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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지윤 May 24. 2022

양희와 만민이와 구덩이와 사랑

모두 어딘가에 빠져 있을 한낮의 주저하는 연인들에게

한 주 동안 사랑에 관하여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헛발을 디뎌 허방에 빠져버렸고 나는 그만 그 구덩이에 갇힌 꼴이 되었다. 그 꼴로 한동안 사랑에 관하여 생각해 보았으나 어디를 살펴도 여기, 그런 건 없어 보였다. 나는 실제로 실재하지 않는 그 실체를 찾아 열심히 두리번거렸다. 문제가 있다면 내가 고작 그 작은 구덩이 안에 갇혔다는 것이 문제였다.


구덩이 안에서 오래 발음 하지 않았던 사랑이라는 단어를 발음해보고 있는데 갑자기 문자가 왔다.

잔나비,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엄마, 왜 이런 노래를 나에게 보낸 거야? 엄마는 갑자기 최정훈에게 빠졌다고 했다.

아니 나는 빠질 곳이 없는데 이런 노래를 보내면 어쩌란 말이지? 엄마, 나는 지금 구덩이에 빠졌어! 지금은 무척 곤란하다구우!


아, 고약하고 가혹해. 사람들은 왜이리 고약하고 가혹해?!

사랑이라는 단어만으로 허방에 빠져버리는 사람에게 사랑에 관하여,라고 묻는 것은 고약하고 가혹했다.

나는 절망스럽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았다. 실로 결혼을 해 살고 있는 커플에게도 물었다. 그리고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한 노래를 아주 작정하고 백번쯤 들었다. 거기로부터 돌아오는 대답들이 너무 격정적으로 변변치 못했고 시원치 않았다. 그들은 놀랍게도 모두가 구덩이 안에 있었다.


그렇게 지금 내게 사랑은 실체가 없고 실재하지 않았다. 그것만이 실제였다.


우리가 발음한 사랑,

바보 같은 개념들이 허공에 잠시 부유했다가는 사그라들었다. 마치 먼지 같았다. 먼지 같던 말들.

그것은 아무도 모르게 해로웠다.


그렇게 그 아침, 우리의 사랑 이야기는 맥없이 책상 위로 고꾸라 지듯 추락했다.





너무 한낮의 연애.


글을 쓰면, 우리의 이야기가 끝이 나면 나는 어렴풋 사랑의 형체를 볼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우리는 모두 구덩이 안이었다. 검색도 커플도 주저하는 연인도 사랑에 관하여 읽고 쓴 사람도 모두 각자의 구덩이에서 허우적 대느라 답을 구해내지는 못했다.

그래. 거기, 사랑 같은 것이 그 하찮은 구덩이 안에 있을 리가 있겠어? 그럴리가 없지.


나는 절박한 마음으로 연애소설을 집어 들었다. 구글북스로 들어가 아무거나, 아무나의 이야기나 상관없었다. 구덩이 밖, 거기서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이면 됐다.


그렇게 나는 한낮의 격정적인 해를 맞으며 너무 한낮의 연애를 읽기 시작했다.

나는 필용의 이야기에 금세 빠져 들었다. 인사이동을 통보받은 필용. 점심을 먹으러 맥도날드로 가는 필용. 한낮에 소극장으로 달려가는 필용. 양희를 아는 필용. 느닷없이 양희에게 고백을 받는 필용. 그러자 곧장 전에 있지도 않던 사랑에 갑자기 집착하는 필용. 그런 양희를, 집착을 떨쳐 버릴 수 없는 필용. 경악을 하는 필용. 찌질하게 우는 필용, 등 에게로.


그리고 양희.

글을 쓰고 오늘은 너를 사랑 하지만 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는 느닷없는 양희.


"선배, 나 선배 사랑하는데!"


지금은 사랑 하지만 내일은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양희가, 맥도날드에서 점심 메뉴를 주문하듯 필용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양희가 불현듯 내가 빠진 구덩이 아래로 손을 불쑥 들이 밀었다. 그녀가 나를 끌어올린 세상 밖에 사랑의 실체가 있었다. 양희는 구덩이 아래로 밀어 넣었던 나를 끌어올린 손으로 내 뺨을 찰싹 올려붙였다.


"멍청하게 허방에 빠져가지고 사랑을 찾고 있다니! 발을 잘 딛었어야지, 그 발을 사랑에 빠뜨렸어야지! 이렇게 허방에나 빠지고 멍청하게!" 양희의 목소리는 청명했다.


지난 한 주 윤리 책을 보고 시험 문제를 풀듯 사랑을 풀어 보려고 했던 내가 얼마나 멍청한지 감정의 고저 없이 사랑을 고백하는 양희의 목소리에 얻어맞고서야 나는 우리가 무언가 한참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내가 졸린 개를 끌어안고 타인의 사랑 이야기나 듣고 있었을 때 그때,

그렇게 허방에만 빠져 있기에,

지금은 너무 한낮이었다.


너무 한낮, 우리는 사랑에 빠져 있어야 옳았다. 연애를 해야 온당했다. 필용처럼. 양희처럼. 청춘이니까.


이렇게 좋은 날에 고작 졸린 개를 끌어안고 필용의 이야기를 읽고 있다니. 내가 끌어안고 있어야 할 대상은 졸리고 미지근한 개가 아니었다. 차라리 나는 밖을 뛰쳐나가 아무나의 목을 끌어안아야 했다. 그리고 말해야 했다. '우리 함께 사랑에 빠져 볼래요?!' 하고. 그렇게 헛소리를 해야 되려 어울리는 청춘이었으니까. 졸린 개와 안온과 평온은 노인의 단어였다. 책상에 앉아 사랑을 논하는 것은 노인의 일이었다. 우리는 사랑을 해야 했다. 말하지 말고 쓰지 말고, 한다. 구덩이 밖의 세상은 모두가 젊고 치열했다.


양희처럼 오늘 사랑하지만 내일은 하지 않아도 될 그런 깊이 없는 사랑이어도 괜찮다. 우리는 청춘이니까 괜찮다. 청춘에게 졸린 개와 안온과 평온은 나쁘고 해로웠다. 오늘 사랑하고 내일은 하지 않는 경솔함이 차라리 어울리는 청춘이니까.


그리고 순간 나는 만민이를 떠올렸다.

만민이가 한낮에 졸린 개나 끌어안고 사랑이 무엇인지 묻고 있는 나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사랑을 하면 학교도 빠지는 만민이. 이별을 하면 식음을 전폐할 줄 아는 만민이. 고작 중학생 주제에 사랑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만민이. 사랑에 생사를 내팽개칠 수 있는 그런 애, 만민이.

내 마음의 각도는 그런 사람들에게로 틀어졌다.


오늘 사랑하니 (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은 고백하는 양희와 이별을 한 여자 때문에 곡기를 끊을 수 있는 만민이 같은 애에 대한 온당한 애정.


그들은 우리처럼 구덩이 빠진채 사랑에 관하여 떠들지 않았다. 몸소 사랑을 했지. 고백을 하고 결석을 하고 밥을 굶지. 치열하고 격하게. 우리처럼 밥을 먹어야 하고 학교를 가야 하고 내일은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르니 오늘의 고백을 거르거나 미루지 않지. 그런 애들은 허방에 발을 빠뜨리는 바보가 아니라 사랑에 빠지고 마는 생기있는 애들 이니까. 그런 건 글과 말속에서 찾을 수 없다는 걸 아는 애들이니까. 그렇게 몸소 빠지고 말지, 허방 말고 사랑에.


나는 죄책감과 모멸감과 창피함이 각각의 퍼센트로 몰려왔다.

아침부터 허방에 빠진체 내가 나불거렸던 건 다 뭐였을까? 나는 양희와 만민이 앞에서 갑자기 한없이 볼품없는 안온한 노인이 된다.


우리는 양희와 만민이가 될 수 없어 삶이 다채롭지 못했다. 아무 데고 충돌해 멍이 든 상해처럼 붉고 푸르고 검어야 했는데 위험을 무릅쓰지 않은 청춘은 지워진 핏자국처럼 흐리멍텅 했다. 치열함이 이미 훑고 간 흔적처럼 어렴풋한 얼룩은 노인의 색이다. 지워진 핏자국은, 노인의 색은 불길하고 해로웠다.

우리는 파래야 했다. 청춘이니까. 청춘은 매일 충돌하고 멍이 드니까. 그래서 파란 것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졸던 개가 고개를 들고 상흔 하나 없는 조심성 많은 노인의 피부처럼 깨끗한 나를 측은하게 올려다보았다.


'넌 아직도 밖을 뛰쳐나가지 않고 이 한낮에 나를 안고나 있구나 인간아.'


개는 느리고 무심하게 나를 올려다 보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떨구고 잠이 들었다. 개는 나에게 뛰다 돌부리에 넘어져 무릎이라도 깨져 보라고 충고하는 것 같았다. 아파서 울어도 보고 욕도 해 보고 밥도 굶고 붉은 피를 직접 쏟아 보라고.


양희와 만민이와 개. 구덩이 밖의 실체들. 말과 글이 아닌 실제로 실재하는 것들.


나는 떠밀리듯 개와 양희와 만민이를 남겨두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필용이 한낮에 종로를 헤매듯 아무에게나 나와 함께 사랑에 빠져 보는 건 어떤지, 를 묻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밖은 너무 고요했다. 모두가 우리처럼 구덩이에 빠진 것 인가? 아무리 보아도 초로한 여자와 무거운 삶을 짊어진 키 작은 스페니쉬 남자만이 간헐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거리에는 그 흔한 '아무나' 조차 없었다. 모두 어딘가에 빠진 것이 분명했다. 허방이든 사랑이든. 각자의 사정대로.


어쩌면 양희와 만민이는 행운아였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사랑하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고백할 필용이가 있었고 결석을 하고 곡기를 끊게 할 애증의 대상이 있다는 것이 어쩌면 그들을 허방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게 한 것일지도.

우리는 서로 길을 잃고 헤매느라 오늘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식음을 전폐할 수고도 주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주저할 대상조차 찾지 못하고 준비한 멘트를 민망하게 구겨 넣었다. 그리고 다시 졸린 개와 양희와 만민이에게로 돌아갔다.


"오늘은 대상을 찾지 못했어"


나는 개와 양희와 만민이에게 맥없는 변명을 한다.


한 주 동안 찾아다녔던 사랑이 과연 무엇인지 나는 오늘 양희와 만민이를 통해서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어쨌거나 그것은 최소한 우리가 아침에 책상에 앉아 글로 쓰고 읽었던 그런 것이 아닌것 만은 분명 했다. 내가 일주일을 고민하고 자판으로 두들겼던 것들은 사랑과는 영 무관했다. 무관해도 너어무 무관했다.





선배, 선배 사랑하는데!

우리 함께 사랑에 빠져 볼래요?


이처럼 사랑은 내일이 없는것처럼 마음을 고백하고 그 사랑이 고꾸라 지면 식음을 전폐하기도 하는,

실재하는 양희와 만민이었다.








*만민이에 관하여.

만민이는 나에게 어떤 상징 같은 것이었다.

만민이는 사랑을 하면 결석을 할 수도 있고 이별을 하면 식음을 전폐할 줄 아는, 사랑 같은 걸로 일탈을 서슴지 않는, 허방에 말고 사랑에 빠지는 아이였다.

나는 만민이가 이별 후에 "식음을 전폐했다"는 대목에서 특히 그에게 강한 애정을 느꼈는데 바로 그 지점이 내가 만민이를 잊지 못하게 만든 순간이기도 했다.

만약 누군가가 이 글을 읽다 혹시라도 '어, 내가바로 만민이 인데!' 라고 한다면 그 만민이는 바로 당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만민이는 실제로 실재했지만 나는 만민이의 실체를 모른다. 그는 내 마음속에 상징적으로 존재하는 인물인데 허구의 인물은 아니더라도 구체성이 없는 인물로 내가 만민이에게 어떤 애정을 느끼게 된 것은 어린 만민이가 사랑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고작 중학생에 불과한, 아직 성장판이 닫히지도 못해 자라나는 육신을 감당하는 남자라기보다 아이에 가까운 소년이 '과연 사랑이란 무얼까?'라는 니체도 감당 못할 질문을 품었다니, 기어이 그런 걸 품고 자라난 성인 남자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는 아직도 실연을 당하면 결석을 하고 식음을 전폐할줄 아는 남자인체로 일까? 나는 그런게 궁금했다.

그것은 너무 한낮의 연애속 양희도 마찬가지였는데 내일은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 사랑을 고백하는 양희는 또 다른 상징이었다. 양희에게 하등 관심이 없던 필용은 느닷없이 양희로부터 사랑한다는 고백을 받고는, '그전까지는 양희를 제외한 모든 세상이 흥밋거리이고 이야깃거리였는데 오늘 이렇게 되니 모든 세상에서 오직 양희만이 관심사가 되었다.' 는데 스스로 놀란다. 그리고는 그 후로 매일매일 그전에는 관심조차 없던 양희의 사랑에 집요하게 집착하고 요구하며 갈망한다. 마치 애초에 사랑을 고백한게 자신이라는듯. 그렇게 고백의 몫은 양희였지만 고백을 하는 순간 사랑은 공동의 책임을 너머 필용에게 쏟아지듯 밀쳐 든다. 그 뜬금없는 밀침의 순간에 필용은 발을 헛딛고 허방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양희와 만민이.

그들은 그렇게 사랑이라는 깊은 해심을 찾아 스스로 다이빙을 하는 사람들 이었다. 헛딛고 빠져드는것은 위험했지만 그들은 사랑 앞에서 주체가 되어 그 안으로 일부러 뛰어드는, 깊은 심연 아래로 유려하게 헤엄을 칠줄 아는 사람들 이었다.


그들만이 오직 지금 사랑하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Guilty'라고 외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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