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봉 다방으로 오세요.
내 첫직장은 여왕봉 다방2층에
나는 고등학교 때 공부를 못했다. 자존심상 안 했다고 하고 싶다. 적성에 맞지 않는 학교에 입학을 했다는 핑계로 3년 내내 공부를 아예 하지 않았다.
지옥 같은 집과 달리 친구들과 놀고 수다 떨 수 있는 학교는 나에게는 천국 같은 곳이었다. 지각해서 화장실 청소를 해도 재밌고, 교실에서 시답잖은 농담으로 선생님을 골리는 것도 재밌었다. 그래도 미래를 위해서 고집을 꺾고 공부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학교는 나에게 놀이터였다.
한 번은 미술 선생님이 책을 안 가져온 애들을 쫓아낸 적이 있는데 나는 그 애들을 이끌고 학교 뒷산에 올라가서 산딸기를 따 먹고 놀았다. 산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교감 선생님이 발견하고 의아해하시길래 해맑게 미술책을 안 가져와서 쫓겨나서 산에 갔다 왔다고 했다.
교감선생님 만난 이야기를 미술 선생님께 전달해 드렸더니 엄청 당황한 표정이셨다. 그 후로 밖으로 나가는 벌은 받지 않았다.
그렇게 3년 내내 학교에서는 행복했는데 나와 놀던 친구들은 놀면서도 공부했는데, 나는 놀기만 해서 3학년이 돼서 취업할 때가 되니 현실이 눈앞에 다가왔다.
친구들은 1학기 때 삼성이나 증권회사 은행 등에 취직해서 제법 어른같이 정장을 입고 면접 가서 합격을 하는데 나는 2학기가 돼서도 단 한 군데도 면접 기회가 없었다. 2학기 때는 공부를 못하더라도 얼굴이 예쁜 애들이 대기업 등에 면접 기회가 주어지고 합격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공부를 열심히 할 걸 후회를 해보지만 싫어하는 것은 죽어도 안 하는 성격이라 과거로 돌아가도 똑같을 것이다. 그래도 마음이 울적하고 취업된 아이들이 부럽고 그랬다.
나랑 같이 공부 안 하던 친구가 취업하고 나니 점점 교실에는 취업 나간 아이들의 자리가 비워지고 나와 몇 명의 아이들만 남아서 2학기에 등교하였다. 공부 안 한 내 탓이지만 너무 창피하고 나의 미래는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먼저 취업 나간 친구가 거래처 사장님이 여직원(경리)을 구한다고 나를 추천했다고 한다. 내가 안쓰러워 친구도 많이 걱정하다가 소개해 준거다.
생애 처음으로 면접을 보기 위해 용산역(그러고 보니 나는 용산역과 인연이 많다)으로 향했다.
부푼 꿈을 안고 회사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전화를 해보았다.
"골목길 두 번째 건물에 여왕봉 다방 2층으로 오세요"
"예? 여왕응 다방이요?"
"여왕봉 다방이요."
"여왕봉 다방이요?"
다방 이름이 여왕봉이라니 뭔가 너무 과하다.
아무튼 친구가 소개해 준 곳이니 면접이라도 보고 오자는 마음으로 골목 이곳저곳 살피니 진짜로 여왕봉 다방이 있다. 약간 오래된 건물에 '여왕봉 다방'간판이 크게 있다.
전화받는 분이 여왕봉 다방을 강조한 이유를 알겠다. 골목이 아무 개성이 없고 특이점이 없는데 여왕봉 다방의 큰 간판은 건물을 찾기 쉽게 해 줬다.
혹시 이상한 회사는 아니겠지...
건물에 2층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으로 사무실로 들어가는 문이 보였다. 그곳인 것 같았다.
순간 잠시 멈칫했다.
여왕봉 다방 2층에 자리한 사무실이라니. 친구들은 삐까번쩍한 광화문 삼성 본사, 대한항공, 현대 등 굴지의 기업에 취직해서 다니는데. 순간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 내 신세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 졸업 때까지 취직 못하면 그게 창피한 일이다.
마음을 다잡고 좁은 계단을 올라가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은 아담했다. 경리 언니와 사장님만 근무하는 조촐한 회사다. 첫 면접이라 떨렸는데 다행히 사장님이 우리 학교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계셔서 언제부터 출근할 수 있는지 물어보신다.
'합격'이다.
근데 사장님이랑 단둘이 근무하는 게 부담이 됐는데 인수인계해 주는 경리 언니는 3년이나 근무했고 결혼해야 해서 그만둔다고 한다. 한번 근무해 보자는 마음으로 다음 날 출근을 했고 인수인계를 받았다.
일은 간단했다. 오전에 거래처에서 고기 부위별 주문을 받고 고기 회사에 주문을 넣으면 된다. 생소한 고기 부위 명칭 외에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세무 신고도 세무사 사무실에서 다해주니 경리업무는 오전에 바짝 바쁘고 오후에는 한가해서 편했다.
사장님은 신입 직원이 왔으니 회식을 하자고 여왕봉 다방 근처의 식당에서 삼겹살을 사주셨다.
처음 먹어 보는 식당 삼겹살이 신기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허세가 좀 많은 편이다. 겨우 스무 살에 사장하나 나 하나 여왕봉 다방 2층이 내 직장이라는 게 마뜩지 않았다.
한 달도 안 돼서 집하고 너무 멀어서 출퇴근이 힘들다는 핑계로 그만두었다. 한 시간 반이나 걸려서 출근할 만큼 애사심이 생기지 않았다.
아무 대책도 없이 그렇게 그만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