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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y Aug 06. 2023

독서모임 (23.08.05) 다른 방식으로 보기

모르던 분야에서 익숙함의 향기가

추천자, 발제자, 진행자 : 정의성


독서토론도서 : 다른 방식으로 보기 (존 버거, 스벤 블롬버그, 크리스 폭스, 마이클 딥, 리처드 홀리스) 

발제의도 : 존 버거의 다른 책 "사진에 대한 이해"를 통해 알게 됨. 영상, 영화, 이미지 매체에 대한 전문가로 만남. 이에 비해서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4가지 주제(이미지의 해석, 누드화, 유화, 광고)에 대한 대담 같은 내용. 사진에 관심 있어 예술평론을 찾아보고 전시회도 다니면서 작가들과의 대화도 나누면서 전시, 평론, 사진에 대해 황당한 경험을 하면서 의문을 가지게 되었음. 권력, 허영심, 매체, 성적착취 등과 관련한 예술계의 행태에 실망. (예시, 유명 애니메이션 작가의 전시물에 대해 작가의 성행위라는 설명에 변태라는 생각이 들었던 적도 있음. 예술을 사유화하고, 자기 과시, 상업용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었음.


참석자 : 정의성, 드로낙, ViVi, 밀크티, 무우우니, 이음, 정준시 7명.


이번 모임은 7명의 구성원들이 예술, 특히 시각이미지에 대한 존 버거의 책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가지고 다양한 의견들을 나누었습니다. 이야기의 주제는 발제자의 발제배경, 총평, 예술과 작가주의와 대중의 소비, 예술의 오리지날리티와 원작만의 침묵과 고요함, 예술을 능동적으로 바라봄, 할스의 그림에 대한 저자의 해석(P20)도 역시 신비화의 시도인지 등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복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얘기들이 연결되었던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총평으로는 신선한 새로운 시각이었고,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웠다는 내용들이 있었습니다. 미술 관람을 많이 다니시는 분이 말씀하신 원하던 책이었고, 힐링이 되고, 미술에 대한 다른 관점의 시각이 충격적이었다는 말씀과 이 책은 주류 미학에 대한 내용은 아니라는 얘기에 미학에 대한 관심이 좀 커졌습니다. 유화가 부유층의 소유욕을 채워줬다는 부분, 작가의 성향을 찾아보고 막시즘적 사회주의에 치우치지 않은 글이라서 좋았다는 평도 기억에 남습니다. 광고의 의미에 대해서 자유주의적 의미와 막시즘적 의미를 대비해서 설명해 주신 부분은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으로 놀랍고 재미있었습니다. 또한, 이 책이 써진 지 40여 년이 지난 지금 작가는 VR의 이미지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할지에 대한 의문은 창조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책을 읽으면서 비슷하지만 다른 느낌과 감상을 받는 것은 항상 독서모임에서 들을 때마다 놀라운 부분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는 꽤 모호하고 어렵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독서모임에서 토론하면서 이 책에 대한 대략적인 의도와 배경을 어설프게 알게 되었다는 점이 이번 모임의 큰 소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 예술과 작가주의와 대중의 소비

발제자님이 처음 "거짓으로 표현되는 예술에 거부감. 작가주의 예술이 소비되지 않아도 가치가 있는지? "라는 질문을 던져주셨습니다. 예시로써 P131~132의 램브란트의 자화상 2개를 비교하면서 상업적인 요구대로의 공산품과 작가의 진심이 들어간 자기표현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자화상을 통해서 바른 방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얘기하는 책이라고 이해했다는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술의 의미에 대해서 그림을 보고 감동받고 치유받을 수 있으면 예술이라는 말씀과 작가가 그리지만 이후의 해석은 독자에게 남겨진 몫이라는 얘기, 예술작품은 보는 시각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들이 봇물처럼 흘러나왔습니다. 기본적으로 작가와 예술작품이 일치하는지 않는지는 대중이 알 수 없으므로 예술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 한편, 예술이라는 것이 소설과 음악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시간의 검증을 거치면서 명작이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술작품과 예술가의 언행일치가 이루어졌을 때, 그 배경을 앎으로 인해서 예술작품이 더 공감을 받게 되고 호감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예술작품과 작가의 품성의 일치가 예술작품의 필수요건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결론에 동감하게 되었습니다.


 

2. 예술의 오리지날리티와 원작만의 침묵과 고요함

예술의 오리지날리티에 관해서 토론을 하면서 모작(레플리카), 사진 등과 같은 오리지널 예술작품과 구별할 수 없는 방법들이 나타나면서 과연 "원작만의 침묵과 고요함"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던져졌습니다.


미술관이라는 전시장소가 원작의 침묵과 고요함이라는 또 다른 신비화를 획득하도록 하는 장치로 쓰였다는 말에 공감이 됩니다. 한편으로는 원작과 모작을 구분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림을 보고 감동을 느꼈다면 그것은 보는 사람이 해석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시각이라는 것이 실재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뇌의 해석이라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니까요. 어떤 것이 예술작품이냐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감동과 치유를 받는 것이 예술작품이라고 했고, 작가와 예술작품의 행위와 품성의 일치가 예술작품의 조건은 아니라고 했으면,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작품을 그대로 베낀 것이 우리에게 감동과 치유를 제공한다면  그 자체로서의 오리지날리티를 가지는 것이 아닐까라는 과격한 생각을 했습니다.  



3. 예술을 능동적으로 바라봄

예술작품이라는 것이 나타내는 메시지에 대해서는 가공과 외곡이 있을 수 있고, 이 가공과 외곡은 부와 정치에 의해서 선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에서도 작품에 대한 신비화를 통한 작품의 해석을 통한 군중의 인식에 영향을 주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한다고 이해되었습니다. 오늘날 광고에 의해서 대중들의 선호가 정해지고, 물품소유를 강제하는 것처럼 예술을 통해서 대중들의 생각을 어떤 한 방향으로 이끌려고 하는 해석이 경제와 정치력의 논리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공감했습니다. 따라서, 개인은 주도적이고 자기 객관적인 시각으로 예술작품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평가에 영향을 받게 됨으로 진정한 자기의 관점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설득의 심리학에서 내가 내리는 판단과 행동이 아주 사소한 주변의 영향에 따라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달라질 수 있다는 것에서도 주도적, 능동적 시각이미지 보기라는 것이 그야말로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롯한 나로 존재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4. 할스의 그림에 대한 저자의 해석(P20)도 역시 신비화의 시도인지

어떤 예술 작품에 대해서는 보는 개인마다 해석이라는 것이 뒤따르는 것 같습니다. 저자도 다른 작품들에 대한 주도계층의 시선에 대해서 비판하면서도 저자는 할스의 그림에 대해서 저자 나름의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신비화라는 것이 어떤 해석이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져서 군중심리를 이루어질 때 이루어진다는 것이 신비화에 대한 명확한 해석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 책의 중간 부분 어디선가 예술작가는 도제시절을 통해서 그 시대에 받아들여지는 이미지 표현 방식을 배우고, 그 방식에서 탈피해서 작가 자신의 새로운 표현방식이 만들어질 때 새로운 예술작품이 탄생하게 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예술 사조의 변화도 끊임없이 다른 방식으로 보기가 진화해 온 것이 아닌가라고 이번 독서토론을 통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림에 대해서 잘 모르고, 어떤 그림이 좋은 그림인지, 어떤 예술작품이 좋은지 모호한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사에 처음 들어가서 기안문을 썼는데, 글을 그렇게 쓰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고, 결재권자가 마음에 들어 하도록 계속해서 수정을 받아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떤 포스터 디자인을 할 때도 100%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포스터를 선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일에 대해서 주관이 없다" 라는 말을 많이 하곤 합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토론을 통해서 뭉크의 "절규",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예술작품을 만났을 때의 치유와 감동, 어떤 작가의 작품과 설명하는 텍스트의 불일치 등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주관적 예술체험이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것을 보거나 듣게 될 때, 그것이 좋다, 싫다는 가치 판단은 쉴 새 없이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판단의 근거는 판단을 하고 난 이후에 찾아낸다는 것을 여러 책에서 얘기하고 있고 동의합니다. 그리고, 내가 좋다, 싫다는 것의 판단이 바로 전에 있었던 일과 완전히 별개는 아닐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술작품에 대한 선호도 역시 생활의 연장 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이 듭니다. 아직도, 언제 보아도 명작이고 감동과 치유를 받을 수 있는 작품이라기보다는 어느 시점, 어느 장소에서 어떤 작품이 나에게 감동과 치유를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나 자신의 상황을 명확히 인식하고,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질 때 능동적 보기라는 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미학이라는 것에 또 다른 관심을 가지게 되고, 헤겔, 보드리야르, 단토라는 키워드를 가져가게 되는 독서모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아는 것이 없는 분야이니만큼 조용히 듣고 오려고 했는데, 생각지 못하게 많은 말을 하게 되었고, 그 말들은 모두 오신 분들의 열정적인 참여에 영향을 받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독서모임을 통해서 정리할 수 있어서 너무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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