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선유실리 가는 길

덩굴 라일락 향기를 찾아서-#2. 산책

by 시를아는아이

”우리가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이해하고 사랑한다.”_로베르트 발저/<산책>


1.

아마 한두 번 우연히, 점심 먹고 산책하다가 마주치거나 스쳐 지나간 적이 있을 거예요. 저는 원래 그 시간만큼은 오로지 혼자서 보내고 싶어서, 가능하면 회사 사람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큰 도시라기보다 자그만 마을 같은 이 출판 동네에서 사실 그러기가 쉽지 않죠.


2.

그래서 어떤 때는 예전에 출근하던 종로가 그리워져요. 사무실에서 나와 큰 도로 하나만 건너면 회사 사람 마주칠 걱정 없이 혼밥이든 홀로 산책이든 편하게 할 수 있었으니까요.

아, 그 무엇보다 그 청계천… .

누구는 자연스러운 물길이 아니라 큰 ‘어항’ 같은 곳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도심 한복판에 빌딩이 아닌 그처럼 텅 빈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고마울 때가 있었어요. 그리고 어린 시절 동네 앞으로 정겨운 강이 크게 돌아나는 시골에서 자란 저같은 사람에게는, 물길을 따라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었죠.


3.

그래도 여기 이 도시는 몇 가지 사소한 점만 빼면 산책자에게 꽤 괜찮은 곳이죠.

걷다 보면 정말 비슷한 건물이 없을 정도로 개성적인 건축물들, 출판사마다 정성스럽게 가꾼 예쁜 정원들, 긴 산남 습지를 따라 사계절 자연스럽게 피고 지는 수풀들, 봄과 가을 무렵 멀리 서해의 예쁜 노을, 머리 위로 하루 종일 대이동으로 소란스러운 늦가을의 철새들… .

그리고 말없는 친구처럼 눈길만 돌리면 바라볼 수 있는 정다운 심학산과 지친 몸을 이끌고 바다의 품으로천천히 안기는 드넓은 한강의 숨결까지… .


4.

하지만 솔직히 이렇게 멋진 곳이 아니어도 저는 어처피 나름대로 산책을 하고 그 길 위에서 어떤 매력을 찾아냈을 거예요. 말 그대로 최근의 제게 산책과 커피가 거의 ’일과‘가 되어 버려서요… . 그 사소한, ’혼자만의 시간‘이 없으면 일도, 생각도, 글도 그 ’바퀴‘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고 삐걱댈 테니까요.


5.

그런데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그 평범한 어느 일과 가운데 몇 번 ’진‘과 ‘궤도’가 겹친 적이 있어요.

아마 제가 대체로 다른 이들보다 점심을 늦게 먹는 편이라-나름대로 빨리 먹는데도-아마 먼저 산책을 나가서, 어떤 이가 어쩔 수 없이 ‘진’의 뒤를 따라갔다는 걸 까많게 모르고 있겠지만… .

앞서 말했지만 여기서는 피하고 싶어도 산책길에 사람들 만나는 일이 놀라운 일이 아니라서, 저도 그냥 모른 척 저만의 ‘일과’를 치를 뿐이었죠.


6.

그런데 그런 일이 두세 번 겹치니까 조금은 더 눈길이 가더군요. 조금 더 정확히는 ‘진’의 큰 키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눈에 잘 띄었다고 해야 할 듯하네요.

그리고 그 순간 제게는 시각적 포인트 같은 것이 하나 들어왔어요. 핑크색 아담한 쇼핑백 같은 걸 들었는데, 청바지에 심플한 티를 입은 옷차림과 그 종이백 묘하게 시선이 끌렸어요.


7.

아마 그 무렵 비록 나만의 ‘산책 일과‘과 조금 흔들리더라도 우연인 척 한 번쯤 가볍게 말이라도 붙여 볼까 생각하기도 했었는데… . 물론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죠. 기회가 왔더라도 제가 과연 미친 척하고(?) 그렇게 했을지는 스스로도 의문이지만… .

하지만 무엇보다 앞서 ‘슬리퍼’에서 상상한 것처럼,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함께 나눌 생각과 취향도 많지 않을까, 혼자 저도 모르게 잠시 달콤한 몽상에 빠지기도 했죠. 음악이든 영화든, 책이든 여행이든 ‘같은 것을 함께 좋아하면서 서로 친구가 된다’는 말도 있으니까요… .

keyword