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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지윤 Feb 09. 2021

시월애와 10년 만의 안부

인생에 그냥 왔다 가는 인연이란 없는 법


한 10년 전쯤.

트위터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소통을 했다.

그때 내가 쓴 글을 이현승 감독님이 읽고 나에게 내 글이 아름답다며 '감동'이라는 단어를 섞어 격려의 글을 보내주셔서 심장이 멎을 뻔했던 기억이 있다.


며칠 전 그와 밥을 먹다 그가 갑자기 시월애라는 영화를 언급했던 순간.

내가 한국 영화 중에 가장 좋아하는 영화의 제목이 그의 입에서 갑자기 뱉어져 나오는 순간 나는 오묘한 감동을 느꼈다. 그때 오랜만에 그 이현승 감독님이 떠올랐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 영화가 전지현 언니의 엽기적 이였던 그녀의 전인지 후인지를 두고 옥신각신하다 그의 입에서 내가 이겼어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나는 시월애가 그 후의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말했다. 엽기적인 이후로 잘 된 영화가 별로 없었거든. 그도 시월애를 좋아한다고 했다. 심장이 따듯해졌다. 나는 그 영화를 100번쯤은 봤어. 볼 때마다 아름다운 영화였다.


나에게 시월애는 이현승 감독님의 최고작이며 감독님을 존경하게 된 작품이었다. 그런 그에게서 내 글이 감동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용기라는 것을 얻게 되었다. 감독님과 몇몇 글이 오고 가는 설레이는 순간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내가 쓴 순수하지만 특별한 언어에 있었다.


그 시절 트위터를 하다가 몇몇 감성적이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친해져 한동안 매일 안부를 주고받던 일이 있었다.(트위터는 사실 정보를 공유하는 목적성을 띄는 sns인데 거기 나를 포함한 몇몇은 감성을 주고받는 창구가 되었다) 특이했으나 특이했으므로 서로에게 오므라 들게 만들었던 우리만의 특별함이었다.


그중에는 아주 젊으신 신부님도 계셨는데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매일 따듯한 말과 글을 주고받으며 언젠가는 우리 넷이 대구의 팔공산으로 다 함께 등산을 가자며 기약 없으나 간절한 약속들을 자주 주고받았다.


지금은 시간이 너무 오래 흘려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버렸지만 그중 한 언니와는 나중에도 연락이 닿아 가끔 안부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지만 대구의 팔공산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면 그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왜 하필 팔공산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신부님이 대구교구분이었나?)  언젠가 우리 넷이 팔공산 정상에 가 있을 줄 알았는데. 세월은 야속해서 그들의 생사도 가물거리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제 우연히 넘쳐나는 카톡의 컨텍 리스트를 정리하다 그중 한 명의 이름을 보게 되었다.


물론 언젠가도 무심히 넘기다 그저 넘어가 버린 이름이었겠으나 어제는 이상하게 그의 이름이 또렷하게 보였고 멈춰졌다.


연락을 해볼까?


그는 그중에서도 유독 감성적이고 상냥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었으나 매우 여리고 순수한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해 준 사람이었고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예의가 있고 배려가 있던 사람들.


혹시나 해서 신부님과 언니의 연락처가 남았나 찾아보았으나 그만 있었다.


나를 기억할지 잊었을지 모를 그에게 안부를 물었다.


생각지도 못했으나 그에게서 답이 돌아왔다. 그도 그때를 잊을 수 없다며 반가워하는 게 고마웠다.


손가락을 몇 번 놀리면 10년을 찢어져 살던 사람과도 쉽게 안부가 주고받아진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그와의 안부에서 새삼스럽게 그때를 추억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절 그곳에서 내 글에 감동을 받은 것은 비단 시월애의 이현승 감독님뿐만이 아니었다.


뉴욕에 살던 어떤 분은 늘 내게 격려의 말과 안부를 전하며 아직 쓰이지도 않은 내 글에 가치를 평가해 주셨고 가끔 편지까지 보내 주셨다.


팬레터야. 언젠가 작가가 되면 나를 잊지 말아 줘.

그녀의 편지와 애정은 특별하고 신선했다.


그 순간 나는 마치 부코스키가 된 것 같았다.

아직 쓰이지도 않은 글에, 아니 그가 쓸 글에 이견이 없어 미리 선불을 지불했던 사람들.


그분들의 따듯한 관심과 사랑과 격려에 난 아무런 보답을 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저 생을 즐기며 하고 싶은 것에 도전하며 살았다. (역시나 부코스키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나 부코스키는 술을 퍼마시고 여자를 후렸을지언정 마지못해라도 썼다.


그 후 나를 만났던 누군가는 뜬금없이 내가 작가가 될 거라고 말했다. (역시 부코스키가 떠오른다) 그는 내가 작가가 될 수 있다고 굳게 믿던 아이 었다. 그는 내게 글을 쓰고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서포트를 아끼지 않았다. 그때 그가 night shift를 하는 동안 나는 밤을 새워서 글을 썼다. 그가 나를 깨워가며 글 안에 있도록 몰아갔다. 내가 나를 의심할 새 없도록 만들려는 것 같았다.


내가? 과연?


처음으로 내가 작가가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도록 내 가치를 높여준 사람이었다. 이과인 남자가 문과에 동경하는 그런 흔한 부류였으나 그는 내가 가진 것이 자신의 것보다 낮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밤낮없이 내 가치를 높여주었고 쓰도록 밀어붙였다.


갑자기 나타났던 그를 만나는 동안 나는 생에 없던 글과 작가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여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인생에 쓸모없는 경험이란 없고 있을 수 없는 인연이란 없는 법. 그와 헤어진 후에도 내가 읽었던 무수한 문학 작품과 근육을 단련하듯 써온 글들이 여기저기 남았다.


신경숙 작가는 어린 시절 글이 좋았다고 했다.

글이 너무 좋아서 길바닥에 떨어진 신문 조각에 있는 활자까지도 다 읽고 다녔다고 했고 오빠의 책장에 꽂힌 책들을 읽고 필사를 하면서도 자신이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했다.

그녀 또한 나처럼 작가란 무언가 특별한 영역의 부류, 혹은 그런 사람일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는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대신 혼자 책을 읽는 시간을 좋아했다.

학교를 자주 빠지는 그녀가 못마땅했던 그녀의 선생님은 그녀를 불러다 반성문을 써 오라고 했고 그녀가 써온 반성문을 읽고 그녀의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의외였다.


너, 소설가가 되어보지 않겠니?


그녀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고 했다. 나도 작가가 될 수 있구나를 그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인생에 그냥 왔다가 가는 인연은 없는 법.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던 시절에도 내게서 나도 몰랐던 글이라는 냄새를 내게서 맡던 사람들.


이렇게 내가 글이라는 것과 엮이게 만든 그간의 사람들 나와 내 글의 가치를 알아봐 준 사람들에게 내가 언젠가는 과연 보답을 할 수 있을까 그럴 날이 올까,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시들해 졌다. 갑자기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싶어 졌다. 낙심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 마음이 더 아프기만 했다.


어제 오랜만에 근 10년을 연락 없이 살던 그와 안부를 물으며 그 시절이 떠올랐다. 매우 감상적이고 순수했던 시절. 작가라는 단어를 감히 내 인생에 들어놓지도 못하던 시절. 그래도 쓰는 게 좋고 내 글에 반응을 해주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분들.


나는 그들과 그 과정을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나아갔다.

느리고 연약했지만 성장 했다.


그리고,

밥을 먹다 갑자기 시월애를 말하던 그와의 만남에서 나는 또다른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은 어느날 누군가가 내게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말했을때와 비등했다. 그와 대화를 하는동안 나는 도로 평범해 지는 생각을 했다. 왜 특별한 삶만이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동안 내가 나를 힘들게 했던 이유들이 그와의 대화를 통해 여과 없이 벗겨졌다. 그는 나를 발가벗기고 내 눈에 걸쳐진 도수가 맞지 않는 안경을 슬쩍 내려버리는것 같았다. 불편한 옷차림과 맞지 않는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살았으나 그는 대번에 그걸 알았고 벗겨버렸다.

그를 알고난후 나는 처음으로 홀가분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았다. 늘 무엇에 쫒기는 사람처럼 불편하고 불안했던 마음은 맞지 않는 옷과 맞지 않는 도수의 안경에서 오는 버거움이 아니였을까. 벗어버리고 내려 놓아 보니 행복이 여기 내 피부에 닿아 있었다.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기르고 엄마가되고 남편을 돌보는 삶이 성공하지 못한 삶이라고 누가 말했는가.

우리엄마도 그렇게 살아왔고 내 친구도 그렇게 살아가는데 행복과 성공과 만족이 한거번에 뒤집어 졌다. 그동안 내가 빛나고 내가 성공을 해야만 나와 내 가족도 빛이 나는것이라고 생각했던것이 어쩌면 이기적인 망상일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말 했다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닐때에도 충분히 사랑 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는것이 자존감이라고.

축구를 하듯 너와 나와 쟤가 서로 조금씩 공을 몰아 골을 만드는것. 나 혼자 빛나려면 축구가 아니라 스케이트를 타야 했다. 나는 축구가 하고 싶으면서 스케이트를 타려고 버둥댔다. 사랑과 가정을 꾸리는 일은 축구를 하는것과 같았다. 서로가 조금씩 빛나는것, 각자의 포지션에서 각자의 열할을 상대방에 맞추어 해 나가는것. 팀이 이기는것은 나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함께 했기 때문이었다.


가족과 가정과 우리. 나도 그렇게 자랐다. 우리엄마도 그렇게 살았고. 누가 그들을 실패했고 불행하다고 하겠는가, 낙뢰하는것에 그동안 단단했던 내 이고가 엊어 맞았다.

삶에 들어와 깨달음을 주고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 나에게는 늘 있었다. 나를 서게도 했고 무너 뜨리기도 하면서 나를 완성시켜 주던 사람들.

레고가 된 기분이었다. 흩어져 있는것을 맞춰 주고 잘못 맞춰진것이 있으면 이렇듯 불현듯 들어와 부서트리고 다시 제 자리를 맞춰주는 사람들.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게 되었겠지.

운명과 인연에 감사했다.


인생에 그냥 왔다 가는 인연은 없는법.


내 인생에 들락날락 거렸던 사람들은 대체로 아름다웠다.


10년만에 안부를 주고 받은 그와 나에게 가끔 편지를 보내왔던 그녀와 시월애의 이현승 감독님 그리고 내가 특별해 질 수 있다고 믿게 했던 누군가와 또 내가 꼭 특별해야만 할필요 없다고 나를 무너트린 시월애를 말했던 그. 그들이 나를 완성해 간다. 내 인생에 들락날락거렸던, 인생에 그냥 이유없이 왔다 가는 법이 없어 연을 맺었던 그들이 새삼 고맙고 그리운 밤이다.







2012 내가 글을 쓸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시절 누군가는 내가 작가가 될 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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