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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력 Aug 22. 2024

2002 월드컵, 나는 지옥이었다.

당신은 나에게 쓰나미를 줬어. 3

2002년이었다. 6월이었다. 그때 우리나라는 월드컵 열기로 어마어마한 축제와 열광의 도가니였다. 너무나 드라마틱한 우리나라 4강의 신화가 만들어지는 순간의 시기였다. 골이 한골씩 터질 때마다 온 동네가 울려도 나는 티브이를 틀어놓고 무심히 소파에 누워있었다. 그런 즐거움을 즐길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시기에 그곳에서 절망과 죽음을 생각했고 세상의 끝을 생각했다. 남편과 있었으면 보았을 축구.  가족들 친구들이랑 신나서 넓은 집에서 목이 터져라 응원하고  축구나 보았을 그 시기에, 나는 죽음을 생각한 것이다.


나는 빌라 옥상에 올라갔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4층 높이지만 거리가 아찔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뱃속의 아이가 생각났다. 앞으로 엄마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모르고 이제 나올 준비가 돼서 자궁 속에 크게 자리 잡고 단단하게 부풀어 있는 배. 나는 차마 나의 배를 바라보지도 쓰다듬지도 못했다.


'아. 나는 아기가 있다. 내가 죽으면 아기도 죽는다. '


옥상 벽을 잡고 주저앉았다. 나는 흐느끼며 울었다. 꺼이꺼이 울었다.  잠시라도 나쁜 생각을 한 게 아기한테 너무너무 미안했다. 아기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뱃속에 있는 9개월 동안 입덧도 하나도 안 하고 신나서 맛있는 것 사 먹고 과일도 실컷 먹고살만했었다. 임신 한 아홉 달 동안 하나도 힘들게 하지 않은 아기다. 그랬는데 남편이 나간 이후로 음식도 제대로 못 먹었다. 입에 무엇을 넣을 수가 없었다. 아기한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옥상 바닥에 널브러져 하염없이 울었다.


나는 죽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다시 살아가기로 한 것이 아니라 내 새끼들을 죽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살아갈 힘이 생긴 것도 아니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나는 이래서는 안 되겠기에 만삭의 몸으로 네 살 아기를 데리고 어머니가 계시는 목포로 내려갔다. 우리 친정은 아빠가 알면 하나도 도움이 안 될 것을 알기 때문에 시댁으로 간 것이다.


도저히 혼자서 이 큰 빌라에서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남편을 기다릴 자신이 없었다.  어머니와 형님은 이미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나는 힘겹게 목포 집 마당을 들어섰다.


"어머니 저 왔어요."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잉 너 왔냐."


어머니의 표정도 평소와 다르게 어둡다.

 

애써 눈물을 삼키고 어머니의 안부를 묻고 안방에 들어간다. 어린아이처럼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한다. 어머니와 형님은 아무 말 없이 밥을 주시고 그렇게 묵묵히 들어주셨다. 형님은 다른 곳에 안 가고 이곳으로 잘 왔다고 연신 칭찬해 주고 다독여 주셨다.


며칠을 지냈다.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외할머니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남편이 없어도 이곳에서 있으니 며칠이라도 살아졌다.


큰 형님은 나를 다독이며 한마디 하신다.


"그라도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니까. 즈그 자식 있응께 꼭 돌아올 것이여."


그 말을 믿고 싶었다. 작은 지푸라기라도 희망의 말이라면 품고 있고 싶었다.


며칠이라도 시골에서 아이와 지내며 나의 현실을 잠시 잊었다. 남편이 나고 자란 이곳에 있으며 남편이 그렇게 까지 나쁜 사람이 아니길, 내 맘을 다독여야 했다.


나는 혹시 남편이 집으로 돌아올지도 모르고 아기도 낳아야 되니 다시 DS타운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살면서 그때가 가장 지옥이었다. 폭력적인 아버지와 살 때도 지옥이었지만 그때가 더 큰 지옥이었다. 왜냐면 이 고통을 아이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과 살아나가야 한다. 정신을 차렸다. 냉동실의 생선을 꺼냈다. 나는 밥을 차리고 생선을 구워 먹었다. 그리고 통장의 돈을 한 곳으로 모았다. 아기 낳는 비용을 제하고 3개월 정도는 버틸 수 있는 돈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아기와 내가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남편이 돌아오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가장 큰 고난의 시기에 나는 하나님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당시 아기를 키우느라 신앙의 정체기였다. 하나님을 잊고 있었다. 교회는 왔다 갔다 하는데 좋은 집에서 하나님을 잊고 있었다.


아. 나에게 하나님이 있었지. 그때부터 금요예배도 가고 첫째는 아는 어린이집 원장님께 맡기고 기도원에 가서 간절히 기도했다.


(남편 집 나간 이야기를 하면 신앙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믿음이 없으신 분들은 양해 바란다. 절대 전도 목적이 아니고 내 삶의 한 부분 이야기이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의 잘못이 없는지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아이들을 키울 자신이 없는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려 달라고 울부짖었다. 막막했다. 네 살 첫째와 태어날 아기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기도했다.


나는 남편이 나간 후 항상 제정신이 아니었다. 가슴이 두근두근 안정되지 않았었다. 무슨 정신으로 하루하루가 지나갔는지 모른다.


그날도 하나님께 기도했다. 나는 그 방법밖에 모른다.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간절히 땀을 뻘뻘 흘리며 기도했다. 그 순간 마음속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나는 하나님이 들려준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네 옆에 남편이 있든지 없든지 너는 살 수 있다.

내가 있다. 내 손을 잡고 한걸음 한걸음 걸어와라.'


나는 그 당시 한 걸음도 걸을 수 없을 만큼 절망의 상태였다. 하나님 손을 붙잡고 한걸음 한걸음 걷는다고? 아기가 걸음마하듯이 손을 붙잡고 걷는다면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또 마음속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은혜로 승리하였다.'


은혜로 승리했다고? 지금 나의 절망의 상황에 '승리'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 이미 승리했다는 과거형의 단어도 어울리지 않는다.


이해되지 않는 마음의 소리를 들은 그 순간, 파도처럼 소용돌이치던 마음이 일순간에 잔잔해졌.


그 후로 나는 집에 돌아와 네 살 큰애와 일상을 살며 하루하루를 살아나갔다.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고요했다.


며칠 후 한 통의 전화가 울렸다. 나는 직감적으로 남편의 전화라고 생각했다.


"여보세요? 당신이야?"

"............."






그때만 생각하면 어김없이 눈물이 난다. 나의 눈물버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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