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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력 Sep 13. 2024

맥가이버를 아시나요.

딴딴딴딴딴딴 딴 딴 딴 ~ 따다 다다다 이것은 맥가이버 드라마의 시그니처 음악이다.


맥가이버는 내가 어릴 때 매주 기다리며 보았던 TV 드라마 제목이다. 나는 이 드라마를 너무너무 좋아했다. 주인공 이름이 리처드 딘 앤더슨인가 그렇다. 지금 아이들이 아이돌 좋아하듯이 좋아했다.


맥가이버의 헤어스타일은 독특했다. 앞머리는 풍성하고 뒷머리는 꽁지머리처럼 길었는데 그조차도 멋있어 보였다. 무엇보다 맥가이버의 매력은 위기 탈출 능력이다. 맥가이버는 항상 탈출할 수 없는 궁지에 몰리곤 했는데 허를 찌르는 상상력과 과학지식을 동원해서 탈출에 백발백중 성공했다.


다른 TV 드라마는 액션이나 총싸움하는 드라마라면 맥가이버는 순전히  맥가이버의 위기 대처능력과 머리에 의존하는 드라마라서  더 신선했었다. 주변의 지형과 사물을 창의적으로 이용하고, 자신의 손보다도 작은 맥가이버 칼만 있으면 다 해결했다.  주인공 맥가이버가 근육질 남자배우도 아니고 잘생기지도 않았는데 이런 매력 때문에 잘생겨 보였다. 이번에는 맥가이버가 탈출할 수 있을까 조마조마하면서 보았는데(어차피 탈출은 기정사실이다), 매번 똑같은 패턴이라 내용이 지루하다가도 맥가이버가 위기 탈출하는 장면에서는, 또 이번에는 어떤 방법으로  할까 놓치지 않고 몰입하고 보았다.


나도 맥가이버처럼 만능으로 뭐든지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맥가이버를 많이 보고 좋아했기 때문에 다단계에 빠진 오빠를 구할 때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탈출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일단 궁지의 상황이 올 때 맥가이버는 어떻게 탈출할 수 있는지 생각하고,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고 여유 있게 해결한다. 맥가이버처럼 생각하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조기교육(?)의 효과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통제할 수 없고 결코 바꾸기 어려운  가정환경을 나는 맥가이버를 보며 '궁지에 몰려도 상황은 바꿀 수 있어.'라고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그 시기에 좋아했던 티브이 드라마 중에 '브이(V)'라는 것이 있었다. 외계인이 인간의 얼굴을 하고 인간을 정복해 가는 드라마인데 인간들의 용감함과 여러 가지 전략으로 외계인들의 실체를 벗기고 승리(V) 하는 구조이다. 아직도 제일 기억나는 장면은 외계인 다이애나가 쥐를 먹는 장면이다. 인간들이 다이애나의 실체를 알게 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다이애나는 외모도 매력적이고 카리스마가 있어서 인간들이 깜박 속았는데 쥐 잡아먹는 장면이 아주 유명하고 충격적이었다. 이 드라마를 좋아했던 이유는 인간들이 궁지에 몰리지만 결국엔 외계인들과의 전략 싸움에서 승리한다. 선(인간)이 악(외계인)을 이기는 구조이다. 매주 브이 하는 시간만 목 빠져라 기다렸었다.


어린 시절 집에 오면 나는 말할 사람이 없었다. TV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아빠가 술 취해 잠드시면 소리를 작게 해서 밤늦게까지 보곤 했다. 전설의 고향, 주말의 명화, 소머즈, 육백만 불의 사나이, 원더우먼 등 모두 권선징악이 토대인데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다.  보고 나면 그 뒤의 이야기를 상상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나갔다. 나는 상상력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도 언젠가 어른이 되면 일당백 활약으로 지구도 구하고, 절체절명 위기에서 지혜를 발휘해 탈출한 주인공들처럼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악당들을 총 쏘고 때려서 무찌르는 히어로가 아니라 맥가이버처럼 창의력과 아이디어만으로 이기는 그런 사람.  


그렇게 나는 어린 시절의 불합리함과 고통을, TV 속 주인공이 되는 상상을 하며 미래의 내 모습을 그려나갔다. 실제로 그런 사람 비슷하게 됐다. 내 가족과 주변에 어렵거나 문제에 부딪쳐 도움을 요청하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머리를 굴려 도와주곤 했다.


이제 나는 나를 구하려고 한다. 어린 시절 상처로 인한 인간관계의 힘듦으로, 감정에 압도되어 한 발짝도 못 움직이는 나. 마치 젖은 이불처럼 널브러져 침대에서 누워있기만 했던 나. 그런 나를 구해야 한다.


어느 동아리 모임에서 자신이 언제 어떨 때 행복한지 말하는 시간이 있었다. 동아리원들은 수십 가지를 이야기하는 데 나는 행복해지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단 한 가지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내가 무얼 할 때 행복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행복한 방법을 찾는 게 어려웠다. 결국은 일주일에 시간을 두고 다시 겨우겨우 한두 개 대답할 수 있었다.


그동안 왜 내가 아팠었는지 조금 알게 됐다. 내 감정에 무뎌지고 내가 좋아하는 것도 모르니 행복한 게 뭐지? 했던 거다. 그즈음 나는 사람에 쉽게 상처받고 아팠다. 사소한 가족갈등에도 쉽게 무너지고 만나는 모든 사람이 부담이 됐었다. 마음에 먹구름이 낀 것처럼 우울하고 삶의 의지가 약해졌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특명은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음식, 내가 누구를 만나면 행복하고 무엇을 하면 행복한지 알아내야 한다. 이 위기 상황에서 나와야지 셋째 넷째를 키울 힘이 생긴다. 얼른 나를 고쳐놔야 한다.


희한하다. 고개를 나에게 돌리기 시작하니 조금 숨이 쉬어진다.


나를 살려야 한다. 내가 행복해야 한다. 특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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