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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력 Jul 22. 2024

아버지 몰래 학교입학 도장을 찍다.

선취업, 후진학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를 들어갈 때 상업계 고등학교가 있었다. 대학교 들어갈 친구들은 인문계 고등학교. 취업을 할  친구들은 실업계 또는 상업계라고도 하는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다.


 고등학교 원서를 쓰기 위해 부모님과 의논을 하고 부모님 도장을 가져와야 했다. 아버지는 당연히 실업계 고등학교를 가라고 화를 내셨다. 나는 실업계 고등학교가 적성에 맞을 거 같지 않았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서 대학생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완강한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어느 실업계고를 가야 하는지 정해야 했다. 아버지는 떨어질 염려 없는 성적이 낮아도 갈 수 있는 학교로 가라고 했다. 나는 내 성적에 다소 어려워 보이는 높은  수준의 학교에 지원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실업계 고등학교 가는 것도 싫은데, 낮은 수준의 학교에 가는 게 사춘기 마음에 자존심이 상했다. 아버지와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국에는 원서도 못 쓰고 중졸이 되게 생겨서 아버지가 술 취해 잠드셨을 때 몰래 도장을 꺼내 왔다.


다음날 선생님께 내 마음에 그나마 절충했던 동* 상업고등학교로 아버지 도장을 찍었다.


나도 알았다. 우리 집 형편에 인문계 고등학교는 안 되는 것을...


복잡하고 슬픈 감정으로 앉아 있는데 누가 나를 찾아왔다고 한다.


뒤를 돌아보니 아버지가 교실 복도 쪽 창문에 걸쳐서 '***' 하고 간결하게 내 이름을 부르며 아이들에게 찾아달라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너무 깜짝 놀라고 당황했다. 무서운 아버지가 학교에 온 것도, 창문에 팔을 걸치고 장난기 있는 마초 같은 모습으로 나를 찾는 것도...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아버지는 문장이 간략하다.


"원서"

"아. 아버지 도장 가지고 와서 벌써 찍었어요."

"어디"

"동*상고로 썼어요"


조심조심 아버지 눈치를 살피며 대답하는 내 모습이다. 아버지랑 선생님이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아버지가 지금 몰래 도장 가지고 왔다고 친구들 앞에서 깽판 치고 화를 낼까 무섭다.

조금 당황한 듯한 아버지  모습이지만  옅은 미소를 머금은 모습이다.


"그래?"


 의외로 화를 안 내신다.


학교 와서 허탕 친 것도. 내 맘대로 학교를 정한 것도. 몰래  도장을 가지고 온 것도. 화를 안 내신다. 아마 도장 가져온 줄은 눈치 못 채셨던 모양이다. 순순히 집으로 돌아가셨다. 당황스럽고 가슴이 졸아드는 시간이었다.


내 큰딸의 대학교 입학식 날. 부모님을 따로 강당에 모시고 대학교 소개를 하며 이렇게 아이들 잘 교육하겠습니다 하는 부모님 OT가 있었다.


교육실 실습실도 보여주고 담당 교수님  소개도 받고 부모님과 직접 면담도 하고 다과도 준비되어 있었다. 아이들의 입학식에 부모님을 따로 배려하는 행사에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근데 나는 그날 하염없이 너무너무 눈물이 나왔다. 나 자신이 당황할 정도로 눈물이 나왔다. 딸아이 몰래 눈물을 훔쳤다.


처음에는 딸아이의 대학교 입학이 감격스러워서 우는 줄 알았다. 그렇지만 그러기엔 이 상황에 맞지 않는 눈물이었다.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 딸이 너무 부러워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이런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는 부모가 있는 것도. 이런 세련된 대학에 다니는 것도. 모두 모두 부러워서 흘리는 눈물임을 알고 너무 부끄럽고 내가 너무 주책맞아 보였다. 딸아이를 부러워하는 모습이 어른 같지 않았다.

  

 '선취업 후진학'  


내가 졸업한 학교에서 내세운 슬로건이었다. 당시 나처럼 대학을 가지 못하는 어려운 형편의 아이들이 우리 학교에 많이 다녔다. 그런 아이들에게 위로의 슬로건인지도 모르겠다.  먼저 취업하고 나중에 대학을 가라는 '선취업. 후진학'의 슬로건.


그렇다.


20살에 졸업해서 회사에 취업해서 다녔다. 결혼해서는 아이들 키우고 일하고 가정을 건사했다.


이제 내 나이 오십이 넘어 대학교에 입학했다. 스무 살에 취업하고 오십이 넘어 대학교에 입학했으니 슬로건데로 됐다.


참 돌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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