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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력 Sep 06. 2024

약국집 딸

약국은 사거리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친절하고 교양 있어 보이는 중년부부가 주인인 듯했다. 약국에는 일곱 여덟 살쯤  보이는 여자아이가 항상 부부옆에 앉아 있었는데 그 아이는 예쁘고 귀티가 흐르는 것이 사랑받고 자란 아이 같았다.


몇 번 말을 붙여보면 말도 잘 통하고 밝은 기운이 사람을 기분 좋게 해 주었다. 나중에 나랑 동갑인 걸 알고 가끔 가서 말을 붙이곤 했다.


그 아인 약국 밖으로 나온 적이 별로 없었는데 어느 날 약국 문 밖에 나와있는 아이를 보고 적잖이 당황했다. 예쁜 얼굴에 곱디고운 그 아이는 다리를 쓰지 못했다. 하얗고 예쁜 다리는 휠체어에 얹혀서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그것이 소아마비라는 것은 나중에서야 알았다. '다리를 못쓰네. 불쌍한 아이였네.'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적잖이 충격이었던 점은 항상 그 아이 부모의 온화한 표정과 그 아이의 구김살 없고 맑은 표정이었다.


어린 마음에 그 아이의 얼굴에서 불쌍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린 마음에 '장애가 있어도 저런 표정이 나올 수가 있구나. 나 같으면 항상 불행하고 불쌍한 표정일 텐데'라고 생각했다.  한편의론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그 약국집은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태도는 우리 집과 사뭇 달랐다. 사랑하고 아껴준다는 것을 어린 나도 느낄 수 있었다.


언제부턴가 그 약국을 한 번씩 지날 때마다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 아이의 밝고 맑음의 비밀을 알고 싶었다. 그 집엔 뭐가 있을까. 뭐가 있어서 신체적 결함이 있어도 저런 표정이 묻어 나올까. 알고 싶었다.


마치 비밀을 파헤치는 형사처럼. 우리 집은 사지육신 멀쩡해도 어둠과 전쟁과 악다구니와 불행과 표정의 일그러짐이 있는데.


나는 어려서 공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내가 약국집 딸이 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나도 저렇게 사랑받고 싶은데... 나도 저렇게 귀하게  여김 받고 싶은데... 고운 원피스 입고 깨끗한 몸으로 부모의 보살핌을 받고 싶은데.  때꾸정 줄줄 흐르는 몸에 악다구니와 매질이 있는 가정이 아니라 다리를 못써서 휠체어에 앉은  약국집 딸이 되는 상상을 해 보았다.


그 아이가 부러웠다. 하나에서 열까지. 넉넉한 약국집 딸인 것도 좋은 부모님이 계신 것도. 소아마비인 것까지.


내가 보기에 그 집은 내가 원하던 부모의 모습을 가진 이상적인 가정이었다. 내가 약국집 딸이었으면. 그 집에서 태어났으면. 상상하는 그 시간만큼은 너무도 행복했다. 나는 자주 상상하며 현실의 불행에서 잠시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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