 진실과 유사하다. 삶은 “왜”라는 물음에 곧이곧대로 대답해 주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왜”에서 “어떻게”로 이동해야 한다. 이제 해결해야 하는 물음은 다음과 같다. 수용자의 신세로 전락한 우리는 부조리 속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카뮈는 소설 『페스트』를 통해 삶이라는 부조리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그려 낸다.

  

수용자의 도시

『페스트』는 1940년대 프랑스령 알제리의 해안 도시 오랑을 소개하며 시작한다. 오랑은 다른 도시에 비해 특별할 것 없는 예사로운 도시다. 이 평온한 도시에 난데없이 전염병인 페스트가 발생한다. 페스트의 시작은 쥐다. 페스트에 감염된 쥐의 사체가 어느 순간 도시를 뒤덮는다. 페스트는 결국 사람에게까지 전염된다. 쥐의 사체를 치우던 건물 수위가 고열과 구토 증세를 호소한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이기도 한 의사 리외가 백방으로 치료했으나 수위는 사망한다. 그렇게 페스트는 점점 시민들에게 전파된다.     


사람들은 재앙이 비현실적인 것이고 지나가는 악몽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재앙이 항상 지나가 버리는 것은 아니다.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11, 55쪽)     


시간이 갈수록 페스트는 유행의 양상을 띠지만 사람들은 안일한 태도로 일관한다. 화자가 서술하듯이 그들은 오랑에 닥친 재난인 전염병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이 처음 보이는 반응은 죽음에 대한 부정이라는 가설처럼, 페스트의 유행을 선고받은 오랑의 시민들도 처음에는 페스트의 유행을 부정하려 한다. 심지어 재빠르게 상황을 공유하고 대책을 세워야 할 도청에서는 사태를 숨기기에 급급하다. 페스트에 비현실성을 부여하려는 노력 외에는 아무 대처도 하지 않은 결과, 당연히 페스트는 오랑 전반으로 확산된다. 사람들의 바람과는 반대로 페스트는 그저 지나가는 악몽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랑에 머무는 현실이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도시는 폐쇄된다. 시민들은 하루아침에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꼴이 된다.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된 도시에서는 부조리한 상황이 연쇄적으로 벌어진다. 도시 밖의 사람들은 도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도시 안의 사람들도 도시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요양을 위해 도시 밖으로 나간 병든 아내와 떨어진 리외, 취재를 위해 오랑에 방문했다가 꼼짝없이 갇혀 가족들과 이산한 기자 랑베르. 이 두 사람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도시의 폐쇄 조치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생이별한다. 더불어 도시 내에서도 통행금지 등 강제적인 규제가 시행된다. 자연스레 시민들 간의 공동체 의식도 약화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페스트는 성별과 연령을 불문하고 번져 더더욱 위세를 떨친다.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어린아이마저도 페스트의 희생양이 되어 목숨을 잃는다.

페스트로 인해 인간 고유의 가치들이 모조리 사라지는 것이다. 사람들의 이동을 통제함으로써 자유의 가치가 훼손된다. 가족들과의 단절이 일어남으로써 사랑의 힘이 희미해진다. 어린아이까지 목숨을 잃는 마당에 생명의 존엄성이 지켜질 리 만무하다. 자유, 사랑, 생명과 같은 존귀한 가치들은 통제, 단절, 죽음이라는 폐쇄적 불운에 잡아먹힌다. 이른바 부조리한 상황의 연출이다. 오랑은 부조리로 가득한 도시로 변한다.

여기에 심각성을 더하는 점은 오랑에 창궐한 페스트가 전례 없는 전염병이라는 사실이다. 새로운 전염병이니 환자를 치료할 치료제는 전무하다. 행정 당국은 급하게 도시를 폐쇄하고 강제적인 규제를 시행하며 뒤늦게 조치했지만 날이 갈수록 페스트는 강경해진다. 확진자와 사망자의 수는 날로 늘어 가는 한편 완치자의 수는 턱없이 적다. 페스트에 변이가 일어났는지 증세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불행하게도 전염병은 장기화되는 국면에 접어든다.     


결국은 그 유행병이 6개월 이상 가지 말라는 법도 없으며, 아마 1년, 또는 그 이상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말이다.

(같은 책, 99쪽)     


이야기의 막막한 분위기는 이어진다. 페스트는 언제 끝날지 모른다. 폐쇄된 도시 안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 마치 출구가 없는 미로에 갇힌 사람들을 보는 듯하다. 그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페스트는 멈추지 않을 수도 있다. 시국이 이러니 시민들은 점차 상황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접기에 이른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희미해진다.

결과적으로 시민들의 터전이었던 오랑은 시민들을 가두는 감옥 그 이상의 감옥으로 변질된다. 오랑이라는 감옥은 도시가 폐쇄되었다는 단순한 의미의 감옥에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도시뿐만 아니라 페스트에 갇혔다. 또 부조리 안에 갇혔다. 더 나아가 영겁의 시간 속에 갇혔다. 도시에 유행하는 페스트가 파생시킨 영원한 부조리가 시민들을 수용자로 전락시켰다. 『페스트』의 오랑은 수용자의 도시다.

수용자의 신세로 전락한 우리는 부조리 속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이제 카뮈는 삶에 관한 이 물음을 보다 구체화시킨다. 물음은 오랑에서 이렇게 변환된다. 전염병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인간아름다운 투쟁이여!

도시에, 페스트에, 부조리에, 영겁의 시간 속에 갇힌 수용자들은 제각기 다른 행동을 보인다. 대부분 시민들의 반응은 영현 씨와 현지 씨의 모습과 비슷하다. 지루하고 무의미한 일상을 보내며 무기력증과 우울증에 가까워지는 모습이다. 페스트 때문에 직장을 잃은 사람도 대다수라 도시에는 권태감이 넘친다. 상황이 이러니 시민들의 정서도 불안정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들은 조금만 거슬리는 일이 생기면 다른 사람에게 짜증을 내며 예민하게 군다. 반면에 페스트에 대해서는 차츰 신경이 둔해진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니 페스트를 경계하는 태도도 누그러지는 것이다. 이제 신규 확진자의 발생과 신규 사망자의 증가는 별다른 이슈가 아니다. 시민들은 타인에의 예민함과 페스트에의 무신경함을 복합적으로 지니고 살아간다.

남들과는 다른 행동을 취하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다. 누군가는 도시를 탈출하려고 애쓰는가 하면 의료진은 전염병의 일선에서 싸운다. 교회의 신부는 페스트 사태가 묵시록적 종말의 예고편이라고 소리친다. 특이하게도 페스트의 유행을 반갑게 맞이하는 지질한 인물도 등장한다. 평상시에 불행한 삶을 살던 그는 페스트의 유행으로 시민들 모두가 불행해지자 일종의 안도감을 맛본다. 시민들의 전체적인 삶의 질이 하향 평준화되면서 비로소 자신의 삶도 평범한 궤도에 올랐다고 안도하는 한심한 인물이다.

이처럼 카뮈는 부조리를 겪는 인간의 다양하고도 특이한 행동 양상을 그려 낸다. 동시에 그가 집중적으로 묘사하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리외와 타루다. 모두가 무기력해지는 상황 속에서도 리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환자들을 돌본다. 타루라는 이름의 청년은 사람들과 자원봉사단을 꾸려 리외를 돕는다. 이들은 감염과 죽음의 위험마저 불사하고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투쟁한다.

그런데 이들의 투쟁이 페스트에 맞서는 싸움이라고만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리외와 타루의 투쟁은 표면적으로는 페스트와의 투쟁이지만 이면적으로는 부조리와의 투쟁이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페스트와 싸운다. 그렇지만 기저에는 부조리와의 끊임없는 투쟁이 자리한다. 페스트는 우리가 삶을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 일상을 마비시키고 삶을 파괴하는 페스트의 폭정은 분명 하나의 부조리다. 고삐 풀린 말이 사납게 땅을 짓밟듯이 페스트도 우리네 삶을 짓뭉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페스트에 휘둘리는 삶의 부조리에 순응해 무기력하고 우울한 상태에 빠질 것인가? 부조리에 순응하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수용자의 신세를 면치 못한다. 이는 인간의 삶이 아니다. 부조리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상실하지 않으려면 순응이 아닌 다른 행동을 취할 필요가 있다. 페스트와 부조리에 맞서는 투쟁이라는 행동이다.

페스트와 부조리에 저항하는 투쟁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할 일을 하는 것”이다. 페스트가 유행하는 도시에서 리외와 타루가 할 일은 치료와 봉사다. 페스트의 유행이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두 사람은 자신의 할 일을 꾸준히 수행해 나간다. 그들의 행동은 페스트를 핑계로 지루하고 무의미한 일상을 보내는 시민들의 행동과 다르다. 페스트를 대면한 리외와 타루가 선택한 행동은 꿋꿋한 투쟁이다. 그리고 이들의 행동은 전염병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다.

리외와 타루의 투쟁을 묘사하면서 카뮈는 부조리 속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도출한다. 그것 역시 부조리에 맞서는 투쟁으로 요약된다. 즉 부조리한 삶 속에서도 충실히 자신의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할 일을 한다는 말은 단순히 리외와 타루처럼 공익 활동에 착수하는 열사가 되라는 뜻이 아니다. 공익 활동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을 멈추지 말고 계속하라는 의미다. 투쟁의 핵심은 앞을 향해 부조리한 삶을 열심히 끌고 나가는 자세다. 오랑의 시민들이 그러하듯이 삶의 부조리함을 핑계로 무기력하고 우울하게 앉아 있는 자세는 투쟁과 거리가 멀다. 전염병과 같은 재난이 개입해 삶이 계획대로 살아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치열하게 하던 일을 계속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페스트』에 등장하는 시청 직원 그랑의 행동은 모범적이다. 그는 타루와 함께 리외를 도우면서도 자신만의 과업인 글쓰기에서 손을 떼지 않는다. 그랑은 자신의 작품을 불후의 걸작으로 만들어 출판하고 싶어 한다. 이를 위해 작품의 단어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다듬는 그의 모습은 강박증적으로 비칠 지경이다. 그런데 이러한 투쟁이 그랑의 삶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아울러 부조리한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삶의 여정에 페스트라는 변수가 발생했음에도 그랑은 할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랑의 투쟁은 부조리한 삶 앞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행동의 전형이다.     


인간들은 늘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힘이고 순진함이기도 하다.

(같은 책, 400쪽)     


삶은 부조리한 것인데도 그 속에서 굳이 투쟁하는 어쩌면 인간은 순진한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하는 일을 성실하게 계속한다고 해서 삶을 감싼 부조리함이 없어지지도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열심히 투쟁해 봤자 바뀌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이러나저러나 삶은 부조리하다. 그러나 그 불편한 진실을 인식하는 상태에서도 자신의 할 일을 지속하는 데서 인간의 힘이 발휘된다. 화자가 언급한 대로 인간의 순진함이 곧 인간의 힘이다. 투쟁은 부조리 앞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만이 실천할 수 있는 고유의 행동이다. 투쟁은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힘을 고취시킨다. 부조리 속에서 투쟁하는 인간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페스트』는 부조리 속에서도 할 일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 나가는 아름다운 인간들의 기록이다.          



카뮈는 동시대의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J.-P. Sartre)와 함께 실존주의 작가로 분류된다. 실존주의는 인간의 존재 의미를 선천적으로 결정하는 본질인 신과 이성에 반대한다. 실존주의의 입장에서 인간의 존재 의미는 신의 자식이나 이성적 동물이라는 단편적인 정의로 규정할 수 없다. 플라톤이 존재의 본질로 상정한 이데아는 허구에 불과한 개념인 셈이다. 인간의 존재 의미는 미리 결정된 무엇이 아닌 인간 스스로 만들어 가는 무엇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실존주의는 인간의 존재 방식과 양태를 고민한다. 사르트르와의 불편한 관계 때문인지, 아니면 특정 사상에 분류되는 것을 꺼려서인지는 몰라도 카뮈는 스스로 실존주의 작가가 아니라고 밝혔다. 그렇지만 인간 실존의 문제는 카뮈가 평생 고민했던 문제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치열한 고민은 『페스트』와 더불어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방인』, 『시지프 신화』에서도 나타난다. 카뮈는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의 인간 존재를 진지하게 탐구했다.

진지한 탐구 결과 카뮈가 찾아낸 투쟁이라는 인간의 행동을 우리는 제대로 실천하고 있을까. 어차피 인간은 삶을 정확히 예측하지도 마음대로 통제하지도 못하니 열심히 살 필요가 없다는 허무주의에 젖어 있지는 않은가. 오랑의 페스트는 1년 가까이 유행하다 마침내 물러갔다. 페스트의 퇴치 과정에서 치료와 봉사에 몰두한 이들은 상당수가 페스트로 죽었다. 이에 반해 허무주의에 젖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 살아남았다. 투쟁한 사람들이 일반 시민들처럼 투쟁하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면 목숨을 부지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카뮈는 투쟁하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게 조명을 비춘다. 삶에서는 생과 사의 문제보다 순응과 투쟁의 문제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투쟁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전염병과 같은 재난으로 뒤범벅된 삶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지표다. 이 지표를 따를 때 우리는 부조리가 씌우는 무기력증과 우울증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1913~1960)

카뮈는 1913년 알제리로 이주한 유럽인 가문에서 태어난다.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령 알제리에서 자란 카뮈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생활고에 시달리며 성장한다. 학업 도중에는 건강 문제로 중퇴했다가 다시 복학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르니에(J. Grenier)를 포함해 여러 스승들을 만나 무사히 대학을 졸업한 카뮈는 연극과 집필에 열중한다. 이후 신문 기자, 가정 교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카뮈는 독일 나치에 저항하는 지하 조직에 합류한다. 그러면서도 집필 활동을 멈추지 않아 『이방인』, 『시지프 신화』, 『페스트』를 비롯해 소설과 에세이를 다수 출간한다. 이를 기반으로 1957년에는 사상 두 번째 최연소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작가로서의 명성을 이어가던 그는 1960년 교통사고로 숨을 거둔다.          



※ 추천 도서

알베르 카뮈, 『페스트』, 김화영 옮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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