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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력 Sep 07. 2024

아버지

우리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굳이 정의를 내리자면 불쌍한 사람이었다. 나는 엄마를 좋아했다. 그래서 엄마랑 오래오래 살 줄 알았지만 내 나이 아홉 살 때 헤어졌다. 아버지의 폭력으로 집을 나가신 것이다. 그토록 싫어하던 아버지와 내 예상보다  오래 같이 살았다.


싫은 아버지이지만 아버지 돌아가시고 아버지와의 추억이 많기 때문에 생각이 많이 난다. 지금도 꿈속에서는 아버지와 단둘이 생활하는 모습이 나오곤 한다. 가난한 집에서 아빠와 이사를 많이 다니는 꿈을 꾼다. 꿈에서 엄마는 잘 못 봤는데 아버지는 모든 상황에 항상 계신다. 내가 움직이는 그곳에 배경처럼 항상 계신다.


내가 아버지를 싫어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아버지는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비위를 맞출 수 없는 사람이었고,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가족을 모두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사람이었다.


우리 가족 누구도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다. 아버지는 그저 원망과 애증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데도 아버지와 비슷한 어르신을 보면 살아계셨을 때 아버지가 가끔 생각난다.


아버지를 생각하며 안타까웠던 일은 평생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 본 적도 행복했던 적도 없었다. 아버지는 매일 소화가 안 돼서 용각산을 드셨고, 매일 술 한 병을 드셔야 잠을 주무셨다. 평생을 불행해했고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아버지의 인생은 참으로 안타깝고 안타깝다. 할머니가 아버지를 임신했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아버지를 키우지 않고 친척 집에  거의 버리다시피 놔두었고 찾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친척집을 전전하며 온갖 눈칫밥을 먹으며 자랐다.


어려서 불의의 사고로 한쪽 눈을 실명하기까지 하였다. 나뭇가지에 찔려서라고 하는데 아버지의 찔린 상처가 있는 눈을 볼 때면 미운 아버지여도 참 마음이 아팠다.


자식을 낳았지만 본인의 폭력으로 부인은 도망갔고, 학대했던 자식들은 그 누구도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고,  외롭게 그렇게 사시다 돌아가셨다.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누리는 사랑, 돌봄, 가족의 따뜻함을 태어나서도 가장이 되어서도 느껴보지 못했다.


어느 날 찾아온 뇌경색이 급성이 되어 그렇게 식물처럼 되어 돌아가셨다. 자식들이 의무감으로 요양병원으로 옮겨드리는 등 했지만 아버지를 사랑하고 애틋하고 그런 건 없었다.


누구나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후회를 하겠지만 나는 여러 변명거리들로 아버지를 살피지 못했던 것이 후회가 된다. 따뜻한 사랑을 하루라도 느끼시게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버지와의 시간이 많이 남아 있을 줄 알고 뒤로 뒤로 미뤄 뒀었다. 

 

'내가 좀 잘 살게 되면 아버지 좀 챙겨야지'  그랬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잘 살지 못하고 있으니 비겁한 핑계만 계속 댄 셈이다.


그저 나는 그 정도의  그냥 그 정도의 자식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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