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스로 공부를 가르치는 회사
사차원교육주식회사 1
첫 직장을 아무 준비 없이 한 달 만에 그만두고 취업사기(알고 보니 영업직) 비슷하게 일 년을 날려먹고 내가 취업하기에는 너무 부족함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성적이 안되고. 뭐라도 자격증이라도 따야지 싶어서 건국대 근처 컴퓨터 학원에 등록했다. 워드와 엑셀을 배워놓으면 취업에 도움이 될까 싶어 등록을 했다. 컴퓨터만 배우기에는 용돈 사정이 넉넉지 않으니 건국대 근처 분식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분식집은 라밥(밥 위에 라면을 얹어서 주는 메뉴) 이 가격도 싸고 제일 잘 팔렸다. 그러니 일하는 동안 정말 끊임없이 손님이 들이닥쳤다. 아르바이트생 식사도 라밥을 주셨는데 비결이 뭔지 진짜 맛있었다.
어느 날 분식집에 여러 명의 대학생들이 들어왔는데(이 분식집은 거의 건국대생이 손님이다) 그중에 아는 얼굴이 보인다. 자세히 보니 6학년 때 잠깐 친했던 윤경이다. 아는 체를 할 새도 없이 윤경이는 자기 친구들 속으로 들어가고 나는 바쁘게 서빙을 했다. 당황하고 창피해서 되도록 윤경이가 보이지 않는 시선에서 그렇게 일을 했다. 윤경이는 여전히 예쁘고 얼굴은 어릴 때 그대로인데 대학생의 당당함이 느껴졌다.
나는 앞치마를 입고 이런 일을 한다는 게 초라하고 슬펐다. 어릴 때 공부는 내가 좀 잘했는데... 물론 그 후에 각자의 노력도 다를 수 있고 인생의 여러 여정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때 나는 고작 스무 살을 갓 넘은 나이였다.
나는 워드와 엑셀을 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공부했다. 얼른 취직이라도 해서 사람 구실이라도 하자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취직은 맘처럼 쉽지 않았다. 얼마 후 워드 자격증을 땄고, 컴퓨터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로 대한항*에서 일해보겠냐고 제안해서 취직하기 전만 해보기로 하였다. 분식집에서 라밥을 나르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의 육체노동은 고맙게도 금방 끝이 났다.
대한항* 일은 간단했다. 워드로 영어와 상식 문제를 입력하는 일이었다. 보안 문제 때문인지 약간 창고 사무실 같은 곳에서 다른 아르바이트생이랑 같이 근무했다. 꽤 편하고 페이도 괜찮고 과장님 대리님이 회식도 데려가 주시고 나름 회사 생활 기분이 났다. 특히 대한항* 주변에는 유명한 밥집이 많아서 식권 들고 밥집을 순회하는 기분이 쏠쏠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집은 부추 비빔밥 집이었는데 비결이 뭔지 너무너무 맛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열심히 일하다 고개를 드니 내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점심시간이었는데 모두 왁자지껄 나가면서 나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사무실 문을 밖에서 잠그고 나간 거다. 누가 열어주지 않으면 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너무 비참했다. 내가 여기에서 이렇게 아무 존재도 아니구나 생각이 들었다.
감상은 접고 빨리 나가야 했다.
과장님께 전화를 드렸다.
"과장님 저.. 사무실에 갇혔어요..."
간신히 울음을 참고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 겨우 말했는데 다시 말해야 한다.
"다들 점심 먹으러 갔는데 문을 잠그고 가셨어요."
"누가"
"대리님이 잠그셨나 봐요."
열쇠는 대리님이 갖고 계시니 그렇게 추측된다.
"조금만 기다려. 사람 내려보낼게"
잠시 후 열쇠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린다.
내가 갇힌 건 30분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참 길게 느껴졌다. 문 열어준 다른 과 대리님과 밥을 먹으러 갔다.
밥을 먹고 돌아오니 다들 미안해하셔서 괜찮은척했지만 내 자리 컴퓨터에 앉는데 마음이 많이 안 좋고 여러 생각들이 몰려왔다.
나도 어딘가에 정식 직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당히 인정받는 정직원이 되자.
여기는 아르바이트하는 곳일 뿐이야.
영원한 직장이 아니다.
그렇게 몇 달 후, 나는 컴퓨터가 꽤 능숙하고 빨라져서 이력서에 대한항* 아르바이트 경력을 넣어 한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된다.
바로 "사차원 교육 주식회사"
왜 이름을 사차원으로 지었을까. 뭔가 첨단 느낌이나게 지은것 같기도 하다.
잠실 신천역에서 내리면 꽤 큰 건물에 엘리베이터도 있고 전무님 상무님 직원들도 제법 많고 한 층을 다 쓰는 회사였다.
나는 면접을 봤고 당당히 합격하였다.
나의 업무는 대한항*에서 했던 업무 그대로 워드프로세서기에 문제를 입력하는 일이었다. 나는 컴퓨터도 입력을 했지만 당시 워드프로세서기를 대한항*에서 잘 배워두었었다.
이 회사는 팩스로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회사이다. 매일매일 선생님이 문제지를 팩스로 보내면, 학생은 팩스로 자기가 푼 문제를 보낸다. 선생님은 채점을 하고 전화로 부족한 부분을 가르쳐 주는 회사이다. 과외 비슷한데 과외보다 저렴하니 당시에는 꽤 신박한 아이디어였다.
가정에 팩스도 대여해 주고 매일 공부를 체크할 수 있으니 이런 아이디어로 꽤 성장할 것 같은 회사였다. 실제로 회원이 계속 늘었다. 내가 맡은 업무는 선생님이 문제를 주시면 워드프로세서기로 입력하고 출력해서 가정에 팩스로 보내기 전까지 완성하는 일이었다.
경리부에는 나보다 한 살 어린 춘자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항상 일찍 와서 책상을 반짝반짝 닦아 놓았다. 시골에서 올라와서 첫 직장이었고 착하고 나를 잘 따랐다.
영업파트, 선생님 파트, 임원진들, 경리부 등 나름 회사의 모양이 있는 주식회사였다. 내 첫 직장인 여왕봉 다방 2층에 있는 쪼끄만 사무실보다 훨씬 좋았다. 일은 어렵지 않았다. 대한항*에서 워드프로세서기를 다룬 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는 회식에서 특히 빛을 발했는데 트로트를 부르면 그렇게 이뻐하셨다. 특히 김지애의 '얄미운 사랑'을 부르면 그렇게 재미있어하셨다. 나는 트로트를 싫어하지만 회식에서는 트로트로 꺾어줘야 인기를 끌 수 있다.
그렇게 즐겁게 오래오래 다닐 줄 알았는데 어느 날 회사에 출근해 보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자기가 다닐 회사를 이름을 보고 선택 할 걸 그랬나. 사차원이라는 이름만큼이나 나의 삶을 미궁속으로 빠지게 한 회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