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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력 Aug 23. 2024

만삭에 집 나간 남편이 돌아왔다.

당신은 나에게 쓰나미를 줬어. 4

남편이 아무 소식이 없이 집을 나간 지 거의 이십일 넘어 한 달이 되어간다. 나는 그 시간 시간이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아버지와의 20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고 절망이었다.


나는 그동안 죽음처럼 몸서리치고 힘들어서 시댁도 갔다 오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도 하고, 마음이 평화로워지려고 노력했다. 많이 내려놓았다.


거실에서 아이는 놀고 있었다. 안방의 전화기가 울렸다. 나는 직감적으로 남편의 전화라고 생각했다.


"여보세요. 당신이야? 당신이지."

"......"  

수화기 너머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남편이 맞았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들어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전화는 끊겼다.

다행이다. 살아있어서....


다음날 오후쯤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다. 수염은 덥수룩하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무엇을 하고 어디를 갔었냐고 물으니 말을 안 한다.  

 

남편은 집을 나가서  이십일이 넘도록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하나도 알려주지 않았다. 말하지 못하는 그 마음을 내버려 두기로 했다. 지금까지도 말을 하지 않는 남편이다.


남편이 돌아오고 며칠 후 나는 둘째를 출산했다. 양심은 있어서 아기 출산하기 전에 들어온 남편이다. 남편을 질책할 세도 없이 새벽에 진통이 와서 다행히 정말 다행히 남편이랑 병원에 갈 수 있었다.


정말 우여곡절 끝에 나온 우리 둘째, 나의 아기다.


엄마 뱃속에서 그리도 마음고생을 한 아기인데 쑥쑥 건강하게 살도 뽀야니 이쁜 아기가 나왔다. 누구나 쳐다볼 정도로 방긋방긋 웃음이 많은 아기가 나왔다.


나는 태교는커녕 불안함만 안겨준 아이에게 평생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이 아이를 키우며 아이가 조금만 부정적 마음을 가지거나 아프기라도 하면  '혹시 뱃속에서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런가?' 평생을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다.


지금 글을 쓰며 아기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엄마는 너를 가지고 나쁜 생각을 한 적이  있어서 평생 죄책감을 가졌었는데, 생각해 보니  네가 엄마를 살렸다. 고난을 겪고 나온 위대한 아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너는 엄마라는 한 사람을 살린 끈질긴 생명력의 아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네가 있어서 나도 있었다.


이 글을 쓰고 평생을 괴롭혔던 죄책감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 후로 나는 그래도 남편을 믿었다. 좋아지겠지. 안 하겠지.  한편 남편이 집에 늦게 들어오면 너무 불안했다.  그런데 사람은 한 번에 좋아지지 않는다.


며칠 잠잠하다가 남편은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이 많았다.  나는 믿었지만 남편은 아니었다. 조금 나아지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술 먹고 늦게 들어오고 각종 핑계로 늦게 들어왔다. 그전엔 나를 속이면서 그랬는데 이젠 버젓이 그러고 다닌 것이다. 마음속에 절망만이 가득했다. 또 나갈까 봐  마음대로 잔소리도 못했다.


'도박은 못 고친다는데...'


나는 결심을 했다. 이곳 서울에서 벗어나 남편이  매일 가는 그곳과 멀어지기로...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고 그 나쁜 곳(?)에서 멀어지면 남편도 정신을 차릴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재테크를 핑계로 남편과 잘 이야기하여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경기도 OO로 이사 오기로 한 것이다. 마침 빌라도 좀 싫증이 나고 아파트에도 살아보고 싶어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게 갑작스럽게 이사를 결정한 것이다. 마음이 급하니 그렇게 좋아하던 DS타운도 거의 헐값에 팔고 이사를 간 것이다.


그때는 그것이 최선의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올케언니도 오빠도 말렸지만 그렇게 고집을 부리고 밀어붙였다.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도 OO라는 곳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는데  나는 그렇게 아무 연고도 없는 경기도 OO로 이사 온 것이다. 남편이 처음 집을 나간 날로부터  4년여의 시간이 흐른 2006년이었다.




우리가 이사 온 아파트는 아름다웠다.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훌륭한 아파트였다. 뒤에는 산이 병풍처럼 둘려있고 여름에는 폭포가 흐르는 아파트였다.

 

거의 5천 세대에 조경도 훌륭하고 놀이터도 멋있었다. 게다가 초중고 도서관이 근거리에 있고 아파트 세대수가 많으니 아파트 상가 규모가 컸다.


이렇게 좋은 아파트에 오래 살고 싶었다.


그런데 여기서도 남편은 출퇴근이 멀다는 이유로 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은 한 달 두 달 계속되었다.  서울에서는 월급이라도 갖다 줬는데 여기서는 월급을 아예 갖다 주지 않았다.


아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아이들과 어떻게 살았는가 싶다.  간간이 아이들 데리고 어린이집 근무도 했다. 


나는 남편에게 회유와 온갖 방법을 써 보았지만 그때뿐이었다. 앞에서는 '다시 잘할게' 하지만 돌아오는 행동은 반복된 배신이었다.  이것은 고칠 수가 없는 거구나 생각했다.


안갯속을 걸어가면 이런 기분일까. 마치 안갯속을 걸어가는 것처럼 앞이 보이지 않았다. 망망대해에 나 혼자 외롭게 버려진 것 같았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안개 낀 도로를 엉금엉금 더듬으며  집으로 돌아갈 때, 지금 처한 내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뿌연 안개가 뒤덮여 보이지 않는 내 인생, 우리 가정.


나는 그때 하루하루를 사는 게 고통스러웠다. 하루를 보내기 위해 시간 단위로 하루를 살았다. 한 시간만 잘 보내보자 두 시까지만 살아보자. 여섯 시까지만.. 그렇게 시간 단위로 나의 삶을 살았다..


안개 낀 하루를 사는 나에게 그 하루는 너무 길었다.


나는 처음으로 이혼을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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