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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력 Jul 19. 2024

엄마와 닮은 이모는 저렇게 행복한데

엄마를 만나러 가출을 하다. 2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한 시골 흙길을 달리는 꿈을 자주 꾼다. 버스는 내가 모르는 이곳저곳을 누빈다. 버스에서 내리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동네를 이 골목 저 골목 정처 없이 다니고  아직 어린아이인 나는 어딘지 모를 불안감에 우리 집은 어디에 있나 찾아  헤매곤 한다. 때로는 어느 빌라 꼭대기가 우리 집이 되고, 때로는 마을버스가 다니던 신내동 배밭이 있었던 집. 때로는 공릉동 시장 골목이 되기도 한다.


나는 여행에서 크게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좋아하는데 나는 왜 그럴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집과 거리가 멀어질수록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생기고 꿈속에서처럼 헤매지 않을까 두려워서일까 생각해 본다. 여행을 갔다가도 비로소 집 가까이 와야 안도하고 집에 도착해야 행복하다.


중학교 겨울 방학 때 아버지 몰래 엄마가 보고 싶어 만나러 간다는 쪽지 하나 남기고 외할머니 집으로  떠났고, 어린 시절의 기억에 의지해 무사히 충북 *천군 사석리 **에 도착하였고 거기서부터 난관에 부딪혔었다.

  

무장적 마을회관을 찾아 제일 먼저 만난 어른께 이모부 이름 변** 씨 댁을 아느냐고 물었다. 참으로 지금 생각해도 무모하고 무식한 방법이었다.


다행히 그분은 이모부를 잘 아시는 듯했고 나를 이모부 집으로 안내를 해주셨다. 그분의 안내대로 가는 이모부 집은 내가 수없이 복기했던 집이 아니라 생소한 집이었다.


나는 외할머니 집만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외할머니 집과 이모부 집을 헷갈려한 것 같다.


잠시 후 키가 크고 인상 좋아 보이는 어른 한 분이 나오셨고 뒤이어 엄마하고 얼굴이 똑같이 생긴  분이 나오셨다. 엄마인가 했지만  이모였다. 엄마의 언니 이모에게 내 이름을 알려주니 단박에 알아보고 울으시며 반가워해 주셨다.


'다행이다.'


이모집을 찾았다.


이모집은 여느 시골집처럼 아궁이가 있고 툇마루가 있고 외양간이 있는 집이었다. 이모는 안방의 아랫목 제일 좋은 자리로 나를 이끌었다. 이모를 보니 안도감이 들었다. 이모부를 살펴보았다. 나는 남자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이모부에게 잠깐의 경계심이 있었다.


며칠 지내며 이모부의 선량함을 알 수 있었고 어느 면에 이모한테 꼼짝 못 하는 모습도 있었다. 나에게 가장 따뜻한 아랫목을 두 분  모두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에 좋은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모에게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는 엄마를 만나고 싶어서 아버지께 말도 안 하고 나온 이야기를 했다. 이모는 며칠 전에 엄마가 왔다 갔다고 알려주며 무척 안타까워하셨다. 그리고 엄마가 가끔 이모집에 들리면, 평소에 나를 너무 보고 싶어 했더라는 이야기와 충청도 어딘가에서 일을 한다고 말해 주셨다.

  

엄마가 우리 집을 나오고 외갓집으로 왔었다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며칠 동안 이모집에 머무르며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모집에서의 며칠은 이모가 차려준 따뜻한 밥을 먹는 게 좋았다. 그때 '머슴밥'을 처음 알았다. 밥그릇 가득히  주는 밥이 머슴밥이다.  이모가 차려준 밥은 머슴밥에 동치미 김장김치 시골밥상은 화려하지 않아도 꿀 맛 같았다. 동치미에 들어있는 고추를 깨물어 국물이 왈칵 튀어도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고 하하 호호 웃음이 나왔다.


지금도 나는 고기보다 시골 음식을 제일 좋아한다. 이모집의 따뜻한 아랫목은 등이 탈 지경이었지만 한사코 좋은 자리를 양보하시는 마음이 고마워서 등이 타는 것을 꾹 참으며 견디다가 결국엔 등이 타 죽을 것 같아(옛날 집은 아랫목은 뜨겁고 윗목은 냉골이다) 이모한테 말하고 중간 자리로 옮기기도 하였다.


엄마가 올지도 모른다는 기다림으로 이모집에 머물며 이모 부부를 관찰하였다.


변** 이모부와 이모는 사이가 좋았다. 이모의 표정은 고생한 티가 별로 안 나고 편안해 보였다. 이모는 아들이 있었는데 서로 어색하고 말을 별로 하지 않았는데 고등학생 같은데 벌써 결혼해서 이모방 앞에 따로 떨어진 방에서 아내와 같이 기거했다. 그 오빠 아내는 얼굴에 약간의 화상 상처가 있었는데 사이가 나빠 보이지 않았다. 시골에서는 이른 나이에 결혼하는지 십 대의 결혼이 생소했다.

  

나는 생각했다.


'엄마와 똑같이 생긴 이모는 가정에서 저렇게 행복하게 사는데 우리 엄마는 왜 아빠를 만나서 자식도 보지 못하고 고생을 할까.'


또다시 엄마가 불쌍해서 가슴이 아팠다.


며칠을 기다렸지만 엄마는 오지 않았고 이모집에서 너무 오래 신세 지는 것도 미안해서, 엄마에게 기나긴 그리움의 편지를 써서 엄마 오면 보여주라고 이모에게 남겨주고 이모집을 떠나왔다.


그렇게 내가 왔던 반대의 경로로 짚어가며 서울로 돌아왔다.


두려웠다. 아버지와의 만남이 남았다.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아버지한테 혼날 까봐 아무 말도 안 하고 다락으로 올라갔다.  아버지도 아무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희한하다. 아버지가 진탕 때릴 줄 알았는데 때리지 않으셨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냈다. 나중에 아버지가 한마디 했다.


 "엄마 만났냐"


 "못 만났어요."


엄마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면 아버지가 엄마를 찾아내서 어떻게 할까 봐 최대한 말을 아낀다.

아무것도 아버지한테는 알려주지 않았다.

  


에필로그


이모가 외할머니 집을 알려주었다. 내가 기억했던 그 집 그대로였다. 마당에 착하게 생긴 젖소가 왼쪽에 외양간에 있고, 긴 마당을 지나 툇마루가 있고 거실 같은 방에 외할머니 집에는 외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시고 외삼촌이 살고 있었다. 아 기억이 너무 희미한데 외삼촌도 울었던 것 같다. 그리고 외삼촌도 엄마의 삶을 슬퍼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이모집을 떠나온 얼마 후 엄마가 이모집을 와서 내가 남겨 둔 편지를 전해 읽으시고 엄청 엄청 우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 한 번 마음이 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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