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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y Mar 20. 2024

독서모임 - 작별하지 않는다.(3.17)

같은 책을 읽었는데....

추천자, 발제자, 진행자 : 권태진 (3.17)

독서토론도서 : 작별하지 않는다. _ 한강  

참석자 : 권태진, Dan, 고형찬, 무니, 박선희 아이스크림, 김무상, 자유영혼  8명


한강이라는 작가에 대해서 듣기는 했지만, 읽어볼 생각을 하지 못하다가 이번 모임을 통해서 '채식주의자'와 함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게 되었습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책을 읽는 목적이 나 자신에 대한 더 나은 이해, 세상살이에 대한 실용성이라는 목적에 치우쳐 있어서 소설과 같은 뭔지 모를 모호함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항상 어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 소설도 읽으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이야기의 줄거리와 맥락이었던 것 같습니다. 경하, 은선, 은선의 어머니 정심의 얘기가 과거와 현재가 혼재되어서 기술되어서 줄거리 따라가기 힘들다고 생각하면서 읽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소설 전체의 분위기를 음울하게 느꼈고, 작은 일도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지 의심하면서 읽었던 것 같습니다. 앵무새를 구하기 위해서 찾아가는 뒷부분의 눈 속에서의 모험과 앵무새의 죽음과 그다음에 나타나는 은선과의 환상적인 장면들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뭐지 판타지 소설인가?라는 생각까지 했었습니다.


도대체 이 소설을 읽고 어떤 말씀을 해주실지 궁금하기도 하고, 나와는 얼마나 다르게 읽었을까를 듣고 싶은 심정으로 독서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첫 번째 주제는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작별하지 않는다는 말은 정심의 입장에서의 과거의 불행과 결별하지 못한다는 것과 그 불행이 은선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얘기를 나누는 중에 나왔던 과거의 불행한 사건에 대해서 은선과 정심을 떠나서 현재의 사람과 미래의 후손에게도 연결되는 의미로 말씀하시는 것에서 시야가 조금 더 넓어지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별과 이별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신 분의 말씀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한편으로 사건과 심경 독백의 교차로 기술한 문체를 말씀해 주시기도 하셨고, 눈에 대한 공포 기술이라는 점을 꼭 찍어서 말했을 때 공감이 많이 갔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책을 다시 읽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좋았습니다. 추가적으로 4.3 사건이 과거의 사건이지만 현재의 사건으로 인해서 되살아난다는 얘기는 소설을 읽는 목적이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흥미위주만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유럽의 홀로코스트와 같이 사회적인 매듭이 지어진 듯한 사건들에 비해서 4.3 사건은 과거에 종결된 사건이 아니고 지속되어야 할 agenda로  볼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로운 지점이었습니다. 4.3 사건을 소재로 하지만, 4.3 사건에 대한 내용이 부족하고 그 사건을 왜곡할 수 있지 않느냐는 의견과 그로 인한 실재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모욕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소설을 바라보는 시선을 추상화를 바라보는 시선과 비슷하다는 말에서 소설을 읽는 방식에 대한 조그마한 이해를 얻었다는 안도도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요즘의 현대미술은 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되는 분야인 것도 같습니다.


이 소설에 대한 표현 중에서 사진을 여러 장 연결해 놓은 것 같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2014년의 작가의 꿈이라는 현실적인 경험으로부터 인터뷰와 2021년 출간까지가 작가의 경험에 근거한 자전적 소설이라는 얘기도 흥미로웠습니다. 집필기간만 3년이 걸렸고, 한강이라는 작가가 한 단어 한 단어를 허투루 쓰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책에 대한 인상이 완전히 달라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두 번째 주제라고 할 만한 것은 책에서 나왔던 다양한 상징들에 대한 얘기였습니다. 앵무새, 제주도에서의 환상과 같은 은선과의 대화를 생령으로 설명하는 부분, 새를 인선의 엄마를 상징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도와달라는 뜻으로 이해하신 분,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따라 하는 새라는 측면에서 선택되었을 것이라는 얘기,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상징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와 소설의 주요한 내용을 놓치는 것 같다는 말에 항상 예상되는 함정에 빠지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우습기도 했습니다.


이 소설을 지극한 사랑에 대한 책이라는 소개와 그 소개내용에 공감해서 삶에 대한 사랑, 사람에 대한 사랑을 찾아 읽으시는 분들에게는 정말 같은 것을 보면서 다른 것을 찾을 수 있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감탄했습니다. 특히, 전혀 생각지 못했던 부분은 눈에 고립되면서 새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서 살아야한다는 대목에서 죽음에 더 가까웠던 사람이 삶에 대한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고 이해하는 부분이 신선하고, 새로운 시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소설을 어떻게 읽고 이해해야 할지는 아직도 모호합니다. 세계의 명작이라는 소설들도 읽으면서 이게 왜 그렇게 유명하지?라는 질문을 해왔습니다. 지난번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면서 느꼈던 20년 전의 인상이 바뀌는 경험을 하면서 소설이 가지고 있는 인상의 변화는 나의 삶과 생각의 변화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작가가 의도한 이 소설의 의미가 아니라 내가 바라보는 이 소설을 읽고 난 이후의 나의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알면 더 많이 보이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현대미술을 감상하듯이 소설, 영화 등 모든 콘텐츠는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 살펴보느냐에 따라서 느낌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기존의 스토리 줄거리를 따라서 가는 것이 익숙한 나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소설을 읽으면서 바라보는 시선을 경험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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