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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력 Aug 20. 2024

애증의 DS타운

당신은 나에게 쓰나미를 줬어.1


서울에 DS타운 빌라에 살 때 이야기이다. DS타운 *동 *03호.. 아직도 잊지 않는 서울의 우리 집 주소이다. 아직도 잊지 않은 건 생각할 때마다 후회가 많이 돼서이다.


오빠 집 지하에서 살다가 거주환경이 너무 안 좋아 이사 갔지만 그렇게 좋은 집으로 이사 나오지 못했다. 방 두 개 반지하에서 잠시 살았다. 이곳도 아기와 살기  좋지 않은 환경이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은 물이 집으로 들어찰까 걱정이 많이 되는 반지하집이었다. 그 해 여름은 태풍이 와서 많은 집들이 물에 잠겼다.


우리는 고민 끝에 시댁에서 미리 사주신 DS타운에 들어가 살기로 결정했다.  DS타운은 세입자가 살고 있어서 우리가 세입자 전세금을 빼줘야 들어갈 수 있었다.  돈이 조금 모자라 대출을 받아서 이사 들어가기로 했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4층짜리 빌라의 4층, 한 층에 네가구가 사는데 오른쪽으로 세 번째 집이었다. 외관도 고급지고 지하 주차장도 있는 고급 빌라이다. 엘리베이터 없는 게 흠이지만 튼튼하고 널찍했다. 29평이지만 거실이 넓게 빠지고 현관에는 중문도 있었다. 주방 싱크대도 원목이었고 거실 마루도 일제 원목으로 돼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그런 집에 살아보게 되니 이사 오기 전 어찌나 설레는지 매일 DS타운 건물 앞에서 우리가 이사 갈 집 창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오기도 했다.


드디어 이삿날. 네 살이었던 첫째는 넓은 거실을 양말이 까매지도록 뛰어다녔다. 좁은 집에서 살다가 넓은 곳에 와서 뛰노는 아이를 보니 참 좋았다. 나는 둘째를 임신 중이어서 아기를 키우기 좋은 환경에서 키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주방은 식탁을 놔야 될 정도로 넓으니 천호시장 가구점에서 원목으로 된 4인용 식탁도 사 왔다. (이 식탁은 우리가 6번의 이사를 다니는 동안 같이 다녔다.) 원래 쓰던 장롱은 겨우 두 칸 짜리니 아기방에 넣고, 안방에 널찍한 새 장롱도 들여놓았다. 소파는 시골 큰 아주버님이 보태 주셔서 3인용으로 샀다.


이런 집에 살아 본 적이 없다. 너무 좋았다. 임신 한 몸으로 수박을 4층까지 들고 가고, 유모차와 아이를 몇 번이고 들고 날라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좋기만 했다. 이 집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나는 아직도 DS타운에 사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4층 우리 집을  오르락내리락하기도 하고, 현관문을 열고 우리 집인 양 들어간다.  거실에서 생활하는 내 모습이다. 작은방에서 밖을 내다보기도 한다. 그 풍경 그대로이다. 그러고는  건물에서 빠져나오면 건물이 폭삭 주저앉는다. 건물이 흙에 파묻힌다. 너무너무 아깝고 소중한 건물이 무너지니 안타깝고 슬프다.


그것은 꿈인데도 뭐라 말할 수 없이 원통하고 속상하다.


나는 이 좋은 DS타운을 잘못된 판단으로 팔게 된다. 이 후회는 참 오래갔다. 생전 살아보지 못했던 좋은 집에서 살게 되니 좋은 일만 생길 줄 알았다. 그런데 여기 살면서 나는 내 일생의 가장 큰 절망을 맛보았다.  아버지 집에서 지낼 때와 비교하지 못하는 엄청난 인생의 쓰나미를 경험했다.


이제 뱃속의 아기는 나올 준비가 됐는데 처음 엄마가 되어서 육아가 참 많이 버거웠다. 남편이 도와주길 바랐는데 평일에도 늦게 들어오고, 새벽에 들어오는 날이 다반사였다. 남편은 쉬는 날에도 자꾸 밖으로 나갔다. 일주일 동안 아기 보느라 힘들어서 쉬는 날이라도 같이 있으면 좋겠는데 '미안해'그러면서 나갔다.


쉬는 날 나가는 남편 뒤통수에 대고 '악'하고 소리를 질러도 그 소리를 듣고 외면하고 '금방 올게' 이러면서 나갔다.


애들에게 크게 관심도 없고 저렇게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는 남편에게 분노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육아 우울증이 생겼던 것 같다. 나는 큰애에게 화를 많이 냈다. 겨우 네 살이던 첫째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많이 냈다. 아이에게 모질게 혼내고서 안방에 누워 생각했다.


'이렇게 엄마 자격이 없으면 죽는 게 나아.'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친정엄마도 안 계시고 시댁은 멀다. 나의 양육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편은 항상 집에 없었기 때문에 그냥 애들은 나 혼자 키우는 것 같았다.


그때 눈치챘어야 했다. 그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나는 참으로 눈치가 없는 사람이다.

 

어느 날 천호동 2001 아울렛 앞에서 카드사 판촉행사를 하고 있었다. 카드를 만들면 좋은 가방을 준단다. 나는 카드가 없으니 이참에 만들기로 하였다. 남편 것까지 만들면 선물이 두 배니 남편 것도 만들기로 했다. 남편 주민번호를 두들기더니 카드 발급이 안 된다는 거다.


 '카드 발급이 안된다고? 뭐지?'


나는 퇴근하는 남편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퇴근 한 남편은 카드에 대해 물어보는 내 모습에 갑자기 당황하고 내 눈치를 보고 얼버무린다.  


'뭐지?'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제야 남편은 털어놓는다. 이미 세 개의 카드로 돌려 막기 하다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것이다. 무엇에 그리 돈을 썼을까 알아봤다. 남편은 퇴근 후 성인 오락실에서 돈을 탕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쉬는 날도 그곳으로 향했던 거였다. 그렇게 돌려 막고 온갖 OO 금융에, 300, 500  빌릴 수 있는 데로 다 빌려 쓰다가 더 이상 손댈 수 없는 지경까지 온 것이다.


나 몰래, 나를 속이면서 그렇게 철저히 숨겨왔던 것이다. 나는 너무너무 배신감에 남편에게 화를 냈다. 그동안 육아에 소홀하고 집에 들어오지 않았던 이유가 그것이라니...


돈보다도 나를 철저히  속였다는 것에 너무너무 실망했다. 나의 남편이라는 사람이 거짓말하는 사람이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제야 남편이  그동안 집에 그토록 늦게 들어왔는지 설명되었다. 쉬는 날에도 붙어 있지 않고 나간 것이 그 이유였던 것이다. 주야장천 사행성 성인 오락에 빠져서 월급을 탕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월급은 꼬박꼬박 갖다 줬는데 ○○머니. ○○금융에서 빌려서 메꾸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천호동 아울렛 앞에서 카드를 만들려 하지 않았다면 남편의 이런 행실이 적발(?)되지 않았을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더 이상 돌려 막기 힘든 그 시점에 나에게 적발된 것이다.


앞이 캄캄했다. 머리가 실타래가 엉킨 것처럼 복잡하게 꼬인 느낌이었다. 이런 일은 처음 겪어 보는 일이다.


내 앞의 남편을 바라보았다.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은 지금까지 내가 알던 남편이 아니었다. 말문이 턱 막히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저 머릿속에 이런 질문만 가득하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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