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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력 Sep 22. 2024

또랑에 빠지다

6살

나의 폼에 죽고 폼에 사는 DNA는 어려서부터 알아봤다.


그날도 동네 아이들이랑 몰려다니며 놀았다. 동네를 다 휘젓고 다니며 놀았다. 우리는 동네 어귀의 또랑(도랑의 사투리. 작은 개울)을 발견하였다.


아이들은 또랑을 발견하고 멈칫하고 건너가지를 못했다. 그냥 건너면 옷이 젖거나 아니면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 나는 이렇게 재밌게 노는데 놀이의 흐름이 저 또랑 때문에 가로막히는 게 마뜩지 않았다. 많은 아이들이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나는 순간, 영웅심이 발동하였다. 아이들에게  용감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조금 무모해 보이지만 한 번에 뛰어서 건너가기로 마음먹었다. 한번 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왠지 나는 성공할 것 같았다. 아직 아무도 그렇게 한 번에 뛰어서 성공하지 않았다. 나는 뒤로 몇 걸음 갔다가 빠르고  힘차게 달려서 점프하듯이 뛰어올랐다.


거의 성공이었다. 나의 왼쪽 발이 또랑 건너편까지 닿았으니 거의 성공이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 것보다 또랑 간격이 넓었다. 나의 오른쪽 다리가 올라오지를 못하고 움직이지를 않았다.  오른쪽 다리는 또랑 벽의 돌멩이에 콕 박혀버렸다.


겨우겨우 기어서 또랑 위로 올라와보니 오른쪽 다리에 피가 철철 났다. 엄청 아팠을 거다. 그런데 나는 아픔을 못 느꼈다. 아이들한테 창피하고, 개울에서 안 멋지게 기어올라온 게 더 싫었다. 나는 하나도 안 아픈척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오히려 내 다리를 본 아이들의 얼굴이 놀라고 하얗게 질렸다. 나는 이쯤이야 하며 최대한 아프지 않은 척했다. 나는 영웅이 되려다가 다치고 우스운 꼴이 됐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모르겠다.


겨우겨우 집으로 돌아와서 내 다리를 보니 무릎 아래 살점이 엄지 마디 한 개 정도로 푹 파여서 피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엄마에게 보여주고 나서 아버지한테는 절대 절대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괜히 아버지 알면 혼나기만 할 뿐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불을 덮어서 오른쪽 다리를 감추고 있었다.


아버지가 일하고 퇴근하셨다.  엄마는 내가 다친 것을 아버지에게 말했고, 아버지는 이불을 걷어 내 다리를 보시고는 곧장 아버지 자전거 뒤에 태우고 병원에 데리고 가셨다. 병원은 시내에 있어 꽤 멀었다.


'어. 이상하다. 야단맞을 줄 알았는데...'


병원에서 상처를 보니 꽤 심각한 상처였다. 정말 살점이 깊이 푹 파여서 제법 큰 돌에 다쳤었던 거였다. 약을 바르고 붕대로 꽁꽁 싸매고서 그제야 아픈 다리 구나 실감이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금세 어둑어둑해졌다. 아버지 자전거 뒤에서 컴컴해진 세상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둘러싸인 집들은 이제 형체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그 밤에 세상은  멈춰서 깜깜하고 고요했다.  쉬익 쉬익 페달 밟는 소리와 자전거만 움직일  뿐, 집인지 어느 곳인지 모르는 곳으로 계속 계속 멈추지 않고 달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세상은 멈춰있고 우리만 움직이는 것 같았다.


몇 날 며칠을  아버지는 퇴근 후에 나를 싣고 병원을 왔다 갔다 했다. 꽤 오래 걸리는 상처였다. 상처가 깊어 쉽게 아물지도 않았다.  집으로 오는 길은 항상 어둑어둑해졌다. 아버지 등 뒤에서 자전거 페달을 밟으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어쩌면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


나는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아버지를 잘 못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날 며칠을 고생하며 나를 실어 오고, 실어 가는 아버지가 그때만큼은 고마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가족들에게 화를 내고 뒤집어엎고, 엄마랑 우리들을 때리니 아버지에게 좋았던 마음이 홀랑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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