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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력 Aug 24. 2024

다시 자장면집을 차리다.

마지막 기회

가 노력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남편을  고칠 수 있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갖다 주던 월급도 이제 아예 몇 달째 가져오지도 않고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남편의 존재는 무의미해졌다.


아이들을 위해서 버티고 버텼건만 반복된 배신으로 지쳐갔다. 나는 남편을 놓기로 했다.


나는 두 아이와 어떻게든 살아보려  어린이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갖고 있는 자격증으로 어린이집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권리금이 많이 비쌌다. 또 선뜻 용기도 나지 않았다. 다행(?)인지 계약만 하려 하면 무슨 일이 생겼다.


그렇게 거의 계약 직전에 나는 벼룩시장 광고를 보게 된다.


중국집 운영하실 분. 보증금 1000 월세 50  권리금 500. 아파트 밀집 지역.


나는 그냥 구경만 한번 가보자 하고 남편 없이 가보았다. 아파트 상가 2층에 있는 중국집이었다. 번듯해 보였고 바로 장사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전화로 남편에게 물어보니 의외로 하겠다고 한다. 나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남편을  믿어보기로 하였다. 우리의 가진 돈을 탈탈 털어 가게를 인수했다. 


나는 어린이집 대신에 남편과 가게를 운영하기로 한 것이다. 무모한 방법이었지만 지금의 막막한 상황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남편에게 거는 내 마지막 기회였다. 여기서도 남편이 예전과 같이 살면 나는 끝이다. 우리의 모든 것을 투자하여 어린이집이 아닌 중국집을 차린 것이다.


우리는 서울에서 한 번 실패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최선을 다해 자장면집을 운영했다.


남편은 음식을 참 잘 만들었다. 손도 빠르고 손도 컸다(양이 많음). 특히 쟁반 짜장을 맛있게 만들어서 손님들이 칭찬을 많이 했다. 나는 아파트 장날에 부끄럼을 무릅쓰고 자장면 할인 쿠폰도 돌리고 홍보도 했다. 할인쿠폰의 효과는 아주 좋았다.


나는 자장면 집을 운영하며 남편의 다른 모습을 많이 보았다. 처음 만날 때 순했던 그 사람이 아니라 일할 때는 화도 많이 내고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이상한 허튼짓(?)으로 풀었었나 보다. 그리고 남편은 조금의 어려운 상황이 오면 멘털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나는 위기 대처 능력이 있는 사람이니 어려운 일은 내가 다 처리했다. 한 가지 희망적인 것은 일하는 것만큼은 성실했다.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근하고 일했다. 배달 직원이 없을 때는 남편이 음식을 만들고 배달도 다녔다. 나도 셋째 출산 전날까지 배달을 도왔다.


나는 초등학교 유치원 다니는 두 애들을 돌보며 운영해야 해서 가게에 TV를 갖다 놓고 작은 매트리스에 애들을 뉘어놓고 일을 했다. TV로 짱구 만화를 틀어주고 겨울에는 전기요에 애들을 이불로 덮어주고 일을 했다. 집이 멀어 아이들을 혼자 둘 수 없었다. 아직 어렸다.


우리는 거의  배달 장사고 홀 손님이 없어서 가능했지만 아이들 건강에 안 좋을 거 같아 가게 앞으로 금방 이사를 왔다. 집이 가까우니 아이들 돌보기도 수월했다.  집과 가게를 수시로 왔다 갔다 하고 아이들을 돌봤다.


처음에는 가게 장사가 잘됐다. 그런데 갈수록 손님이 내리막길이었다.  우리의 운영이  미숙한 점이 많았다.  그 후로 남편은 한 번 더 나 모르게 오락으로 돈을 날려 먹었다. 진짜 정신 못 차리는 남편이었다.


장사가 안되니 얼른 가게를 좋은 값에 넘기자는 나의 제안에 남편은 결정을 잘 못 내렸다. 나는 남편이 결심이 설 때까지 다그치지 않았다. 우리는 8년 동안 장사하면서 가게보증금까지 다 까먹고 결국에는 쫄딱 망했다. 가게 원상 복구하고 나니 보증금이 십원도 안 남았다. 그동안 아이들과 생활해야 했으니, 남편이 날린 돈과 함께 빚만 1억 가까이 남았다. 그야말로 완전히 망한 것이다.


나는 우리가 돈이 다 없어져도 그렇게 절망은 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도 가정이 해체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참 희한하다. 가게는 망했고 우리 경제 사정은 엉망이었지만 나는 얻은 게 많다.


우리는 제대로 된 연애도 해보지 않고 본능에 이끌려 살았기 때문에 서로를 너무 몰랐다. 가게에 하루 종일 붙어있으며 서로를 알아가고 장사가 안 돼도 사이좋게 지냈다. 한 번도 돈 못 번다고 잔소리를 한 적이 없다. 고생하는 남편을 보니 안쓰러울 뿐이었다. 그리고 남편 마음을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언제 또 그런 행동(?)을 할지 모르니 내가 많이 참았다.


우리는 전우애(?)가 많이 생겼다. 내가 가게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하니 남편이 나에게 의지를 많이 했다.


남편은 처음 시작이 어려운 사람인데 8년 동안 장사하면서 이곳 지리를 잘 익혀놔서 나중에 배달업종으로 바꾸며 자리를 잘 잡았다. 동네 구석구석을 자장면을 배달하며 잘 익혀 놓은 게 도움이 됐다.


지금은 남편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가서 벌어오는 돈으로 살고 있다. 큰애 대학도 잘 보냈다. 둘째도 키웠고, 셋째 넷째도 잘 키우고 있다. 중간중간 남편은 또 속을 썩였지만 지금은 술도 끊고 담배도 끊었다.


남편나이 거의 오십 중반 넘어서 정신을 차린 것이다.


이제는 제발 일 좀 하지 말고 쉬라고 해도 매일 하루도 쉬지 않고 나간다. 이제는 나만 바라본다. 과할 정도로 가정을 좋아하고 희생한다. 첫째 둘째 키울 때는 관심도 없더니 셋째 넷째는 너무 과보호한다. 중간이 없다. 만원 한 장이 생겨도 나한테 갖다 준다. 남편은 그동안 못해 준 것에 대해 미안함을 갖고 있다. 여기에 글로 다 쓰지 못할 별의별 사건 사고를 치던 남편이 정신을 차렸다. 얼굴만 잘 생기고 허당인 남편 만나 망했었는데 지금은 살만하다.


참 오래 기다렸다.


참 오래 기다렸다.


용서하고 기다리고 용서하고 기다리고...


남편은 옛날 얘기하는 것을 싫어한다. 자기 잘못을 아는 거다. 그러나 나는 잊을만하면 꺼내서 뭐라고 그런다. 이제는 나도 괜찮아져서 안 꺼내도 되는데 한 번씩 원망의 소리를 해댄다. 그럴만하지 않은가.


남편이 해이해질 때쯤 꺼내는 히든카드다. 영원히  예전 잘못으로 혼나는 남편이 불쌍하지만 내가 고생한 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동안 말끔히 용서를 못 했었는데 남편 닮은 넷째를 낳고 말끔히 용서했다. 도저히 내게서 나올 수 없는 잘생긴 아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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