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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력 Sep 27. 2024

나의 국민학교 입학식

나는 학교에 너무너무 가고 싶었다. 원래 8살에 학교를 가야 맞는데 나는 9살에 학교에 입학했다. 너무 작고 비리비리하다는 게 이유였다.


다른 애들은 학교  다니게 되면 이제 맘껏 놀지 못하니 학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나는 학교 들어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여덟 살이 돼서 학교에 들어갈 줄 알았는데 나는 입학하지 못했다. 어제까지 같이 놀던 친구들이 모두 입학을 하는데 오늘부터 놀 친구가 없는 것이다.


나는 친구들이 학교 교실로 들어가는 것을 운동장에서 지켜봤다.

잠시 후 수업이 시작되었는지 운동장에 덩그러니 나만 남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허전했다.


그네에 앉아서 학교 건물을 바라보며


'나는 왜 학교에 못 들어가지?'


생각했다.


'나는 애들보다 똑똑하고 글도 다 읽을 줄 아는데 쟤들은 학교에 가는데 왜 나는 여기 있지.'


기분이 이상했다. 줄 서는 사람이 많아서 타기 어려웠던 그네를 혼자 독차지했는데도 하나도 재미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교실로 들어간 아이들은 나오지 않았다.


그네에 앉아서 흔들흔들 재미없게 타며 생각했다.


'아. 학교 다니고 싶다. 나 잘할 것 같은데...'


평소 같으면 그네로 높이 높이 올라가고, 그네 꽈배기, 그네에서 점프해서 내리기 등 별의별 기술을 구현할 텐데 봐주는 애들이 없으니 아무것도 하기 싫다.

 

이제 집에 가야 하니, 혼자 독차지하던 그네를 누가 탈까 봐 손가락으로 모래에 글씨를 써 놓았다.


'내 거'


 나는 매일 아침 애들하고 똑같이 학교로 향했다. 학교 후문의 언덕에 올라가서 문에 들어가는 학생들을 괜히 할 일 없이 구경했다.  


'나도 내년에는 꼭 학교 들어가야지.'


그때까지 참기로 했다.




드디어 아홉 살이 되었다. 우리는 평택에서 서울에 공릉동으로 이사 왔다. 드디어 그토록 가고 싶던 입학식이다. 공릉국민학교로 엄마랑  실내화를 사서 들고 갔다. 엄마 거는 큰 거. 내 거는 작은 거. 어른 실내화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책가방도 있다. 당시 유행하던 만화그림이 그려진 사각 책가방이다. 내 몸보다 큰 책가방을 어깨에 메었다.


공릉 국민학교 운동장에는 엄마손에 이끌린 아이들이 많이 모였다. 어디서 왔나 싶게 많이 모여 있었다.


왼쪽 가슴에는 옷 핀으로 하얀 손수건이 달려있었다. 손수건의 용도는 콧물을 닦기 위해서이다. 그때는 유독 콧물을 많이 흘렸는데 왼쪽 옷소매로 쓱쓱 닦아 버릇하니 옷소매가 콧물 마른 노란 물로 딱딱해지기 일쑤였다.


 이제 더럽게 옷소매로 닦지 않아도 된다. 운동장에 모인 아이들은 구령대 앞의 선생님의 지시에 따랐다.  단상에 올라간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춤과 노래를 가르쳤다. 처음 배우는 노래였다.


'짹~ 고래  짹짹 고래  으쌰으쌰 망가 으쌰으쌰 망가'


무슨 노래인지 출처도 모르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선생님을 흉내 내며 엉덩이를 씰룩씰룩 손가락을 찔러 찔러했다.  구령대의 선생님 소리가 제대로 안 들려도 옆에 애들을 슬쩍슬쩍 보며 동작을 따라 했다.


잠시 후 우리는 모두 교실로 들어갔다. 엄마들은 모두 교실 밖에서 기다렸다. 교실 창문에 엄마들의 얼굴이 주렁주렁 보였다.


 제일 처음으로 한 것은 색연필과 종합장을 꺼냈다. 선생님 지시에 따라 종합장 한 장을 반으로 접었다. 또 한 번 반으로 접었다. 펼쳐서 접어 생긴 자국에 선긋기를 따라 그렸다.


'이 정도야 쉽지. '


나는 쫙쫙 일사천리로 해나갔다. 나는 아무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데도 스스로 한글을 깨쳐 자유롭게 책을 읽는 수준이었으니 선긋기는 너무 쉬웠다.


그렇게 좋아한 입학식의 추억이 있는 공릉국민학교를 딱 일주일만 다니고 우리 집이 이사를 간 바람에 연촌국민학교로 전학을 갔다. 


엄마는 전학 가는 것을  말 좀 해주지. 겨우 일주일 다닌 공릉국민학교에 애틋함만 생겼다.


나의 입학식은 특별하다. 엄마와의 특별한 추억이니까. 

그때까지도 엄마가 있었으니까. 아홉 살에 엄마가 집을 나갔기 때문에 엄마와 함께한 애틋한 추억이다.


그래서 일주일 밖에 다니지 않은 공릉국민학교가 특별한 것이다.


* 예전에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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