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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력 Aug 25. 2024

넷째까지 낳다.

나에게 온 소중한 생명

나는 내가 아이를 네 명이나 낳을 줄 몰랐다. 첫째 아이 낳고 너무 고생하고 힘들어서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유모차랑 아기용품들도 지인들 주고 그랬다. 그런데 금방 잊어버리고 아기가 생겼다. 좀 단순무식(?)한 성격이라 금방 잊어버린다.


나는 티브이에서 아기 낳고 엄마들이 아기를 안고 기쁨에 차서 흐뭇하게 바라보는 장면처럼, 나도 아기를 낳으면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너무 고생하고 아프니까 티브이 속 장면은 로망이고 현실은 아기를 쳐다볼 힘도 없었다.  내가 아픈 게 먼저고 아기를 살펴볼 힘이 없었다. 그게 두고두고 첫째한테 미안했다.  나는 모성애가 없나. 그런 생각도 했다.


남편이 속은 썩였어도 사랑하는 마음은 있었던지 아기가 쑥쑥 잘도 생겼다. 나는 어릴 때 너무 외롭게 자라서 그런지 아이들이 많은 게 좋았다. 그리고 아기들을 참 이뻐하는 사람이었다.(지금은 육아에 지쳐서 아기 이뻐하는 게 많이 감소하였다.)


 어찌어찌 셋째까지 낳았는데 넷째까지 생길 줄 몰랐다. 그 당시 내 나이도 많고 우리 집 형편도 최악이었다. 그럼에도  손톱만 한 아기의 심장소리를 들으니 낳기로 결심하였다. 나에게  소중한 생명을 어찌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 넷째는 몸이 유달리 무거워 소파에서 꼼짝을 못 했다. 그래서 병원 가는 것도 귀찮고 힘들어서 자주 안 갔다. 한 네 번인가 가고 열 달이 돼서 아기를 낳았다. 아기를 낳고 제왕절개를 했음에도 돈이 없으니 다인실 병실을 선택했다. 이미 세 번의 출산 경험으로 출산 후 루틴을 아니까 일인실, 다인실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아기를 낳을 때마다 엄마가 제일 보고 싶었다. 아기 낳고 부모형제가 상주하고 돌보는 산모들을 보며 많이 부러워했었다.  아기 낳고 남몰래 많이 울었었다. 나는 늘 혼자였다.


네 번째 아기를 낳고는 내 모습은 달랐다.  병실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너무도 씩씩하게 잘 해내는 내 모습에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네 번이나 아기를 낳으니까 나... 씩씩하게 잘하네.'


남편은 자장면집도 운영해야 하고 집에 있는 아이들 셋도 건사해야 하니 병원에는 거의 못 왔다. 그래도 하나도 서운한 건 없었다. 나는 그렇게 살아야 되는 운명이니까... 나에게 있는 씩씩함을 억지로 꺼내서 내 몸에 덕지덕지 붙이니 진짜로 견딜 힘이 생겼다.  나의 넷째 아기는 폐가 안 좋아 신생아 중환자실에 열흘정도 있다가 우리 집으로 왔다.


우리 아들은 8월에 엄마 뱃속에서 나왔고, 우리가 운영하는 자장면 집은 9월에 폐업을 했다. 조그맣게 자장면 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적자 나는 가게를 8년인가 운영하다 월세도 못 내니 보증금이 십 원도 안 남아서 주인이 나가라고 해서 폐업을 하게 된 것이다.


서울에서 한번 망했었고 이번에는 8년 동안 운영하다가 망했다.  운영 능력이 없는데 다른 걸 할 용기가 없다 보니 그렇게 됐다. 주인이 나가라고 하지 않았으면 계속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우리는 폐업과 동시에 둘 다 파산신청도 하였다. 8년 동안 쌓인 빚이 많았다. 어쭙잖게 투자하려던 깡똥집 들도 팔아서 빚의 일부도 갚았지만 거의 1억 가까운 빚을 네 자녀를 키우며 갚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둘 다 파산을 하고, 넷째를 낳은 그 해 우리의 재산은 살고 있는 집 월세 보증금 천만 원이 남았다.


남편은 오십, 나는 마흔넷, 네 명의 아이들과 천만 원의 보증금이 남은 것이다.


이제까지 내 인생은 내가 어찌어찌 노력하고 돌파구를 찾고 살았는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기저귀 찬아기, 네 살 셋째, 초등학생, 중학생, 아이들넷을 키워야 되는 상황인 것이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어찌 알고 앞집 아줌마는 나랑 친하지도 않았는데 (집에서  옷을 수선하시는 분이었다). 아기 옷을 한 보따리씩 몇 번이나 갖다주셨다. 지방 사는 내 친구는 박스로 몇 번이나 옷을 보내주었다. 교회 집사님은 몇 번이나 옷을 한 보따리씩 주시고 반찬이며 자주 갖다주셨다. 동네 아줌마는 아이 장난감과 책을 차고 넘치게 갖다주었다. 우리 넷째 취학 전까지 정말 옷과 장난감을 한 번도 사본적이 없다. 사실 살 형편도 아니었다. 태어나서 필요한 아기용품들도 그때그때 지인들의 선물도 많이 받아서 잘 지나갔다.


먹고사는 게 힘들어 넷째를 유모차에 태우고 동사무소를 방문해 처음으로 도움을 요청하였다.


멀쩡하고 젊고 건강해 보이는 여자가 복지 지원을 하러 가는 게 참 많이 부끄러웠다. 민원 대기 의자에 앉아서 많이 많이  망설이다  사회복지과 직원에게 상담을 하였다. 많은 서류를 내야 하고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이 방법 외에는 네 명의 아이들과 살 방법이 없었다.


나는 더 용기를 내서 혹시 푸드뱅크(무료 식료품 지원)도 어떻게 받아야 되나 알아보았다.


폼에 살고 폼에 죽는 내가. 까칠한 도시 여자 마인드인 내가 아이가 넷이 되고, 먹고사는 문제에 부딪치니 부끄럽지만 해내었다.


그 후로 우리는 차상위 계층으로 나라의 지원을 받았고, 푸드뱅크도 한 달에 한 번 이용하였다. 한 달에 한번 푸드뱅크에 가면 세 가지 물건을 무료로 가지고 올 수 있다. 나는 샴푸, 라면, 참기름등 떨어진 물건들을 골라왔다. 그 외에 간식 같은 것을 장바구니 한가득씩 주기도 한다. 고기, 빵등 기부받은 식료품들이라 그때그때 다르다. 두 손 가득 받아오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아이들이 간식이 풍부해서 잘 먹는다. 받아 온 고기등으로 없는 솜씨라도 볶아주고 그렇게 며칠 잘 먹일 수 있었다. 그런 날은 아주 기분이 좋은 날이다.  


참 감사한 게 아이들이 공부는 그럭저럭 잘했다. 공부를 중간이상하는 어려운 가정은 장학금 기회가 많다. 고등학교까지 교육비 지원도 받고, 중간중간 큰애들이 공부를 잘해서 장학금도 받아서 잘 충당하였다.  


고마운 사람들이 많아서 넷째를 건강하게 잘 키웠다. 낳기는 내가 나았지만 주변 도움으로 키웠다.


무모하고 무식한 내가 그냥 살았는데 감사하게도 살아졌다.


전쟁 같고 폭풍 같던 삶을 어떡해서든 방법을 찾아 살아냈다. 복지지원과 주변의 도움으로 해결하고 살았다.


참 감사하다.


경제적인 면은 그렇게 해결했지만 아이들을 양육하는 문제는 늘 어려웠다. 육아서도 보고 학부모 교육도 듣고, 주변에 물어봐도 어려웠다.  가정의 화목을 이끌어 내는 것이 참 힘들었다.


다음 편은 나의 자녀양육에 대한 발버둥(?) 친 세월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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