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다.
당신은 나에게 쓰나미를 줬어. 2
나는 DS타운 집이 참 좋았다. 그런데 거기서 사는 동안은 좋은 일보다 불행한 일이 더 많았다. 나는 경험했다.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가족이 화목하지 않으면 밟고 있는 그 집의 의미는 사라진다는 것을...
남편은 그동안 퇴근하고 허튼짓(?)을 하느라고 그렇게 늦게 들어오고 쉬는 날도 그렇게 나간 것이다. 한마디로 항상 마음이 콩 밭에 가 있었던 거다. 카드도 돌려 막고 대출도 쉽게 쉽게 받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리 살았는지 너무 기가 막혔다.
나는 내가 느끼는 것이 무슨 감정인지 모르니, 화가 나긴 나는데 남편한테 뭐라고 화내야 되는지 몰라서 말이 안 나왔다.
'내가 알던 사람이 이 사람이 맞나'
내 앞의 남편이 다시 보였다.
나의 눈치를 보는 남편에게 빚진 돈이 얼마인지 물었다... 천만 원? 이천만 원? 말할 때마다 돈이 조금씩 계속 올라갔다. 이제 남편에 대한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랜 시간 나를 속여 왔으니 이번에도 정확하게 진실을 말할 리 없다. 나는 이렇게 다그치는 방법보다는 조금 시간을 두고 남편을 주시하고 관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올케언니가 한 말이 생각났다. 남편이 맨날 술 먹고 늦게 들어온다고 언니에게 한탄했더니, 언니가 "바람난 거 같은데 잘 살펴봐라." 했었다. 나는 남편을 굳게 믿고 있었으므로 그 말을 흘려들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것이다. 그렇게 순진한 얼굴을 하고, 세상 순수한 모습 뒤에 나를 속이고 그런 일을 하고 다닌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남편의 그런 점을 감지하지 못한 나의 우둔함을 탓했다. 남편을 처음부터 알아보지도 않고 금방 믿은 나를 탓했다. 그리고 어떻게 이 일을 수습해야 할까. 마음을 총력을 기울여 생각하고 생각했다.
나는 원망보다는 이 일을 잘 헤쳐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일어난 일이고 쏟아진 물이다. 서로 원망만 해봤자 시간 낭비다. 빨리 잃은 돈을 파악하고 수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인생은 예상을 참 빗나간다.
그 일이 있은 바로 다음 날 남편은 평소처럼 출근을 했다. 잠시 후 열 시쯤 남편 직장에서 전화가 왔다.
"OO 씨 오늘 출근 안 했는데 무슨 일 있나요?"
'출근을 안 했다고?'
아침에 평소처럼 나갔는데 '출근을 안 했다고?'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떻게 된 일이지?'
불안감이 엄습했다.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하고 일이 손에 안 잡혔다. 나는 남편이 오기만 하염없이 기다렸다. 남편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제 시각에 출근하는 사람이다. 그런 남편이 출근하지 않았다니 뭔가 불길했다.
나는 이 일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안절부절 저녁에 남편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밤이 되어서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에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속이 타들어갔다. 처음에는 분노했다가,
'일을 저질러 놓고 무책임하게 나갔다고?'
그다음에는 걱정했다가,
'나쁜 생각을 한 거면 어쩌지?'
하루에도 열두 번 마음이 뒤집혔다.
남편이 나가고 일주일이 지났다. 첫째는 네 살 그리고 둘째가 다음 달이면 엄마 뱃속에서 나온다. 아기를 생각해서 뭐를 먹어야 되는데 나는 남편이 나간 그날부터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다.
나는 어마어마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이것은 누구한테 말할 사안도 아니고 그저 나 혼자 안고 가야 하는 일이었다. 시댁과 오빠에게 알렸지만 걱정 외에 무언가를 해줄 게 없다. 경찰에 실종 신고도 안된다. 자기 발로 걸어 나갔으니 당사자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일 뿐, 그냥 성인 어른의 '가출'인 것이다.
하루하루 속이 타들어 갔다. 오늘은 남편이 들어오겠지. 또 하룻밤 자고 나면 오겠지. 오겠지. 오겠지 들어오겠지.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은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남편이 나 간 후 엄청 난 죄책감에 시달렸다.
'내가 너무 다그쳤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심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놀래면 말문이 막힌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나간 것이다.
큰집에 혼자 아이와 남겨졌을 때 나는 엄청난 외로움을 느꼈다. 잠시 근처 사는 둘째 형님이, 혼자 있을 내가 걱정되니까 밥 먹으러 오라고 해서 밥은 먹고 오는데, 집에 오면 아이와 나, 뱃속의 아이까지 외로운 사막에 버려진 기분이었다.
큰집은 나의 외로움을 더해주었다. 이 방도 휑하고 저 방도 휑하고 거실은 아이와 나뿐이었다. 나는 당시 첫째를 전혀 돌볼 수 없었다. 유치원에 다녀오면 거실에서 코끼리가 나오는 영어 비디오, 곰돌이 푸, TV 만화를 연속으로 틀어놓고 방치했다. 나는 소파에 누워서 TV 보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전혀 큰 아이에게 티를 내지 않았다. 이런 충격은 나만 받으면 된다. 아빠는 항상 예전에도 집에 없었고 거의 한두 달에 한 번 보았기 때문에 아이는 아빠의 부재를 느끼지 못했다. 다행이었다.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 전화는 수신이 안된다. 나는 아홉 살 때 엄마가 집을 나갔다. 그 후로 사랑하는 엄마와 딱 하루를 제외하고 영원히 보지 못했다. 작은오빠는 삼 년이 넘도록 소식이 끊겼었다. 너무너무 마음이 아팠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편이다. 나는 절망했다. 언제 집에 들어올지 모른다. 자기 집에 8년 동안이나 가지 않던 사람이다. 영원히 영원히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나는 네 살 아이와 뱃속의 아이와 살아야 한다. 당장 다음 달이 출산인데 아빠 없이 홀로 출산해야 한다. 무섭다. 무서웠다.
어려서도 불행한 가족 안에서 슬프게 아버지랑 둘이 살았다. 가족과 헤어짐의 고통을 내 아이에게 똑같이 물려주어야 된다니 나의 절망은 모성애와 겹쳐져서 걷잡을 수 없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나는 무서웠다. 아빠 없는 아이들을 키울 자신이 없었다. 뱃속의 아이는 어찌 키워야 된다는 말인가. 나는 고통받고 살 수 있지만 아이들에게 내가 겪은 일을 똑같이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그 길을 내가 주체가 돼서 살아나갈 자신이 없었다. 어디 기댈 때도 없는 내가 남편 없이 두 아이를 키우게 될지도 모른다. 너무 무서웠다.
나는 그 고통을 아이에게 물려주느니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뱃속의 아이와 네 살 아이를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은 아이와 내가 종종 올라가 놀던 곳이다. 빌라 사람들이 무심히 버린 쓰레기가 한쪽에 잔뜩 쌓여 있었다. 나는 그곳을 지나 옥상 끝에 다다랐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